7시 45분 열차에서의 고백
리사 엉거 지음, 최필원 옮김 / 황금시간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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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스러운 두 아이의 엄마이자 한 남자의 아내인 셀레나는 가정은 물론이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 바로 얼마 전까지는 자신의 인생이 그렇게 완벽하다 여겼다. 남편인 그레이엄이 아이들의 보모인 제네바와 섹스를 하는 걸 내니캠으로 보기 직전까지는 말이다. 그것도 두 사람의 섹스는 한 번이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셀레나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한다. 그레이엄이 여자 문제를 일으킨 게 이번뿐만이 아니었다는 건 셀레나를 체념하게 했다. 그리고 제네바가 너무나 훌륭한 보모였기에 당장 그녀를 해고하면 셀레나는 일과 가정의 균형을 유지하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답답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던 셀레나는 타야 할 통근열차를 놓치는 바람에 다음에 온 7시 45분 열차를 탄다. 열차에 올라탄 셀레나는 옆자리에 앉은 여자 마사와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어쩌다 보니 자신이 처한 상황을 털어놓게 된다. 그레이엄과 제네바의 불륜에 대해서 말이다. 이후 셀레나는 속이 조금은 후련해지게 됐지만, 그날 이후 제네바가 감쪽같이 사라진다.

앤은 자신의 보스 휴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 휴는 앤에게 깊이 빠져 사랑한다고 말하며 아내와는 이혼할 거라고 한다. 하지만 앤은 그게 영 내키지 않는다. 일단 앤은 휴를 사랑하지 않았고, 회사의 실질적 주인은 휴의 아내이기 때문에 자신의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휴는 관심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다 휴의 아내가 사실을 알게 된 후에 앤은 회사를 나가면서 입을 다무는 조건으로 돈을 받았고, 이후 다른 타깃을 물색하기 시작한다.




완벽하다 여겼던 가정과 일상이 다 허울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얼마나 절망스러울까 싶다. 셀레나는 멋진 남편과 사랑스러운 아이들, 사회생활까지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제서야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레이엄이 보모 제네바와 자신들의 아늑한 보금자리에서 몸을 섞은 것은 충격이 아니라 깨달음이 됐다. 그레이엄이 일으킨 여자 문제가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었고, 얼마 전에 해고된 그가 일을 구하려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셀레나는 좌절 섞인 체념을 하게 됐다.
하지만 마음은 답답하기 마련이라 어디 털어놓기라도 했다면 그나마 속은 시원해졌을 테지만,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이 문제를 이야기할 수 없었다. 가까운 친구에게 말하기엔 낯부끄러웠고, 그렇다고 엄마와 언니에게도 할 수 없었던 건 아버지가 과거에 화려하게 바람을 피워 엄마에게 이혼당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에게 낯선 사람이 나타나 대화의 물꼬를 트게 되었다. 같은 열차를 탄 마사가 호감이 가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지 셀레나는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게 됐다.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그녀와 헤어진 뒤에는 뭔가 찝찝함이 남긴 했지만 말이다.
이렇게 소설은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는 걸 알게 된 셀레나가 열차에서 만난 마사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본격적인 전개를 보였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영화로도 제작된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이 떠올랐다. 그 소설이 두 남자의 끈질긴 스릴러였다면, 이 소설은 여자 버전으로 세밀한 불안감을 야기하는 초반 모습을 보였다.

이후 앤의 시점이 등장했는데, 그녀가 셀레나가 열차에서 만난 마사라는 건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앤의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그녀가 사기를 치면서 먹고산다는 걸 보여줬다. 앤이라는 이름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었고, 그 외에도 여러 이름으로 살아가며 여러 사람에게 사기를 칠 기반을 다져놓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앤이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셀레나에게 어떤 목적을 가지고 접근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면서 또 다른 인물의 시점이 등장했는데, 망해가는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는 15살 펄이었다. 펄은 조용한 소녀라 친구가 없었지만, 똑똑한 아이였다. 엄마의 서점에서 온갖 책을 다 읽었을 만큼 지식의 깊이가 깊었다. 엄마가 남자친구를 허구한 날 바꿔도 신경을 쓰지 않았을 만큼 체념한 상태였고, 독립적인 아이였다. 서점에 고용된 직원이자 엄마의 새 남자친구 찰리와는 대화가 잘 통해 마음이 잘 맞았다.

이렇게 셀레나와 앤, 펄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진행되면서 제네바가 실종된 사건을 중심으로 소설은 흘러갔다. 바람기가 다분한 남편이라고 해도 가정을 지키고 싶었던 셀레나는 그를 보호하려고 했고, 앤은 셀레나에게 연락을 하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펄은 갑작스러운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됐다.
소설은 세 여자가 무슨 이유로 어떻게 얽히게 되었는지, 사라진 제네바는 대체 어디에 있는지 하나씩 풀어가는 과정을 보여줬다. 소설이 어느 정도 진행됐을 때 누군가의 정체를 예상할 수 있었지만, 그게 소설의 재미를 떨어뜨리기보다는 흥미를 느끼게 했다. 이후에는 또 다른 비밀들이 여러 번 밝혀져 놀라움을 안겼다. 펄에 관한 부분과 셀레나의 남편에 관한 진실이었다.
몇 번의 비밀이 밝혀지고 난 후에 든 생각은 소설 속에 등장한 여성들은 서로 충분히 반목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미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안쓰러워하고 안타까워하며 손을 내밀었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들의 묘한 연대가 호감 요소로 작용했다.

이 소설은 리사 엉거 작가의 14번째 출간 작품인데 국내에는 이 소설만 출판되었다. 여러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인데 이 작품만 나왔다니 아쉬운 마음이 든다. 작가의 다른 소설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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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함께했던 고백의 공간은 세상 그 어느 곳보다 솔직하고 진실한 곳이었다. 그녀는 날아갈 것 같은 해방감을 다시 느끼고 싶었지만 동시에 그것이 너무도 두려웠다.
그때 그 여자가 뭐라고 했었지? 골치 아픈 문제가 알아서 해결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때의 기억, 귓전을 맴도는 그 여자의 목소리가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나쁜 일은 항상 벌어지니까요. - P121

엄밀히 따지면, 그들은 그녀가 끼어들기 훨씬 전부터 이미 위기에 처해있었다. 진작부터 생겨난 미세한 실금이 조금씩 넓고 깊어져 가면서 지금의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만약 두 사람의 사랑이 견고했다면 이런 풍파 속에서도 그들은 끄떡없었을 것이다. - P106

이 악몽에서 벗어날 길은 그것뿐이야. 진실. 그 후 어떤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되더라도. 문제는 그냥 알아서 해결되지 않아. 당당히 맞서서 직접 풀어나가야 한다고. 이젠 그걸 알 나이도 됐잖아. - P459.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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