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서점 - 살인자를 기다리는 공간,
정명섭 지음 / 시공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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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수이자 고서적 수집가로 이름을 알린 유명우는 그날도 방송에 출연하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었지만 그날이 특별했던 건 이제껏 준비해온 일을 드디어 시작할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의 녹화를 무사히 끝낼 때쯤, 유명우는 오늘이 방송 출연 마지막이라는 말을 꺼냈다. 이유를 묻는 사회자의 말에 유명우는 15년 전 세상을 떠난 딸과의 약속을 지켜야겠다고 하면서 고서적 서점을 열겠다고 말했다. 사냥꾼이 자신을 찾아올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15년 전, 프랑스에서 공부를 하다가 가족과 귀국한 유명우는 도착한 날 곧바로 부천에 가야 했다. 교수 임용을 도와준 총장의 고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 딸을 태우고 차를 몰고 가는데, 비행 때문에 지쳤는지 딸은 울음을 멈추질 않았고 아내 역시 딸의 편을 들었다.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가족들이 몰라줘서 마음이 상한 유명우는 차 안에서 그만 화를 내고 말았다.
그러다 새로 생긴 터널로 접어들었을 때 사고가 난 듯, 도로를 막고 있는 차를 보게 됐다. 차에서 내려 보닛을 들여다보던 남자에게 다가간 유명우는 길을 막고 있다며 화를 내다가 문득 운전석 유리창에 피가 튄 것을 발견한다. 그때 남자가 칼을 들고 다가와 유명우를 협박했고, 급기야는 렌치로 유명우의 다리를 내리쳤다. 그러고선 몸싸움을 벌이다 남자는 아내와 딸이 타고 있는 유명우의 차를 끌고 달아나버렸다.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남자, 일명 사냥꾼에게 아내와 딸을 잃은 유명우는 언젠가는 그가 자신을 찾아올 거라는 사실을 예감하고 있었다. 15년 전 사건이 일어나던 날, 사냥꾼이 유명우와 같은 고서적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몸싸움을 벌이던 때, 유명우는 차 안에서 가방을 끄집어 내 사냥꾼의 공격을 막아내려 했는데 가방 안에 중요한 게 들어있었는지 그는 섣불리 행동하지 못했다. 그러고선 사냥꾼이 떠난 후, 유명우는 가방 안에 고서적이 들어있는 걸 발견하고 그때부터 목표를 세웠던 건지도 모른다.
유명우의 현재와 15년 전의 사건이 밝혀지기 전에 먼저 등장한 건 사냥꾼이 어떻게 사람을 납치하고 고통을 주며 죽음에 이르게 하는지까지의 과정이었다. 사이코패스 그 자체라 글자를 읽는 것만으로도 두려웠다. 이런 인간을 유명우가, 그것도 15년 전 사건으로 다리를 절단해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상대할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렇게 초반 설명이 지나가고 유명우의 '기억 서점'이 개점을 해 예약제로 손님을 받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사냥꾼을 찾는 모습이 이어졌다. 아무나 들어올 수 없도록 인터넷으로 이름과 연락처를 남겨 예약을 한다는 게 그나마 안심이 되는 부분이었다.
예약 손님 중 15년 전 사냥꾼과 나이대가 비슷하면서 고서적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김성곤, 책에는 관심이 없는데 찾아와선 15년 전 사건으로 같이 책을 쓰자고 찾아온 유튜버 조세준, 유명우처럼 프랑스 유학을 다녀왔으며 사냥꾼과 걸음걸이가 흡사한 김새벽, 그리고 아들을 데리고 와 강압적, 폭력적으로 구는 오형식이 주요 인물로 추려졌다. 추리력이 꽝인 나는 이들 중 누가 사냥꾼일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유명우는 뭔가 감이 왔는지 몸이 불편한 자신 대신 도와줄 사람을 선택했다. 바로 유튜버 조세준이었다. 함께 책을 쓰자며 찾아온 그를 잘 구슬리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는지 유명우는 그에게 사냥꾼을 찾고 있다면서 의심되는 사람들의 뒤를 캐달라고 부탁했다. 조세준이 마음에 들어 할 만한 조건도 있었다.

그렇게 유명우 대신 사냥꾼을 쫓게 된 조세준의 시점이 이어지면서 긴장감과 궁금증을 안겼다. 누가 사냥꾼일지 예상하는 재미가 있었고, 한편으로는 조세준이 위험에 처하게 되어 긴장감을 유발했다. 잘못하면 큰일이 났을지도 모를 위기 상황도 있었지만 다행히 그는 유명우에게 그토록 궁금해하던 진실을 알려줄 수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사냥꾼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머리를 띵하게 만들었다. 그러고선 곧바로 사냥꾼을 위해 준비한 유명우의 선물을 펼쳐놓게 됐다. 후반으로 가면서 갑작스레 몰아친 진실이 놀랍기도 했지만, 유명우는 이미 짐작했던 것 같았다. 스스로를 사냥꾼이라 칭하며 약한 사냥감을 잔인하게 죽이던 그를 위한 최고의 복수였다. 범인을 잡아도 법은 피해자와 유족이 마음에 들만한 처벌을 내리지 않기 때문에 개인적인 복수를 준비하고 이뤄냈다는 게 통쾌했다. 그것도 아무런 흔적을 찾아낼 수 없을 완벽한 복수였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 과정에서 경찰을 불러달라고 애원하던 사냥꾼의 모습이 정말 비루했다. 자신이 사냥꾼일 때는 되지도 않는 권위에 휩싸여 있더니, 입장이 바뀌어 사냥감이 되자 꼬리를 내린 꼴이 참 같잖았다. 그런 그에게 딱 어울리는 죽음이었기에 완벽한 복수였다.

정명섭 작가의 책은 처음 읽어본 건데, 가독성이 훌륭했다. 자잘한 이야기 없이 속도감 있게 전개됐던 게 마음에 들었다. 작가의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다.



* 이 리뷰는 펍스테이션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지난 15년간 차근차근 준비해온 일을 이제야 시작하게 되었다. 지나간 세월을 떠올리면서 그는 자신이 심사숙고하여 준비한 미끼를 사냥꾼이 물기를 바랐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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