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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소녀들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7월
평점 :

잭 브룩스 신부는 최근 교구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의 한가운데에 있다. 교인들의 시선과 언론을 신경 쓰는 주교는 잭을 서식스에 있는 채플 크로프트라는 작은 마을에 마침 공석이 생긴 임시 교구사제로 가는 게 어떠냐고 한다. 한창 사춘기에 접어들 열다섯 살 된 딸 플로가 맞이할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 때문에 걱정이 되지만 잭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먼 길을 달려 플로와 함께 도착한 마을은 예상했던 것보다 좋지 않았다. 플로는 교회를 보자마자 불경스러운 말을 내뱉었을 정도였고 사택의 상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교회를 먼저 둘러보러 갔을 때 그들은 "버닝 걸스"라 불리는 섬뜩한 인형을 발견한다. 수백 년 전 메리 여왕의 신교도 박해 때 이 마을 주민이 화형을 당했고 그중 둘은 여자아이였는데, 그들을 기리기 위해 처형 추모일에 인형을 만들어 태우는 마을의 전통이라고 잭이 딸에게 알려주었다.
기이한 분위기와 버닝 걸스 인형으로 인해 마을 첫인상이 그리 좋지 않았던 그들 앞에 피를 뒤집어쓴 여자아이가 나타난다. 잭과 플로는 깜짝 놀라지만 이내 아이의 아빠가 나타나 상황을 설명하고 아이를 데려간다. 하지만 이후로도 잭과 플로는 마을에서 여러 사람을 마주하며 의문스럽고도 섬뜩한 일을 겪는다.
현재 지내던 곳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으로 인해 시골 마을에 좌천 아닌 좌천을 당한 잭의 모습으로 소설이 시작되었다. 루비라는 이름을 가진 누군가와 관련된 사건이라는 게 언뜻 언급되었고, 이후에는 잭과 플로가 채플 크로프트에 적응하며 일어나는 사건을 중심으로 흘렀는데, 소설이 끝나기 전까지는 루비에 관한 사연이 밝혀질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잭과 플로가 임시로 지내게 된 마을에 도착하면서 놀랐던 건 잭이 흔히 볼 수 있는 남자 신부가 아닌 여자 신부, 엄마라는 사실이었다. 종교와 거리가 멀어서 모르는 부분이 많은데, 여자 목사가 있다는 건 들어봤어도 여자 신부가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하필이면 이름도 잭이라서 당연히 남자일 줄 알았다. 외국 이름은 줄여서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해도 잭은 보통 남자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을에서 잭을 처음 맞이한 교회 관리인 에런의 반응이 이해가 됐고, 한편으로는 나의 편견을 깨닫게 되기도 했다.
잭과 플로가 마을에 들어서면서부터 좋지 않은 인상을 받았는데, 피를 뒤집어쓴 여자아이를 마주하면서 모녀가 이 마을에 적응하는 게 어려울 것 같다는 예상을 했다. 30년 전 이 마을에 살던 메리와 조이라는 소녀가 갑자기 사라졌는데도 수사는 가출로 종결됐다. 메리 여왕이 박해를 하던 시절부터 마을에서 농장을 하며 오랫동안 살아온 하퍼 집안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었지만 부모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잭은 전임 신부 플레처가 교회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하는 바람에 공석이 생긴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 플레처 신부의 죽음에는 뭔가 꺼림칙한 부분이 있었다. 채플 크로프트에서 맞이한 첫 번째 일요일에 잭은 신도석에서 어린아이가 타는 모습을 보고 연기 냄새를 맡았고, 플로는 무덤가에서 머리와 팔이 없는 여자아이가 불에 붙은 걸 목격하지만 두 사람 다 환영을 본 것이었다. 정말이지 굉장한 환영식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잭에게는 오래전 살해당한 남편에 관한 사연과 가석방됐다는 살인범, 그리고 이곳에 오기 전 루비라는 아이의 사건이 있었기에 내내 예민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잭은 죽은 남편에 관한 진실 외에 플로에게 말하지 않은 또 다른 비밀이 있다는 걸 예상하게 했다.
잭이 과거에 일어난 여러 사건들로 인해 괴로워했다면, 플로는 현재 일어나는 일들이 문제가 됐다. 마을에서 처음으로 사귀게 된 루커스 리글리가 어떤 아이인지 아직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가까워졌고, 그를 통해 기괴한 분위기의 폐가를 알게 되어 조금은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하퍼 농장의 큰딸 로지와 사촌 톰이 그녀를 괴롭혔고 공기총을 쏘기도 하는 등 위협을 했다. 그러면서 플로는 교회와 사택 주변에서 여러 사고를 겪으며 다치기도 했다.
소설은 1인칭 시점의 잭, 3인칭 시점의 플로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어떤 남자의 시점을 오가고 있었다. 그 남자가 잭의 남편을 죽이고 감옥에 갔다가 출소한 살인범이라는 건 금세 알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남자가 잭을 찾으려고 헤매며 여러 사람들, 심지어는 교회에서 신부까지 죽이는 범죄를 저질렀기에 잭의 신변이 걱정됐다. 죄의식이 전혀 없어 보이던 사람이라 안 그래도 작은 마을에서 일어나는 사건만으로도 힘든 모녀를 궁지에 몰아넣을 것 같아 불안했다.
중반 이후로 그 남자가 누구인지 밝혀지긴 했어도 그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지만, 과거에 일어난 사건의 이면이 드러나며 남자에 대한 생각이 조금은 달라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잭에 대해 한 가지 가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는데 결말에 그게 진짜였다는 게 밝혀졌다. 추리력이 형편없는 사람이라 오랜만에 맞혀서 신이 났다.
후반으로 가면서 과거와 현재의 불안한 압박이 이어졌고, 멀리서는 의문의 존재인 그가 다가오고 있었다. 현실적이면서 비현실적인 두려움이 겹겹이 싸여 잭과 플로를 옥죄고 있었다. 여기에 마을 교회의 비밀스러운 납골당과 폐가의 우물에서 유골이 여러 구 발견되는 등 여러 사건이 일어나 정신없게 만들었다.
결국 초반부터 인상이 좋지 않았던 인물이 관여가 되어있다는 걸 보여줬고 믿었는데 배신을 한 존재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마을의 여러 사람들의 발목을 붙잡고 이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보여줬다. 그들이 사악한 존재는 아니었어도 악한 행동으로 인해 이 모든 일이 벌어졌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한 데에는 이유가 있지만, 그 이유가 모든 결과를 타당하게 보이게만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태생부터 악한 인간도 더러 존재한다는 걸 보여준 캐릭터도 있었다.
세 번째로 읽는 C. J. 튜더의 소설인데 갈수록 그녀의 소설이 재미있어지는 것 같다. 보통은 화려하게 데뷔를 한 작가의 후속작은 실망스럽기 마련인데, 나는 반대로 데뷔작 <초크맨>보다 이후에 나온 소설을 더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이 소설은 스산한 분위기와 압박감으로 으스스 해져서 늦은 밤과 새벽에 읽다가 오싹해져서 선풍기를 끄기도 했다. 여름밤에 읽어서 더욱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다.
* 이 리뷰는 다산북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시골에는 어두운 과거를 지닌 마을이 많다. 역사 자체가 무고한 사람들의 피로 얼룩진, 무자비한 인간들이 남긴 기록이다. 선이 항상 악을 이기는 건 아니다. 기도를 한다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도 아니다. 가끔은 우리 편에 악마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 P233
나는 사제답게 정직을 강조하지만 사실 위선자다. 정직은 과대평가된 덕목이다. 진실과 거짓의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반복하는 횟수뿐이다. - P148
"악마가 있다고 믿으세요, 신부님?" 나는 머뭇거린다. "악한 행동은 있다고 생각해요." "사악하게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고 보세요?" (……중략) "인간은 누구나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말한다. "하지만 한쪽이 다른 쪽보다 월등한 경우가 더러 있죠." - P272.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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