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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 팜
조앤 라모스 지음, 김희용 옮김 / 창비 / 2020년 12월
평점 :
미국에 사는 필리핀 혼혈 제인은 딸 아말리아를 데리고 남편, 시부모와 살던 집에서 나와 사촌 아테가 머무는 합숙소에서 지내고 있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 것으로도 모자라 제인을 비하하며 욕을 하는 문자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어린 딸을 차마 두고 올 수 없어서 데리고 나오긴 했는데,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딱히 무언가를 배운 적이 없어서 할 줄 아는 게 없던 제인은 일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사촌에게 빌붙는 게 눈치가 보일 무렵, 몸이 안 좋아 쉬어야만 했던 아테가 자신의 일을 대신해달라고 부탁했다. 제인이 일을 하는 동안에 아테가 아말리아를 보겠다면서 말이다. 갓난 딸을 떼어놓는 게 걱정이 됐지만 제인은 돈을 벌기 위해 일을 시작한다. 하지만 제인은 판단 착오로 인한 잘못으로 해고되고 만다.
난감한 상황에 처한 제인에게 아테는 다른 일자리를 주선했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부자이고, 또 유명한 사람들의 아기를 대신 품고 낳아주는 대리모 일이었다. "골든 오크스"라는 비밀스러운 농장에는 엄격하게 선발된 대리모, 일명 호스트들이 임신 기간 동안 상주하며 코디네이터를 비롯해 관리인, 의사의 케어를 받았다. 호스트는 의뢰인이 지불하는 월급을 매달 받았는데, 그 액수는 뉴욕에 있는 아파트 월세를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을 정도였고 의뢰인이 호스트를 마음에 들어 하면 그 이상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기가 무사히 태어나면 그에 상응하는 엄청난 보너스를 덤으로 받을 수 있었다.
선택은 제인의 몫이었지만 답은 하나뿐이었기에 그녀는 골든 오크스에서 전무이사 메이를 만나 계약을 체결했고, 의뢰인 부부의 배아를 착상한 이후 농장에 입주한다.
소설은 상류층 의뢰인을 위한 최고급 대리모 시설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미국인 아버지와 필리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제인과 전형적인 금발의 아름다운 백인 여성 레이건은 각자의 사정으로 돈이 필요해서 호스트가 되는 캐릭터였다. 제인에게 일을 소개해 준 사촌 아테는 나이 든 세대의 필리핀 어머니로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중국계 미국인 메이는 골든 오크스를 전담으로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같으면서도 다른 인종, 다른 세대의 네 여성들의 시선으로 번갈아가며 소설이 전개됐다.
처음엔 호스트가 되기에 앞서 제인과 레이건의 성격을 먼저 알 수 있게 했다.
제인은 자신감이 없고 걱정이 많은 사람인데 반해 생각이 좀 짧은 경향이 있다고 느껴졌다. 아테가 일하던 입주 보모 일을 대신하는 동안 해고되기 전에 보였던 행동은 확실히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그런데 들키지 않았기 때문인지 제인은 계속해서 그 행동을 멈추지 않았고, 급기야는 아기 엄마라면 기겁을 할 행동을 하고야 말았다. 내가 그 상황을 읽으면서도 놀랄 정도였으니 아기 엄마인 당사자는 화가 솟구쳤을 것이다. 이건 도무지 편을 들어줄 수가 없는 문제였다. 그래서 제인은 초반부터 예측할 수 없는 돌발행동을 보일 수 있는 캐릭터라 불안하기만 했다.
레이건은 제인과 여러모로 상당히 달랐다. 그녀의 집은 부유했고 대학도 나왔으며 서구형 미인이었다. 성격도 다정하면서 시원시원한 걸로 봐서 호감이 가는 요소가 다분했다. 그러나 레이건은 인생 그 무엇에도 의미를 두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진 찍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학비를 손 벌리기가 싫었을 만큼 아버지와의 관계가 썩 좋지 않았다. 물질적인 것에 가치를 두기보다는 좀 더 의미 있는 일에 뜻을 두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서로 다른 두 호스트가 골든 오크스에 들어가 룸메이트가 되면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처하는 과정을 통해 친구가 되었다가 조금 거리가 생기기도 하는 등의 관계 변화가 있었다. 한 의뢰인의 세 번째 아기를 갖게 된 트러블메이커 리사와 어울리면서 더욱 그들의 관계를 예측하기 어려웠다.
젊은 그녀들과는 다르게 아테는 지난 세대의 여성이었다. 남편이 떠나고도 사 남매를 홀로 키웠을 만큼 강한 어머니상이었다. 그 때문에 아테는 돈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였고, 소설이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밝혀진 비밀로 인해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메이는 미국에서 성공한 아시아계 30대 여성이었는데, 골든 오크스의 총책임자라 신뢰할 수가 없었다. 소설 속 약자 입장인 제인과 레이건의 대척점에 있는 캐릭터라 본능적으로 거리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소설이 흐를수록 아테보다 더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라 마지막까지 쉽게 판단 내리지 못했다.
이렇게 골든 오크스와 대리모를 중심으로 진행되며 여러 사건이 일어났다. 철저한 감시로 외부와 연락할 수밖에 없는 내부 상황으로 인해 제인은 아말리아 걱정이 극에 달하기도 했고, 번번이 말썽을 일으키는 리사 때문에 곤란해지기도 했다. 레이건은 동기부여가 될만한 정보를 얻었지만 나중엔 무엇이 진실인지, 급기야는 뱃속에 아기가 존재하는지조차 믿을 수 없어 혼란스러워하기도 했다. 이런 여러 사건들이 일어나는 걸 보며 호스트가 된 그녀들에게 연민을 느끼게 됐다. 그녀들은 아기를 낳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무조건적으로 제인과 레이건의 편이 되어 소설을 읽느라 자연스레 메이, 아테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후반에 메이와 아테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며 그 누구도 악역이 아니었다는 걸 보여줬다. 그녀들은 각자의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 각자에게 우선순위로 두는 게 서로 다르듯 제인, 레이건, 아테, 메이 모두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그 무언가를 위해 행동했을 뿐 악의는 없었다. 그래서 결말에 이를수록 색다른 느낌을 받았다.
대리모는 비단 소설 속에만 등장하는 설정이 아니다. 과거 우리 조상들 중에는 씨받이를 통해 대를 이었던 적이 있고, 작가가 소설을 구상한 계기는 인도의 대리모 관련 소식을 알게 된 이후라고 했으니 현재에도 어느 나라에서는 드물게 일어나는 일일 것이다.
권장하는 일이 아니라 비밀스럽고 때로는 수치심을 동반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소설을 읽으며 내가 원하던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끝나지 않아 다소 의외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말이라 다 읽고도 조금 찝찝한 감정이 남았다. 내가 바라던 결말은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는 것이긴 하지만 이 결말이 최선이었는지 의문이 든다. 각성보다는 동화를 택한 것이 못내 아쉽다.
대부분의 의뢰인은 자신들이 선택하는 호스트가 곧 태어날 아기를 품을 보관소인 동시에 몸속에 착상될 존재에 거는 그들의 높은 기대의 표상이라 여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예뻐 보이는, 혹은 ‘말솜씨가 좋거나‘ ‘친절하거나‘ ‘현명하거나‘ 심지어 교육까지 잘 받은 듯 보이는 호스트에게 끌리고, 기꺼이 프리미엄을 지불한다. - P80
"넌 어떤 낯선 부자가 널 이용하게 내버려 두고 있는 거야. 삶의 근원적인 무언가에 가격표를 붙이고 있는 거라고."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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