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도덕적 혼란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20년 10월
평점 :
차례 및 간략한 내용
요리와 접대의 기술 내가 열한 살이었을 때 엄마는 동생을 임신 중이었고, 덕분에 나는 엄마에게 재주가 없는 아기 용품 뜨개질에 매달려야만 했다. 여동생이 무사히 태어난 뒤, 아기를 돌보는 몫은 내 차지가 되었다. 나는 엄마가 왜 이런 인생을 살게 됐는지, 자신의 아기를 왜 나에게 맡기는지 이해할 수 없다.
머리 없는 기수 나는 제일 좋아하는 날인 할로윈에 쓸 변장 도구를 직접 만들었다. 분명 책에서 배운 것인데 사람들은 무엇을 만든 건지 단번에 알아채지 못한다. 할로윈이 지나고 변장 도구들은 어딘가에 처박혔는데, 예민한 여동생은 불안해하며 그것을 가지고 놀았다.
나의 전 공작 부인 고등학교 시절, 나는 졸업 시험을 위해 꼭 깨우쳐야 하는 영문학을 남자친구 빌에게 가르쳐준다. 빌은 정확한 정답이 있는 수학 같은 과목은 잘했지만 문장에 담긴 의미를 파헤쳐야 하는 문학류를 어려워했다. "나의 전 공작 부인"을 공부하던 중 빌과 말다툼을 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다른 곳 직장을 옮겨 어느 부부의 집을 빌려 살게 된 나는 지인들을 초대해 집에서 파티를 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지인이 부탁한 오언이라는 남자가 찾아와 멍하니 앉아있다 가는 나날이 이어졌다. 오언이 어릴 때의 경험을 말했던 날 이후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모노폴리 넬은 결혼 생활이 진작에 파탄 났지만 아이들 때문에 헤어지지 못하는 티그와 함께 시골 농장을 빌려 함께 살게 된다. 티그의 아내 오나는 넬과 아는 사이였는데, 아마도 오나는 넬을 티그와 일부러 맺어준 것 같다.
도덕적 혼란 티그와 함께 농장에 살면서 가축을 치는 넬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여주려 하지 않았지만, 티그의 아이들은 그녀와는 달라서 동물들을 이름으로 불렀다. 넬은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의 위치와 문제가 있는 가축들을 도살해 먹는 것에 대한 혼란을 느낀다.
흰 말 넬의 동생 리지가 어느 날부턴가 정신분열증으로 약을 처방받아 먹고 있었다. 분명 약을 먹는데도 리지의 증세가 더 나빠지는 것만 같아서 넬은 의사에게 전화를 걸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리고 마침 넬은 그토록 원하던 임신을 하게 된다.
혼령들 티그의 전부인 오나는 넬과 티그가 새로 이사를 했다는 것에 대해 부러워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오나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지인들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 넬은 뻔히 알고 있었지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녀가 살 집을 구해 임대해 준다.
래브라도의 대실패 어머니는 뇌졸중을 앓았다가 거의 회복된 아버지에게 책을 읽어준다. 탐험가들에 대한 내용의 책이었다.
실험실의 소년들 아흔 살이 훌쩍 넘은 어머니를 찾아간 나는 오래전에 찍은 사진들을 들여다본다. 어머니가 젊었을 적 사진들, 할아버지의 사진도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찍었다고 짐작되는 실험실의 두 소년 사진도 본다.
1인칭과 3인칭 시점을 오가고, 주인공의 이름이 등장할 때도, 등장하지 않을 때도 있는 각기 다른 단편 소설은 넬이라는 한 여성의 일생을 이야기하는 연작 소설이었다. 아마도 노년에 접어들었을 나이에 남편 티그와 아침을 맞이하는 첫 이야기에서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으나 어린 시절과 10대를 거치는 동안 여동생과 관련된 언급이 스쳐 지나가면서 동일 인물의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넬이 살아가는 동안 겪은 여러 사건을 단편적으로 끊어서 보여주던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단번에 깨닫기엔 조금 어려웠다. 매 이야기의 시작은 그야말로 도입이라 때로 조금 관련 없는 사람이나 사건으로 시작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인물일까 싶어서 그 인물, 사건에 집중하며 읽었었는데 본격적인 이야기에서는 관련이 없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중엔 상관없는 내용으로 전개됐다 하더라도 여성의 이야기, 굳이 여성이 아니어도 인생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주인공이자 때로는 화자 역할을 하던 넬은 11살 차이가 나는 여동생이 태어나기 전부터 자신이 원하는 것만 하며 살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노산이었던 엄마 대신 집안일을 하고 아기 용품을 뜨개질 하던 어린 소녀는 분명 밖에 나가 친구들과 노는 게 훨씬 좋았을 터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엄마 대신 일을 하기 위해 집에 묶여있어야만 했고, 여동생이 태어난 뒤에도 그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넬은 부모의 돌봄이 필요한 나이였는데도 더 어린 동생을 돌보기 위해 부모 대신이 되어야 했다. 엄마도 그 상황을 바랐던 건 아니었겠지만 어른이 책임져야 했던 무게를 열한 살 넬이 때로 짊어져야 했다는 게 부당했다. 자신의 입장이 제일 중요했던 열한 살 넬이 엄마에게 대들고야 만 사건 이후 그녀의 삶은 조금 달라질 것 같았지만, 그녀 역시 엄마와 비슷하게 살게 되면서 현재 자신의 삶에 의문을 가지게 됐다는 게 안타까웠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이야기는 표제작인 <도덕적 혼란>이었다. 부부관계는 오래전에 파탄 났지만 법적으로 결혼을 유지하고 있는 티그와 농장에서 함께 살게 되면서 주말에 그의 아이들과 보내는 삶은 타성에 젖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넬은 떳떳하게 말하지 못하는 자신의 현재에 대해 부끄럽게 인식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신의 현재 상황과 동일시한다는 느낌이 들었던 건 키우던 가축에 대한 부분이었다. 갓 태어났을 때 어미에게 버림받은 새끼 양을 죽지 않게 돌보며 정을 줬던 그 동물은 어느 정도 자랐을 땐 마치 강아지처럼 넬을 좋아하고 따랐다. 그런데 넬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폭력적인 성향을 보여 도살할 수밖에 없었다. 넬은 태어났을 때부터 젖을 먹여 키운 동물을 죽여야만 한다는 사실에 너무나 슬퍼하며 정말 많이 울었는데, 얼마 후에 도축장에서 보내온 그 양을 요리해 먹으면서 슬프지만 맛이 있었다는 부분이 충격적이면서도 어쩔 수 없는 모순이라 느껴졌다. 비슷하다고 말할 수 없는 그 상황이 도덕적인 면에서 넬의 현재와 비슷했다.
그리고 그건 넬이 꿈꾸던 어른의 삶과는 달랐다는 점에서 인생은 어떤 힘으로,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는 건지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예민했던 리지가 정신분열증을 앓게 된 것이나 넬이 집을 구할 때 도움을 준 부동산 중개인 릴리, 어릴 때 겪은 사건 이후 현재에 이르게 된 오언까지 모두의 인생은 원하는 방향과는 다르게 흐르는 것이라 느껴졌다. 넬의 어머니마저도 말이다.
원하는 삶과는 다르게 흐르지만 그래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게 인생이었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을 모두 재미있게 읽은 편인데, 이 소설만큼은 재미있었다고 말하기엔 어렵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책 중에서 유일하게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읽는 와중에도 그만 읽을까라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었는데 어쩌다 보니 끝까지 읽게 됐지만 그리 인상적이진 않았다.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도 조금 의아하고, 단편 같은 연작 소설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 취향과는 맞지 않았다. 작가의 장편이 나에게 잘 맞는 듯하다.
나는 어머니가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자기 자신을 이렇게 무기력하고 부푼 모습으로 만들어 버렸는지, 그럼으로써 왜 미래를, 나의 미래를, 그늘지고 불확실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는지. 나는 어머니가 일부러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 자신도 뜻밖에 당한 일일 수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요리와 접대의 기술> - P37
할로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명절이었다. 그날을 왜 그렇게 좋아했던가? 아마도 나 자신으로부터, 혹은 나 자신인 척하는 것으로부터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 자신인 척하는 것은 점점 더 편리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남들 앞에서 그러기가 점점 더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머리 없는 기수> - P52
그들은 내가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넬이 말했다. 나는 뭐가 되어야 하는 거죠? <모노폴리> - P19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