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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평점 :
1974년 2월 20일 수요일 "여성 카니발" 전날 밤, 스물일곱 살의 카타리나 블룸이 가까운 사람의 집에서 열리는 댄스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나흘 뒤 카타리나는 발터 뫼딩 경사의 집을 방문해 자신이 베르너 퇴트게스 기자를 총으로 살해했다면서 아파트에 가면 확인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살인을 저지른 일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며 체포해달라고 부탁했다.
카타리나는 어릴 때 불행한 가정에서 자랐고 젊은 나이에 이혼했지만,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채워가고 있던 사람이었다. 가정관리사로 일하며 착실하게 돈을 모았고, 그녀의 고용인인 변호사 블로르나 부부의 도움을 받아 아파트도 장만할 수 있었다.
그 누구보다 성실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던 카타리나가 기자를 죽이게 된 것은 루트비히 괴텐이라는 남자를 댄스파티에서 만나면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수배 중인 강도였는데 살인과 그 밖의 다른 범죄 혐의 또한 받고 있었다. 카타리나가 댄스파티에서 만난 그와 사랑에 빠져 아파트에 데리고 왔다가 도주할 수 있도록 도왔다는 게 문제가 됐다.
어떻게 보면 단순하다고 할 수 있는 사건이 살인 사건으로 커지게 된 것은 취재를 하려고 온갖 수를 쓰는 기자들에게 있었다. 수요일에 열린 댄스파티 이후 목요일 아침에 카타리나의 아파트를 급습한 경찰은 그녀를 경찰서로 연행하는데, 그 모습을 《차이퉁》 일간지 소속의 아돌프 쇠너 기자가 사진으로 찍었다. 쇠너 기자는 도시 서쪽 숲에서 총에 맞아 죽어있는 걸 발견했지만 카타리나에게 혐의점은 없었다.
그 기자 말고 카타리나가 죽였다고 자백한 《차이퉁》 지의 베르너 퇴트게스는 그야말로 기레기의 표본이라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암 수술 후에 병원에 입원해 안정을 취해야 하는 카타리나의 어머니 블룸 부인에게 변장하여 접근해서는 그녀가 한 말을 다른 뉘앙스로 바꿔 기사를 내보냈고, 딸에 대한 과장된 말을 늘어놓아 충격을 주는 바람에 사망에 이르게 했다.
이 정도면 죽여도 마땅한 인간이었다고 생각한다. 퇴트게스는 스스로를 저널리스트라고 생각하며 시민들에게 정보를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취재를 했겠지만, 객관적인 정보만을 전달하는 게 아닌 주관적, 선정적, 자극적인 글을 실었을 때부터 그는 기자가 아닌 동네 수다쟁이와 다름없었다. 누군가의 뒷담화를 하며 말을 옮기는 수다쟁이보다 더 나쁜 이유는 그가 기자라는 명함을 앞세워 많은 사람들에게 거짓된 정보를 진짜인 양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타리나의 명예를 더럽힌 데에는 기자가 아주 큰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그 이전에 그녀를 심문한 형사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카타리나가 진술을 끝내고 내용을 확인할 때 그녀가 한 말과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단어로 바꾸어 기재했는데, 수정할 것을 요구하니 응하지 않으며 도리어 그녀가 시간을 잡아먹고 있다고 했다. 거기다 증인으로 불려온 사람들의 말을 오인해 자기들끼리 이미 답을 정해두고 카타리나에게 그 말을 이끌어내려고 했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범죄자를 도왔다는 게 시민들의 흥미를 이끌 요인이라 형사들은 물론 기자들도 그녀의 현재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까지 파먹으려고 했다. 그녀가 괴텐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모르고 일단 도주를 도운 건 잘못된 일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까발려질 이유는 없었다. 사람들은 신문에 보도가 된 것을 진실이라고 믿으며 그녀를 갖은 더러운 말로 모욕을 하고, 심지어는 집에 음탕한 내용의 편지를 보내고 전화로 저속한 말로 희롱하며 그녀를 깎아내렸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는 블로르나가 변호를 맡자 주변 사람들은 그를 외면했고, 카타리나와 가까운 다른 사람들도 피해를 봤다.
옛날에는 신문을 많이 팔기 위해, 요즘에는 클릭수를 늘리기 위해 눈길을 확 끌어당기는 헤드라인을 이용하며 진실만을 보도하는 게 아닌 추측이 난무하는, 일명 씹기 좋은 내용을 기사라고 쓰고 있다.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은 그것을 진실이라고 철석같이 믿으며 비난해도 마땅하다는 듯 마구 깎아내린다. 펜은 칼보다 더럽게 강한 게 맞긴 했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의 제목이 확 와닿는다.
읽으면서 느낀 건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소설의 배경이 거의 50년 전인 1974년의 독일인데 21세기의 대한민국 기자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안 그런 기자도 있겠지만 어디에나 기레기라 불리는 자들은 꾸준히 존재했었나 보다.
제발 기자들이 기사를 쓸 때 직업적 윤리의식을 좀 가졌으면, 그리고 자신으로 인해 한 사람의 인생이 완전히 망가질 수 있다는 걸 인식했으면 좋겠다. 기레기가 아닌 저널리스트로 불리고 싶다면 말이다.
그는 다음 면을 읽고, 《차이퉁》 지가 카타리나는 영리하고 이성적이라는 자신의 표현에서 "얼음처럼 차고 계산적이다"라는 말을 만들어 냈고, 범죄성에 대한 일반적인 입장을 표명한 말에서는 그녀가 "전적으로 범죄를 일으킬 수 있다"라는 말을 만들어 냈음을 알게 되었다. - P38
블룸 부인의 진술을 다소 바꾼 것에 대해 그는 기자로서 ‘단순한 사람들의 표현을 도우려는‘ 생각에서 그랬고, 자신은 그런 데 익숙하다고 해명했다. - P107
카타리나는, 다정함은 양쪽에서 원하는 것이고 치근거림은 일방적인 행위인데 항상 후자의 경우였노라고 주장했다. 심문에 참여한 신사들이, 그런 것은 모두 그리 중요하지 않으며 심문이 보통보다 더 오래 걸리면 그건 그녀 탓이라고 말하자, 그녀는 치근거림 대신 다정함이라고 쓰여 있는 조서에는 절대 서명할 수 없다고 했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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