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창문 - 2019 제13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편혜영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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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 × 호텔 창문 19년 전, 사촌 형과 형의 친구들 사이에 끼어 놀러 간 운오는 강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바위를 디딘 덕분에 사람들에게 구출됐다. 정신을 잃었던 운오가 깨어났을 때, 자기가 디딘 건 바위가 아니라 사촌 형이었고, 그 일로 형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때부터 큰어머니는 매년 형의 제사 때가 되면 운오가 받을 때까지 연락을 하고 그가 참석하기 전까지는 제사를 시작하지 않았으며, 일 때문에 바빠 늦게 끝나면 회사 앞까지 찾아오기도 했다. 그런데 사실 사촌 형은 누군가의 돈을 빼앗고 학교에서 퇴학될 뻔하기도 한 개차반이었는데, 죽고 나서야 의로운 사람으로 입에 오르내린다.

 

김금희 × 기괴의 탄생 윤령은 존경하는 선생님이 무용과 대학원생과 바람이 나 이혼을 하고 집을 나와 사신다는 게 영 실망스럽다. 같은 학교의 연극원 교수인 선생님의 배우자와의 모습이 너무 좋아 보였던 탓인지도 모른다. 윤령은 미국에서 살다가 마흔 살이 넘어 회사 신입사원으로 들어온 리애 씨에게 선생님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김사과 × 예술가와 그의 보헤미안 친구 수영은 대학에서 한비를 처음 만났다. 다른 학생들과 딱히 어울리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혼자는 아니었던 한비와 우연히 하루를 보내게 되면서 수영은 자신이 국문과를 온 이유를 깨닫게 된다. 시인이 되겠다는 결심으로 책을 읽고 시를 쓴 수영은 신인 시인상에 당선되기도 한다. 국문학과의 천재가 나타났다는 유명세도 잠시, 수영의 재능은 아무래도 한비의 곁에 있을 때 잠깐 스쳐간 듯하다.

 

김혜진 × 자정 무렵 "나"는 함께 사는 파트너의 고등학교 동창 유리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파트너와 함께 유리의 사무실 오픈 파티에 가게 됐는데, 마을을 발전시킬 이런저런 목적으로 설립된 컨테이너 사무실에는 마을 사람들 몇 명도 참석했다. 음식을 먹고 가볍게 술을 마시는 자리가 무르익자, 사람들 사이에서는 선을 넘을 듯 말 듯 하는 오지랖이 이어진다.

이주란 × 한 사람을 위한 마음 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지영은 조카 송이를 키우며 엄마와 살고 있다. 집에서 먼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걸어서 갈 수 있는 서점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월급은 줄었지만, 마음은 훨씬 편하다. 선배의 부모님이 30년 넘게 운영하신 서점이 좋고, 근처 파스타집의 준호 씨는 종종 책을 사러 와서 지영에게 살갑게 대한다.

 

조남주 × 여자아이는 자라서 주하 엄마는 현성 엄마에게서 아이들 학교에서 열릴 학폭위 이야기를 꺼낸다. 은비라는 아이의 다리를 현성이와 다른 남자애가 사진으로 찍었다는 건데, 그 모든 모습을 주하가 동영상으로 촬영하고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현성 엄마는 억울한 자신의 아들을 위해 주하가 증인으로 나서줬으면 한다는 목적을 말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당황스러운 주하 엄마는 일단 딸에게 물어본다며 자리를 피한다.

최은미 × 보내는 이 아파트 꼭대기 층 앞동, 뒷동에 살며 동갑내기 외동딸을 키우고, 심지어는 아이들의 이름도 "윤"자로 끝나서 진아 씨와 가까워졌다. 111년 만의 폭염이 있던 여름, 진아 씨의 집에서 아이들끼리 놀게 하고 "나"는 진아 씨와 맥주를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우연히 맘카페에서 진아 씨가 올린 것 같은 글을 발견한다. 나에게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던 일들이었다.

 

 

 

문학상 수상 작품집이라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주제가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각 단편마다 서로 다른 주제와 의미, 그리고 사뭇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야기의 분위기가 가장 좋았던 작품은 이주란 작가의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이었다. 언니를 잃고 그 딸을 대신 키우며 살아가는 지영의 삶은 많이 외로워 보였다. 연인이었던 사람과 헤어지고 혼자 지내는데, 얼마 전 결혼한 친구 P는 지영에게 결혼을 하라는 말을 했다. 가까웠다고 생각했을 P의 말에서 왠지 모를 거리감이 느껴졌다. 나도 했으니 너도 되는 대로 아무나 만나서 해, 라는 뉘앙스를 느꼈다면 내가 과하게 생각한 건가.

아마 지영은 언니를 잃은 뒤,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심리적 거리감을 어느 정도 벌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조카 송이와 엄마 외에는 들어오지 못하게, P도 들어오지 못하게 말이다. 하지만 어느새 지영의 마음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딱히 무언가를 한 건 아니지만 송이가 지영의 곁에 있었기 때문에 조심스레 다가오는 타인에게 마음을 열었던 것 같다.

읽다가 몇 번 피식거리며 웃게 만든 재미있는 부분도 있고, 눈물이 날뻔한 장면도 있어서 좋았다.

 

수상작인 <호텔 창문>은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망나니 사촌 형을 바위인 줄 알고 디뎌 살아난 운오의 죄는 살았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쁜 짓을 일삼던 사촌 형은 죽고 나서야 용감하고 정의로운 자가 됐는데, 그따위 포장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죽음이라는 건 때로 사람을 완전히 반대되는 존재로 만들기도 하는 것 같다. 정말 흉악한 범죄자가 아닌 이상 망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죽은 사람을 나쁘게 말하지 않는다. 설령 그 사람이 불효자에 양아치였어도 말이다. 다른 소설을 읽을 때 공감됐던 부분이 <호텔 창문>을 읽을 때에도 등장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게 뭐라 말하기 참 어려운 얘기다.

 

인상적으로 읽은 <딸에 대하여>를 쓴 김혜진 작가의 <자정 무렵>은 이전에 읽은 소설과 비슷한 설정이 있었지만, 결말이나 느낌은 확연히 달랐다. 함께 사는 두 여자와 거의 부부나 마찬가지인 유리 커플을 안주 삼아 조언이라고 늘어놓는 낯선 이들의 오지랖이 굉장히 열받게 만들었다. 여자끼리 사는 게 뭐 어때서, 능력 좋은데 결혼을 안 할 수도 있지, 커플이 결혼을 하든지 말든지. 나이가 많다고, 사회를 더 많이 겪어본 어른이랍시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늘어놓고 왜 상관을 하는지 당최 모르겠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걱정한다는 말로 포장하면서 실은 그들이 자신보다 나쁜 상황이라는 걸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만 같다.

이런 상황에도 어김없이 차별에 관한 여러 시선이 등장했다. 더욱 화가 나는 건 "나"의 파트너도 거기에 휩쓸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살던 파트너조차 낯설게 느껴지는 상황에서 오는 모욕감, 그것을 당차게 끊어내는 "나"의 결단이 속 시원해서 좋았다.

 

각기 다른 짧은 이야기들 속에서 공통된 점은 타인에 대한 놀랍도록 싸늘한 시선이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물론 친구, 제자, 동료라는 이름의 사람들조차 걱정하는 척 물어뜯는 모습이 옹졸했다. 씁쓸하고 배신감이 느껴지기도 했던 시선과 말이 상처가 됐다. 그래서인지 유독 따뜻하게 끝났던 이주란 작가의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이 기억에 남는다.

너도 얼른 누구 만나서 결혼해.
P가 말했다.
누구?
내가 되묻자,
그야 나는 모르지.
P가 말했다.
그게 아니고 결혼을 그냥 누구랑 해도 되는 거야? 이주란 <한 사람을 위한 마음> - P142

사람들은 우리 곁에 나란히 서 있다가, 한꺼번에 갑자기 몇 계단 위로 뛰어 올라가서 우두커니 우리를 내려다보고 또 갑자기 우르르 몇 계단 아래로 내려선 다음 멍하니 우리를 올려다본다. 그 바람에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그들보다 아래였다가, 위였다가, 오르락내리락한다. 이러나저러나 우리와 나란히 서 있는 건 해본 적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고, 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 같다. 김혜진 <자정 무렵>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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