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지나가다
조해진 지음 / 문예중앙 / 201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1년 전, 일주일 앞둔 종우와의 결혼이 무산된 민은 충동적으로 공인중개사 보조원 일을 시작한다. 그때부터 그녀는 누군가가 내놓았던 집, 혹은 계약된 집에 아무도 없을 때 들어가 30분 동안 집주인의 인생을 산다고 상상하며 머무는 취미가 생겼다.

장사가 되지 않아 문을 닫아두고 보증금만 까먹고 있는 가구점에 드나든 것도 그런 습관 중에 하나였다. 목수가 직접 만드는 가구가 진열된 그곳에서 민은 가져다 둔 생수병과 전기 주전자로 인스턴트 커피를 타 마시고, 침대에 누워 자신의 인생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한다.

 

가구점이 망해 신용불량자가 된 아버지 때문에 수는 사는 게 버겁다. 독촉 전화가 올까 봐 핸드폰을 꺼두고 살아가는 수는 우연히 주운 지갑 속 신분증 주인인 박선호 행세를 하며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군대에 가기 전까지만 들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말도 많이 하지 않으며 혼자 일만 하다 보니 어느새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쇼핑센터 옥상에 있는 놀이공원 보조 스태프로 약간 높은 시급을 받고 일할 수 있게 됐다. 그곳에서 수는 놀이공원 담당 직원 연주와 둘이 일하게 된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기 싫을 때 종종 머무는 아버지의 가구점에서 자신 말고 다른 누군가가 드나드는 흔적을 발견한다.

 

친밀한 관계가 없는, 심지어 가족과도 가까이 지내지 않는 사람들의 외로운 삶이 소설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민은 이혼 후 각각 재혼한 부모로부터 떨어져 나와 새로 가족이 될 종우와도 끝이 나는 바람에 홀로 살아가고 있었다. 수는 가계가 어려운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만 죽이고 있는 아버지가 보기 싫어서 밖으로만 돌았다. 수와 함께 일하는 연주 역시 유일한 가족인 것 같던 어머니를 여의고 서울에서 혼자 살고 있었고, 민이 습관처럼 몰래 들어갔다 마주친 집에 홀로 살던 은희 할머니나 같은 건물의 동욱 역시 그랬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버거운 현실이 너무 참담하다는 게 현실적이라 안타까웠다. 민이 예비신랑과 헤어지게 된 일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사건은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이었다. 수가 남의 이름으로 살게 된 것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한 현실 도피나 마찬가지였다. 많은 걸 바라지 않는 연주가 그 이상의 경계를 넘어갈 수 없다는 것도 너무나 높은 현실의 벽이었다.

 

가족을 비롯해 그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이어가지 못했던 사람들의 삶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답답했지만, 낯선 서로에게 조금은 위안을 받는지도 몰랐다. 얼마의 시간이 흘러 가구점에서 결국 마주치게 된 민과 수는 묘한 만남인데도 서로에게 날을 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민은 수를 보살피며 끼니를 챙겨줬고, 수는 낯선 민에게 자신의 일을 털어놓으며 부탁을 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연주는 함께 일하게 된 말 없는 수를 좋게 봤고, 그가 한순간의 충동으로 나쁜 짓을 했을 때도 탓하지 않았다. 외로운 사람들이라 본능적으로 서로의 외로움을 느꼈다.

삶의 어느 부분에 결핍을 가졌다는 것은 슬프게도 같은 삶을 살아온 사람을 알아보는 기민함이기도 했다. 그런 기민함에 나도 공감이 되는 게 왠지 서글펐다. 낯선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과정에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 사람이 나와 같은 환경에서 자랐고, 살았을 거라고 느낄 수 있는데, 눈치챈 사실을 모른 척하는 나를 상대방도 똑같이 모른 척하고 있을 거라고 예상하는 데서 오는 동질감이었다. 서로의 외로움을 느끼는 소설 속 사람들처럼 말이다.

 

비가 내리고 태풍이 몰아치는 그들의 여름은 날씨만큼이나 힘겨운 계절이었다.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같은 삶의 조각을 가진 낯선 이들과의 스친 인연 덕분에 그들을 이해하고 위로하면서 자신의 삶도 돌아보게 되는, 오랫동안 기억할 여름이었다.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건조했는데 그들이 서로를 만난 이후에는 조금 따뜻해져서 좋았다. 깊은 관계가 아니라서 금세 끝나버린 인연이었지만, 그들이 어딘가에 있을 서로를 기억해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슨 꿈을 꾸었니? 현실이 좀 덜 끔찍한 거, 맞니? - P148

비가 새서 눅눅하게 젖어갈 수밖에 없는 건 낡은 천장만이 아니다. 삶에도 누수의 흔적은 남기 마련이고, 그 흔적은 좀처럼 복원되지 않는다. - P133

발을 헛딛는 것쯤은 이제 두렵지 않았다. 두려운 건 오직 하나,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오늘뿐이었다. 단절이나 휴지 없이 이어지는 단 하나의 생애, 그 관성이었다. - P169

아이가 어른이 되고 어른은 노인이 되는 동안 결핍은 보완되고 상처는 치유되는 것, 혹은 삶이란 둥근 테두리 안에서 부드럽게 합쳐지고 공평하게 섞이는 것이므로 아픈 것도 없고 억울할 것도 없는 것, 그런 환상이 가능할까.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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