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겨진 눈 아래에 - 브릿G 단편 프로젝트
정도경 외 지음 / 황금가지 / 2019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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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및 간략한 내용

 

정도경 × 황금 비파 호수를 건너는 배에 탄 여자는 자신이 가진 비파를 신기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연주를 들려준다. 낯선 악기 소리에 사람들은 즐거워했지만,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자 여자의 연주 탓에 호수의 신이 노했다며 그녀를 배에서 떨어뜨렸다. 물 밑 깊은 곳에 가라앉았으나 놀랍게도 죽지 않은 여자 앞에 검은 뱀들이 나타나 호수의 왕을 알현할 준비를 하라며 황금으로 된 비파를 주고 연주하라고 한다.

김인정 × 망선요(望仙謠) 후배의 부탁으로 저소득층 자녀 공부방 봉사를 다녀온 "나"는 엄마에게 그곳에서 만난 초등학생 여자아이 초희에 대해 말한다. 좁고 냄새나는 반지하 집 화장실에 있던 초희를 보며 스물일곱 살의 엄마와 일곱 살 때의 자신을 떠올린다.

 

이산화 × 아마존 몰리 어느 생명공학자가 길 가던 여자를 폭행하다 시민들에게 제압당한다. 과학 잡지 기자인 "나"는 기사를 보고 남자에게서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까 싶어 인터뷰를 요청한다. 그는 학회에서 알게 된 여자와 2년 동안 만났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녀가 임신했다는 문자를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녀를 찾다가 그가 알아낸 진실은 놀라운 것이었다.

양원영 × 폐선로의 명숙 씨 사이가 나빴던 아버지가 간암으로 돌아가신 뒤, "나"는 혼자 계실 엄마를 위해 일을 그만두고 부산 집으로 내려왔다. 어느 날 낮잠을 자던 엄마가 소리를 지르며 내 이름을 부르기에 깨웠더니 엄마는 기찻길에서 뱀이 쫓아왔다는 꿈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갑자기 서울 말씨로 나를 차갑게 쳐다보며 누구냐고 물었다. 엄마는 이내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자꾸만 기찻길 악몽을 꿨고, 곧이어 나도 그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엄마와 함께 이제는 폐선로가 된 그 기찻길에 간다.

 

유월 × 사형 집행인 비르길리아의 하루 여자 망나니 비르길리아는 사형 선고를 받고 감옥탑에 갇힌 코헨체른 백작부인을 찾아간다. 오늘이 바로 그녀의 사형 집행일이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많이 죽였어도 백작부인의 목을 베는 일은 처음이라 그런지 비르길리아는 남편을 죽인 그녀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궁금해서 물어보게 된다. 부인은 밖에서는 선하고 예의 바르고 충신에다 완벽한 인간이었지만, 집안에서는 악마였던 남편에 대해 말한다.

김이삭 × 애귀(哀鬼) 혼자 딸을 키우는 워킹맘이자 탈북한 여자의 일상을 보여주며 중국으로 도망쳤을 때의 과거를 회상한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늙은 남자의 대를 이어주기 위해 팔려갔던 중국에서의 삶과 사랑하는 딸을 보며 그곳에 남겨둔 아들이 떠오른다.

 

전혜진 × 감겨진 눈 아래에 가까운 미래. 프랑스 국적을 가진 이민자 2세 세실은 우연히 만난 한국 남자에게서 여자에 대한 괴상한 소리를 듣고 부모가 버린 모국에 대해 궁금해진다. 세실이 인턴으로 있는 앰네스티의 사무국 팀장인 에바는 4년 전에 한국에 다녀온 경험을 말해주며 가지 말라고 말렸지만, 세실은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한국으로 향한다. 세실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여권을 빼앗기고 구형 산부인과 의자에 묶여 군인에게 수치스러운 검사를 받는다. 그날 저녁, 감금된 세실에게 병무청 공무원이 나타나 그녀가 한국인이니 병역의 의무를 마치거나 2년 내에 한국 국적의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말한다.

 

 

 

일곱 명의 작가가 쓴 앤솔러지를 읽었다. 한 작가가 쓴 단편 모음집은 여러 번 읽어봤으나, 여러 작가가 쓴 단편집은 처음이었다. 차별과 억압을 받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현재를 배경으로 한 내용이 있었고, 과거의 이야기와 미래를 배경으로 한 SF도 있었다.

처음엔 그저 별생각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하나 둘 읽어갈수록 짧은 이야기 속 강렬한 주제에 확 꽂혀서 푹 빠져서 읽었다.

 

<황금 비파>와 <사형 집행인 비르길리아의 하루>는 특정한 상황에서 여자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부모도 남편도 없이 비파만 들고 떠돌아다니는 여자를 사람들은 깔보고 무시했다. 심지어는 같은 여자조차 그녀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아 왕이라 불리던 역겨운 괴물과의 일이 끝난 뒤, 번쩍이는 황금 비파를 손에 들고 뭍으로 돌아온 여자를 보는 시선들은 더욱 더러워졌다. 하지만 황금 비파의 특별한 재주가 여자를 지켜줬고, 그녀는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여자들을 거두는 해피엔딩을 맞이했다.

<사형 집행인 비르길리아의 하루>는 여자 망나니와 목이 잘리는 선고를 받은 백작부인의 사연을 보여줬다. 특별한 반전 없이 마지막까지 흘렀지만 인상적으로 남았던 건 죽음을 대하는 모습이었다. 악마 같은 남편을 죽였으나 그 어떤 변론도 하지 않고 한 번에 죽기를 바랐던 백작부인과 그녀가 오랫동안 고통을 받으며 죽기를 바랐던 백작의 남동생이 굉장히 상반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게 기억에 남는다. 진실을 알지 못했다고 해도 참으로 치졸했다.

 

그런가 하면 엄마로 사는 여자들의 삶도 보여줬다. <망선요>와 <폐선로의 명숙 씨>는 읽다가 마지막에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대화체로만 이루어진 <망선요>는 공부방 경험에서 허난설헌의 이야기로 이어졌다가 다시 공부방 아이로, 자신의 이야기로 오락가락해서 처음엔 무슨 얘기를 하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마지막엔 너무 깜짝 놀라서 그 부분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지울 수 없는 기억이 있다는 게 너무 안타까웠다.

<폐선로의 명숙 씨> 역시 후반으로 가면서 비밀이 조금씩 밝혀질 기미가 보이다 마침내 진실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뭐라 말할 수 없는 분노와 슬픔 등을 느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게 사람인가 싶은 생각이 들어 답답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오랜 세월 마음에 쌓아둔 울분이 가끔 기억날 때마다 터졌던 게 이해가 됐다. 근데 그걸 알게 된 딸의 심정도 또 이해가 돼서 너무너무 슬펐다.

 

그리고 표제작인 <감겨진 눈 아래에>는 읽는 내내 역겹고 소름이 돋았다. 소설 속에서도 언급됐듯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를 읽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비극적이고 끔찍한, 여자들만의 디스토피아라고 느껴졌다.

전체주의 사상에 물들어 여성은 아기를 낳는 도구라고만 여기는 폐쇄적인 국가가 된 미래의 가상 한국을 보여주고 있었다. 몇 년 전 이슈가 됐던 "가임기 여성 지도"에서 더 부정적으로 나아간 소설처럼 보였다. 읽는 동안 너무 말이 안 통해서 화가 났고 같은 여자들도 사상에 물들어버려 당황스러웠는데, 주인공이 과연 이곳을 벗어날 수는 있을까 정말 걱정했다. 그런데 마지막엔 또 "소 귀에 경 읽기"라 욕이 나왔지만, 그나마 사이다를 날려줘서 다행이었다.

 

무심코 읽은 책인데 다양한 장르로 여러 여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서 정말 좋았다. 편차가 조금 있긴 했지만, 이 책에 담긴 단편들 모두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인상적으로 읽었다. 전설 같기도 하고, 중세 소설 같은 이야기도 있으며 과학적인 소설과 디스토피아도 있어서 각양각색의 이야기를 즐길 수 있었다.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안 좋아하지만, 세계 어느 곳에 아직도 존재하며 기본적인 대접을 받지 못하는 여성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길 바라는 목소리가 담긴 페미니스트 소설이었다. 폭력에 방치되고 소외된 사람들을 인도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담겨있었다.

아직 이르지만 올해의 베스트 책 목록에 올리고 싶을 만큼 정말 좋았던 소설이다.

 

"엄만 어렸어. 힘들어서 어디 하소연할 데가 없었어. 어린 너한테 떠들고 울고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엄마 말, 듣고 있니? 그땐 다 그랬어. 지금처럼 애들 정서가 어쩌고 하는 걸 몰라서 다들 애 보는 데서 죽네 사네 머리채를 잡고 욕을 하고 그랬어. 엄마도……." 김인정 <망선요> - P65

엄마, 기억하지 마라. 기억 안 해도 된다. 제발 하지 마라.
당신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건, 당신이 설령 이 길 위에서 잃어버린 과거와 세월을 헤아려 나를 증오하고 죽이고 싶어 했고, 지금도 그렇다고 할지라도. 양원영 <폐선로의 명숙 씨> - P140

나는, 한 성별을 향해 저지르는 이 끔찍한 범죄에 대해, 증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떻게든 미치지 않고 살아남아서, 이 현실을 증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중략)
사람의 기억은, 때로는 그 자체로 증거가 될 수 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들이 그러했고, 일본군에게 성노예로 끌려갔던 여성들이 그러했듯이. 전혜진 <감겨진 눈 아래에> - P293

괴물을 죽인 남자는 영웅으로 대접받지만 괴물을 죽인 여자는 괴물로 취급받는다. 정도경 <황금 비파>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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