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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없는 남자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하윤숙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9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65년. 밀턴 페리스 교수의 신경심리학 실험실에 최연소 연구원으로 들어가게 된 24살의 마고 샤프는 기억상실증 환자 엘리후 후프스를 만난다. 필라델피아의 유서 깊은 가문의 후손인 엘리는 15개월 전, 섬에서 혼자 캠핑을 하다가 바이러스 뇌염에 감염됐다. 입술에 발진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일반적인 증상과는 다르게 엘리의 경우에는 바이러스 감염이 시신경을 거쳐 뇌까지 퍼졌고,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병원에 도움을 요청하게 됐다. 그래서 엘리는 새로운 정보를 70초 이상 기억하지 못하게 됐다. 영원히 서른일곱 살 현재를 살아가게 된 것이었다.
엘리는 마고가 연구실에 처음 왔을 때부터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 마거릿으로 착각한다. 마고가 아니라고 정정하며 자신이 누구인지 매번 소개를 해줬지만,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 엘리가 새로운 정보를 기억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마고는 엘리가 자신이 누군지는 잊어버렸어도 기억한다고 확신하며 70초의 기억력을 가진 엘리를 사랑하게 된다.
너무나 유명한 작가지만 단 한 권밖에 안 읽어본 조이스 캐럴 오츠의 이 책을 읽게 된 건 고요해 보이는 분위기의 책표지와는 다르게 뭔가 스릴러스러운 느낌을 풍기는 책 뒤편의 소개 글 때문이었다. 70초의 기억력을 가진 남자와 그 남자를 연구하면서 사랑하게 된 여자, 그리고 남자가 아주 어릴 때 죽은 여자 사촌에 관한 기억이 흥미를 끌었다.
실제 나이는 서른여덟 살이지만 사고를 당한 이후 기억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해 서른일곱 살로 살아가는 남자 엘리와 이제 막 스물네 살이 된 마고가 만나게 되면서 30년 넘게 이어질 그들의 관계가 시작됐다.
마고가 처음부터 엘리를 사랑한 건 당연히 아니었다. 대학원생 신분으로 연구에 참여하게 된 마고는 책임 교수인 페리스와 먼저 불륜 관계가 시작됐다. 1960년대에 남자들이 월등히 많았던 학계라는 배경과 가족에게서 일부러 떨어져 나와 먼 곳에서 생활하는 마고의 개인적인 사정이 겹치면서 그녀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인 페리스 교수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다며 그를 거부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가 자신을 총애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의 애정을 만끽했다. 자신의 운명을 쥐고 흔들 수 있는 권력자의 개인적 욕망에 희생되면서도 그것을 희생이라 생각하지 못하며 지배당한 젊은 여자의 모습이었다.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의 연구 결과나 논문 등에 참여하지도 않은 페리스 교수가 숟가락을 얹었다는 사실이 고발됐는데도 부정할 정도로 마고는 페리스를 사랑하고 맹신했다. 이런 답답한 마고의 모습은 꽤나 오랫동안 이어졌지만, 다른 젊은 여자 연구원이 들어오게 되면 변하는 게 당연한 전개였다.
그렇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페리스 교수에게 내쳐진 마고가 그에 대한 사랑에 힘들어하면서 항상 같은 자리에서 변함없는 기억력으로 신사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엘리에게 서서히 빠지게 되어 그를 통제하는 모습이 조금은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노벨상을 탈 정도로 학계의 인정을 받은 늙은 교수와 상대적으로 불리한 여자 교수라는 위치에 선 마고의 관계가 기억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 옆에 있는 사람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엘리를 통제하는 마고의 관계와 비슷해 보이기까지 했다.
처음엔 힘들어하는 마고를 위로해주는 엘리에게 호감의 감정이 싹트면서 그를 사랑하게 됐고, 이후엔 엘리에게 자신을 약혼녀라고 말했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흐른 뒤에는 아내라고까지 하면서 반지를 나눠끼고 짙은 스킨십까지 하게 된 상태에 이르자 자신이 만들어낸 그 모든 게 진짜라고 믿고 있는 듯했다.
페리스 교수와의 관계에서 경험한 가스라이팅을 마고가 엘리에게 행사하며 그녀 역시 서서히 정상의 범위를 벗어나고 있었다. 환자와 교수라는 관계에 지배력을 행사하며 현실과 만들어낸 거짓을 스스로도 혼동하는 마고를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모든 관계를 벗어나 사랑할 수는 있다고 생각했지만, 하필이면 70초 이상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의 기억을 오랫동안 조작하는 건 직업윤리에 어긋났다. 그래서인지 중반 이후를 넘어가면서 화자인 마고보다 엘리의 감정에 이입해서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엔 엘리와 마고를 보며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60대가 되었어도 자신을 여전히 37살로 알고 있는 가여운 엘리의 곁에 남은 사람은 마고뿐이었기 때문이다. 기억력에 문제가 생겼을 때부터 형제, 친구들과의 관계가 끊어져 외로운 줄도 모르고 살아온 엘리를 마고는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마고의 마음을 당연히 모르는 엘리는 처음 본 사람처럼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너무 한결같아서 마고가 조금 안타까웠다.
여자 사촌이 사망한 모습을 몇 번이고 그림으로 그릴 정도로 과거의 일은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하지만, 사고 이후로는 타인에게 의존하면서 살아가야만 하는 남자의 70초 동안 유지되는 애틋한 사랑이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엘리에게, 모든 것을 기억하는 마고에게도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사랑일지라도 서로에게 남은 사람은 둘뿐이라 가련한 사랑이기도 했다.
"그림자가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나요? 기억이 없는 건 그림자가 없는 것과 같아요." "아마도 내가 그런 사람일 거예요." - P384
엘리후 후프스의 삶에는 과거가 없고 오로지 현재만 있다. 그는 영원토록 서른일곱 살에 머물 것이다. 영원토록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혼란스러워할 것이다. - P54
엘리후 후프스의 사랑을 받으려면 그가 아프기 전에 만났어야 한다. 그날 이후 기억상실로 고통받는 이에게 사랑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 P165
본능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기억상실증 환자는 신경심리학자인 그녀를 길들여, 그녀를 향한 그의 감정에 반응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마고가 이에 반응할수록 그 역시 그녀에게 점점 더 길들어간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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