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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평점 :

차례 및 간략한 내용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18살이 된 순례자들은 시초지로 향한다. 그리고 1년 뒤, 순례자들은 귀환을 하지만 돌아오는 사람의 수는 떠날 때의 사람보다 늘 적다. 누군가는 돌아오지 않고 시초지에 머물기로 선택하는 것에 의아해하던 데이지는 금서 구역에서 이곳을 만든 설립자 릴리에 대해 알게 된다.
스펙트럼 외계 생명체 탐사를 위해 떠났던 할머니가 실종된 지 40년 만에 구조됐다. 할머니는 외계 지성체와 첫 접촉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그들에 대한 정보를 함구했기에 허언증 환자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손녀에게만은 그들에 대해 말해줬다. 짧은 생을 사는 그들은 자신을 보호해줬고 언어는 통하지 않아도 색으로 말하던 아름다운 이들이었다고 말이다.
공생 가설 류드밀라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장소를 그리며 다섯 살 때부터 자신이 그곳에서 왔다고 말했다. 처음에 사람들은 어린아이의 상상이라 여겼지만, 류드밀라가 그린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행성"이라 부르는 곳을 열렬하게 사랑하게 된다. 류드밀라가 세상을 떠난 뒤, 그녀가 남긴 기록과 똑같은 행성이 발견된다. 그리고 뇌 해석 연구소에서는 태어난 지 몇 달 안 된 아기들이 류드밀라의 행성을 우리의 행성이라 하며 그립다고 말하는 결과를 얻게 된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냉동 수면 기술을 연구하던 안나는 남편과 아들을 슬렌포니아 제3행성으로 먼저 보내고 일을 마무리한 뒤 떠나려는 날, 비용 문제 때문에 운항을 중지하기로 결정된 슬렌포니아 행 마지막 우주선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안나는 100년도 더 전에 폐쇄된 우주 정거장에 자신의 낡은 우주선을 도킹해두고 가족에게 가기 위해 그곳을 떠나지 않고 있다.
감정의 물성 어느 날부턴가 감정 자체를 조형화한 제품이 등장해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행복, 침착함, 설렘 등의 감정을 비롯해 팔릴까 의문이 드는 공포와 우울, 심지어는 분노까지 생겨나 유행처럼 번져간다.
관내분실 사후 마인드 업로딩이 보편화되어 도서관이라 불리는 곳에 죽은 자들의 영혼이 데이터로 남게 된다. 외부 자극에 반응도 하는 망자들의 재현은 가상이었지만, 누군가는 그들을 살아있는 사람처럼 대하기도 한다. 임신한 지민은 3년 전 세상을 떠난 엄마의 마인드를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도서관에 찾아가지만, 여기 어딘가에 있긴 해도 찾을 수 없다는, 관내분실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터널을 통해 우주의 저편으로 넘어갈 인류 최초 우주비행사에 발탁된 가윤은 신체 개조를 하기 전, 검진을 받다가 기록을 살펴보던 담당자로부터 전임 비행사이자 가윤이 이모라 부르던 최재경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가윤은 자신의 우주 영웅이었던 재경 이모가 탄 캡슐이 터널 진입도 하기 전에 폭발했다고 알고 있었지만, 담당자는 그녀가 발사 전날 대기 지역을 이탈해 도망쳤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화학을 전공한 작가의 SF 단편 소설집을 읽었다. 과학 소설이라 딱딱할 거라는 편견과는 달리 책표지처럼 평온하고 따뜻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대부분 사람에 대해,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외계인과 수십 년을 함께 살며 서로를 이해했던 외계인 탐사원이 있었고, 냉동 수면을 반복하며 평균 수명을 훨씬 웃돌게 사는 동안 가족을 그리워하는 사람도 존재했다. 그리고 생전엔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던 엄마를 세상이 떠난 뒤에야 저장된 데이터로나마 찾으려고 하는 딸이 있었다.
우주에 사람을 보내고, 외계인을 만나고, 감정을 담은 제품을 구입할 수 있는 시대에도 사람 사이 혹은 사람과 외계인 사이의 감정 교류는 지금과 같았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했어도 인간다움을 보여주는 감정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남아있었다.
이런 긍정적인 면과는 다르게 어떤 단편은 인류의 나쁜 점 또한 보여주고 있었다. 배아를 개조해 완벽한 신인류를 만들어내지만, 개조되지 않아 흉터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리고 적법한 선발 과정을 거쳐 우주에 갈 비행사를 뽑았음에도 비혼에 출산 경험이 있는, 나이 많은 동양 여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아직 오지 않은 낯선 미래, 어쩌면 가까울 수도 있고 막연히 멀기만 할지도 모를 미래를 배경으로 익숙한 감정,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인류가 멸망하지 않고 존재하는 한 계속될 감정들이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지성을 지닌 외계인들과도 그런 감정을 나눌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으로 본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컨택트>가 떠오르던 단편도 있었다.
SF 소설은 대체로 국외 남성 작가들의 책만 읽어봤는데, 젊은 여성 작가의 책은 그들의 것과는 결이 조금 다른 섬세함이 느껴졌다. 읽으면서 왠지 그리움을 많이 느꼈던 것 같다. 사람이나 외계인에 대한, 자신이 왔던 곳에 대한, 어느 시절에 대한 그리움으로 따뜻함을 준 소설이었다.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조차 아니야.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P181
그녀도 아이를 가져서 두려웠을까. 그렇지만 사랑하겠다고 결심했을까. 그렇게 지민 엄마라는 이름을 얻은 엄마. 원래의 이름을 잃어버린 엄마. 세계 속에서 분실된 엄마. 그러나 한때는, 누구보다도 선명하고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이 세계에 존재했을 김은하 씨. <관내분실>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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