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는 곳으로 오늘의 젊은 작가 16
최진영 지음 / 민음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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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나라에서 기괴한 바이러스가 퍼졌다. 백신을 만들면 진화한 바이러스가 창궐하길 반복했다. 감염 경로조차 알 수 없어서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뉴스에서 그렇게 떠들어댔어도 사람들은 먼 나라의 이야기라며 괜찮아질 거라 믿었다.

 

류는 11살 된 자신의 아이, 해림이가 갑자기 죽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학교에서 병원으로 이송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사망했다. 류는 어린 자식을 앞세운 절망에 남편 단, 해림보다 어린 해민과 함께 한국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엄마와 아빠가 차례로 돌아가신 뒤, 도리에게 남은 사람은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여동생 미소뿐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도리에게 미소를 부탁했기 때문에 그녀는 반드시 살아남아 동생을 지켜야 했다. 도리는 동생을 데리고 터무니없이 비싼 배 티켓을 훔쳐 칭다오로 달아났다가 울란우데로 향한다.

바이러스가 퍼질 때쯤 지나의 아빠는 사업을 몽땅 정리하고 탑차 두 대에 생필품을 가득 채워 가족, 친척들과 러시아로 향했다. 그들 중 유일하게 피가 섞이지 않은 건지는 지나가 함께 가야 한다고 우겼기 때문에 데리고 갈 수밖에 없던 아이였다. 어느 날 밤, 머무르기로 한 마을에서 지나는 도리와 미소를 만난다.

 

 

 

종종 여러 책, 영화를 통해 접했던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삼고 있었다. 원인을 몰라 피할 수조차 없는 바이러스로 사람들은 당연히 사람다움을 잃어버렸다. 강도나 방화 정도는 약과였고, 인신매매나 살인을 서슴지 않았다. 더 심한 것은 어린아이의 간을 먹으면 살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유언비어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 좁아터진 한국 땅을 떠나 대륙으로 향한 사람들은 러시아에서 서로를 만나게 된다. 류는 기도소에서 만난 같은 한국인 도리에게 잠깐 동안 해민을 맡겼었고, 도리와 미소 자매를 발견한 지나는 아빠에게 그들을 데리고 가 달라고 부탁했다. 한국에서 이웃에 살았던 건지를 데려가자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말이 안 통하고 글조차 읽을 수 없는 러시아에서 만난 한국 사람이기에 서로를 보듬어주며 사람답게 대해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이런 상황일 때야말로 사람들의 본성은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같은 나라 사람이라도 피가 섞인 가족이 아니면 낯선 사람일 뿐이었고, 언제든지 뒤통수를 치고 도망갈 사람이라 여겼다.

무장 단체가 지나 일가 무리를 습격해 친척들 중 한 남자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이때다 싶어 도리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폭행했다. 걱정하는 지나가 도리 자매의 곁에 다가가지도 못하게 했다. 여기까지만 했더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이 끔찍한 상황에 더러운 성욕은 남아있었다. 여태까지 자신이 받아냈던 시선의 의미를 도리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쩜 그렇게 짐승만도 못하게 구는 인간들이 있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더 어이가 없던 반응은 함께 지내게 해줬으니 한 번 줄 수도 있지 않았느냐는 말이었다. 너무 끔찍하고 역겨웠다. 미친 바이러스 때문에 세상이 미쳐돌아가는 게 아닌 그런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미쳐가고 있었다.

도리는 당연히 동생과 도망쳤고, 건지마저 쫓겨나게 됐다. 마음을 내준 도리와 미소, 건지를 잃은 지나는 왠지 체념하게 된 것처럼 보였다.

 

삶을 산다고 볼 수 없는, 그저 하루하루 버텨가는 삶에서 희망이 되어준 것은 사랑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좋은 사람이기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마음, 곁에 있어 몰랐다가 어느새 깨닫게 된 사랑, 서로를 지켜주고자 했던 자매간의 사랑과 자식을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이 있었다. 사랑은 살아야 한다는 의지를 다지게 했고, 이렇게라도 살다 보면 언젠가는 헤어진 서로를 만날 수 있다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했다. 미움만 남아 사람들을 다 악으로 분류하는 사람들보다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과 따뜻했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이 끔찍한 삶을 견뎌낼 수 있었다.

 

지옥에도 사랑은 있었기에 삶은 희망으로 충만했다. 비극 속에서 말하는 사랑이라 너무 따뜻하고 때로는 애틋해서 뭉클하게 만들었다. 그게 바로 사람다운 사람의 모습이었다.

 

하루하루 살아남는 게 기적이면서도 기적은 어디에도 없다는 생각. 기적은 없다. 기적이 정말 있다면 등장할 기회를 놓쳤다. 이미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 끝내 몇몇이 살아남는다고 치자. 그따위를 기적이라 부를 수 있을까? - P56

세상이 지옥이어서 우리가 아무리 선하려 해도, 이렇게 살아 있는 것만으로 우리는 이미 악마야. 함께 있어야 해. 한순간도 쉬지 않고 서로를 보고 만지고 노래하며 사람이 무엇인지 잊지 말아야 해.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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