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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코끼리열차행 티켓을 받자마자 동네어귀에 글을 남기고는 곧장 출발선상에 섰습니다. 여지껏 청룡열차나 환상특급은 타봤지만 코끼리열차는 한 번도 타보지 않은 관계로 설렘과 두려움, 흥분이 교차했습니다. 코끼리열차 앉자마자 출발을 알리는 기계소리가 들렸고, 무서운 놀이기구 탈 때의 습관대로 눈을 감았다 뜨니 어느덧 해가 저물었고,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고, 머리는 핑핑 돌았습니다. 아, 롯데월드에도 없고, 애버랜드에도 없는 코끼리열차! 책 속에 있었다.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의 첫 장을 넘기며, 단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이 365일 중에 298일이나 되는 이 세계는, 이라는 작가의 말을 읽고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강한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365일 중에 298일이나 단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다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나와 친구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소설집은 장편 소설과 달리 한 자리에서 끝까지 읽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 책은 하나의 단편소설이 끝나면 다음 단편은 어떤 내용일까?,하는 궁금증을 일으켜 저를 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자신의 등 뒤에 남이 볼 수 없는 문이 있다는 m과, 자꾸만 모자로 변하는 아버지를 둔 3남매, 그리고 점점 오뚜기로 변해가는 기조씨와 무도씨, 치즈가 되려는 초코맨 등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각자 환상의 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책을 읽다 보면 점점 내 등뒤에도 죽은 사람이 드나드는 문이 있을 것 같고, 우리 아빠도 사실 지금 모자로 변한 상태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고, 나도 점점 딱딱해져 어느순간 오뚜기가 될 것만 같은 불안에 사로잡힙니다. 환상으로 밖에 표현될 수 없는 세계, 그 세계에 내가 살고 있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열공해서 초코맨이 되었더니, 이제는 치즈가 대세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열공해서 치즈가 되니, 이제는 초코의 시대가 왔다고 합니다. 초코맨은 심각하게 고민합니다. 다시 초코맨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아니면 다시 치즈의 시대가 돌아오길 기다려야 하는지. 저도 고민했습니다. 꿈이 중요한지, 현실이 중요한지. 초코맨의 고민만큼 힘겨운 고민이었습니다. 고민하다 내 고민은 접어두고 초코맨에게 충고했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어. 지금이 초코의 시대라면 다시 초코로 돌아가야지. 프링글스도 아니고 나초도 아닌 겨우 초코 주제에...... 초코맨이 저를 쳐다보면서 비웃습니다. 천사도 아니고 골룸도 아닌 겨우 인간 주제에! 역시 초코가 나보다 똑똑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자꾸만 모자로 변해버리는 아빠! 그런데 3남매가 기억하는 아빠가 처음으로 모자가 되던 순간에 대한 기억은 서로 다릅니다. 첫째의 기억속에 아빠가 처음으로 모자가 된 날은 허름한 차림의 아빠를 자신이 모른 척 한 날이었고, 둘째의 기억속엔 고장난 라디오를 고쳐주지도 사주지도 못하는 아빠를 대놓고 원망한 날이었습니다. 셋째는 학부모 참관일날 아빠를 보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더니 아빠가 모자가 되어 사물함 위해 얹혀 있었다는 겁니다. 그들의 기억을 점점 따라가다 보면 아빠가 모자가 되던 순간은 모두 아빠가 초라했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 눈엔 보이진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아빠가 모자가 되었구나, 느꼈던 순간들이 떠올랐습니다. 소설속의 아빠는 시간이 갈 수록 모자가 되는 시간이 길어지는데 우리 아빠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도 들었습니다. 아빠가 모자가 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면 최소한 우리 아빠는 백화점에나 걸려있는 그래서 아무나 만질 수 없는 근사한 모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1개의 단편들이 나옵니다. 한 편, 한 편, 색달랐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한결같이 따뜻해 보였습니다. 문, 모자,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무지개풀, 모기씨, 초코맨의 사회, 곡도와 살고 있다, 오뚝이와 지빠귀, 마더, 소년, G에 나오는 모든 주인공들이 나 같기도 했고, 우리 언니 같기도 했고, 또 우리 아빠 같기도 했습니다. 그들과 만나서 참 즐거웠는데 벌써 코끼리 열차는 정차역에 섰습니다. 코끼리 열차에서 걸어나오면서 황정은 작가님의 다음 작품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제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겠죠? 일 년 365일 중 298일이나 단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다는 황정은 작가님, 남은 67일 중 바람이 살랑 살랑 불어와 기분 좋은 날 같이 허브차라도 한 잔 마셨으면, 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