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仁祖 1636 - 혼군의 전쟁, 병자호란
유근표 지음 / 북루덴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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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성곽에 대한 저자 유근표의 관심은 지난 20여 년간 그를 성곽과 병자호란에 대한 연구를 하게 했고 '서울성곽 탐방안내도'를 완성하여 관련 역사를 여러 곳에서 강의할 만한 체계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중 남한산성에 주목한 그는 10여 년간 인조실록, 승정원 일기, 만문노당 등 1차 사료와 인조와 병자 호란과 관련되 수많은 저작을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이미 <남한산성과 병자호란>를 그리고 이번에는 병자 호란 전의 조정과 중국정세 전쟁 중의 인조와 굴욕적 외교, 전란 후의 정세까지 세세히 살펴보고 <인조1636-혼군의 전쟁, 병자호란>을 엮어냈다.

병자호란은 조선이 친명배금 정책으로 멸시하던 후금과 중국에서 명을 제치고 세력을 확장하고 대륙의 강자로 군림하게 된 청으로 이어지는 정세 속에 인조 반정으로 권력을 지키려는 내부의 문제에만 신경 쓴 나머지, 국방과 백성의 삶을 도외시 한 '정권의 나쁜 예'였고 예견된 치욕이었다.<인조실록>에서 이 전쟁 직후 청군이 잡아간 이들을 '피로인'이라 지칭하고, 그 수가 50만 명은 될 것이라고 최명길 문집에 전하는데 대부분 노예가 되고 젊은이들은 청나라 장수에 첩이 된 여인들, 군제에 편입되어 총받이가 되는 남자들로 당시 사회적 파장이 엄청났다.

저자는 서문에서 조, 청, 명 3국이 얽힌 2개월의 기록은 단순하지만 그 원인에 대해서 그리고 8년 간 청의 볼모였던 소현세자 일가가 국환한 후 얼마 안가 죽음에 따른 의혹 등 단순 추정이나 흥미 위주의 그 간 나온 이야기는 배제하고 전란 중 대중이 잘 몰랐던 내용을 싣고자 했다고 전한다.

1623 인조 반정 이듬해 인 1624 이괄의 난이 남긴 상처는 컸다. 선조의 적자가 아니지만 왜란 중에 나라를 재건하려고 노력한 광해군을 몰아내고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한 인조의 반정 주체들은 1등 공신부터 3등 공신까지 총53명에 이르고 거사 중에 김류와 이귀 등이 1등 공신에 책록된 반면 결정적 역할(병력)을 했던 이괄이 2등 공신에 머물렀다. 병력을 부릴 수 있는 그의 권력을 견제하고자 김류와 이귀는 인조를 설득하여 반대파 제거하듯 역모 혐의를 씌우려했다. 나라의 부름대로 변방 수비에 매진하고 있던 이괄은 반기를 들었던 것. 반군은 관군을 물리치고 도성까지 진격한 사이 인조 일가는 공주로 몸을 피했다. 반군은 새 왕으로 흥안군을 내세우고 입성했으나 이틀만에 진압되는 과정에, 도성 안의 백성들은 임진왜란 때 조정대신과 임금(선조)를 떠올려 인조 정권에 실망이 컸다. 인조가 환궁한 이후에도 반군에 협력했던 세력을 제거하는 것은 물론, 애꿎은 백성들을 처형하는 모습은 민생을 외면한 채 자신들만 살 길을 찾아 떠났던 왕과 조정이 책임을 지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이후 인조는 왕의 경호를 강화하고 어영군을 늘리며, 신라 문무왕이 쌓았던 성이 남아있던 폐허나 마찬가지인 곳에 선조 때와 광해군에 수축을 시작했으나 자금확보 등의 문제등으로 중단되어 방치된 남한산성. 인조는 후금의 침입에 대비해 유사시 입보처로 삼고, 반대론을 누르고 만2년에 걸쳐 수축 공사를 완성한다.

책 마지막 부록으로 실린 남한산성 지도를 보니 경기 북부인 하남에서 남부인 성남, 광주까지 넓게 분포된 이 성은, 둘레가 총 11.76킬로미터로 내성과 외성을 이루며 4개의 성문, 4개의 장대, 5개의 옹성, 16개의 암문, 2개의 봉화대 125개 군포 시설을 갖추었다. 행궁 뿐아니라 종묘, 사직, 관아, 재옥, 객사 등 유사시 임시수도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의도한 것으로 풀이 된다는 것이다.

압록강 건너 요동 땅은 본래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유민과 말갈(여진족) 세력이 발해를 이루었고 거란족의 나라 요가 발해를 멸망시키고 여진을 괴롭히고 탄압했다. 천여년이 이르는 탄압 속 명맥을 잇던 생여진에서 금을 세운 태조는 불과 건국 10년 만에 요를 멸망시켰다. 끊임없는 대륙의 힘겨루기는 금이 '정강지변'으로 송나라를 멸하고 이후 몽골제국의 2대 태종은 영토확장에 탁월했던 칭기즈칸에 의해 멸하게 된다. 거란족과 몽골족 이후 한족이 세운 명에게 온갖 설움을 당한 여진은 여러 부족으로 찢어져 대항하는 세력을 누르고 누르하치가 통일하여 후금으로 칸에 오르며 여진의 패권을 쥐게 된다. '팔기군'이라는 강력한 군을 확립해 타락해가는 명에 대적하는데, 이에 명은 임진왜란 때 지원군을 보냈다는 이유를 들어 조선에 원군을 요청 압박해온다. 누르하치의 강한 복수극에 광해군은 후금과의 마찰을 우려해 명나라 장수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적당히 싸우다 항복을 해도 좋다는 의미로 원군을 보내게 된다. 압록강을 건넌 조선군은 군량도 충분치 않아 굶주리는 등 최악의 상황에서 명군은 기세등등한 팔기군에 패전을 거듭하여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은 1만3천명 중 8천을 잃었다고 한다.

누르하치의 숙원인 명을 정벌하는 일은 아들 홍타이지 대에 실현된다. 요동 벌을 제패하긴 했으나 농사지을 땅에 사람이 부족했고 명이나 조선과의 무역이 아니면 경제적으로 모든 물자가 부족했다. 기마병을 앞세우고 약탈했던 것 과거와 달리, 홍타이지는 영민했고 대외정복의 명분으로 조선을 정벌하기로 한다.

정묘년 1627년 1월 여진족, 한족, 몽골족의 다국적군 3만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들어와 3천 병력으로 주둔 중인 의주성이 함락된다. 당시 의주부윤 이순신의 조카 이완이 결사항전을 했으나 후금군에 패해 전사했다고 한다. 안주와 평양을 거쳐 한양까지 밀고 들어온다는 소식이 조정에 알려지자 당황한 인조는 세자에게 26명을 붙여 분조를 맡기고 종묘의 신주와 종실 가족들을 이끌고 강화도로 몽진을 가며 후금군이 수전에 약하리라 생각해 안전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후금은 여러 패륵들의 연합으로 한양으로 오기도 전 분열을 겪으며 화친을 제의해오고 '조선은 명과의 왕래를 끊고 형제국이 되자'는 것이다. 강화를 반대하는 척화파와 찬성하는 주화파는 격렬하게 나뉘는 중에 결국 후금과 협상으로 3월3일 후금 대신들 앞에 강화를 맹약하게 된다. 조정은 외교에서 한발 물러섰지만 압록강 하구 용천부와 철산부에서 백성을 대피시킨 용천부사 이희건은 100여 명의 군사에 불과해 용골산성을 지키려다 전사. 정봉수 의병장 같은 이는 왜구 토벌에서 활약해 따르는 의병들이 4천명을 모집해 반격했으며 백성들은 이에 힙입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싸웠다고 한다. 개전 이래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 조선군을 격파하던 팔기군도 용골산성전투에서는 패할 수 밖에 없던 이유는,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끈질기게 맞선 백성들과 의병들이었다는 점에서 기억해야 할 싸움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조가 강화를 맺고 후금에 꺽인 반면, 그의 아들인 소현세자는 어떤 행보를 보였는가? 이괄의 난과 같은 비상시 분조를 대비해 원자를 바로 세자로 책봉된 소현세자는 열여섯에 불과했고 세자의 어린 나이를 감안해, 세자를 가르치는 무리 세자시강원의 강관들 26명을 분조행렬로 1월24일 도성을 떠났다. 수원을 지나 여타 고을에서 군사와 백성들에게 전란으로 인한 고충을 묻고 충청도 감영 공주에서 그리고 전주에 이르며 의병을 모집해 전장으로 보내는 등의 분조 업무를 했다고 한다. 세자는 삼남 지역 민심을 고려해 문.문과의 과거를 총괄하고 후금과의 정묘약조 이후 강화행궁을 떠나 4월 도성에 환궁한다.

평안도와 황해도의 피해는 심각했으며 정묘호란을 바라보는 명에서는 조선이 가도의 모문룡을 제거하기 위해 후금을 끌어들이고 군량까지 지급한 것으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후금은 실제로 약조에 포함되지 않은 세폐까지 욕받고 군비와 전함까지 요구했지만 인조는 숭명 사상이 아니어도 약해진 국방력과 파탄 직전의 경제 여력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명과 후금 사이 균형있게 외교를 했던 광해군이 전쟁을 피해갔지만 인조 정권은 엄청난 피해로 곤욕을 겪고도 10년 동안 가도의 모문룡 문제로 혹은 집권 후 권력 유지를 위한 일에 몰두하고 팽창하는 후금을 배척하는 외교를 함으로써 병자호란을 자초한 것이라 평가된다.

' 오랑캐와의 관계가 파국에 이르러 조만간에 전쟁이 발생할지도 모르니, 충의로운 선비는 각기 있는 책략을 다하고 용감한 사람은 종군을 자원하여 다 함께 어려운 난국을 타개하고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 는 교서를 발표하고 기밀문서를 역관 정명수에 의해 홍타이지에게 까지 들어가며 1636 병자년 12월 마침내 몽골, 청군, 한군 총 12만 대군에 침략을 당한 것이 병자호란이다.

적병이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고립된 성에서 인조와 군신들은 위태로움을 느끼고... 막강한 청군에 대항한 조선군은 수많은 외침에 훌륭한 작전 경험 기개있는 무장들이 있어 승리와 패배를 반복. 류림의 지휘하에 치뤄진 승전 김화전투같은 기록도 있었다.

오늘의 전투에서는 우리가 천행으로 승리했으나, 화살과 탄환이 이미 떨어져 더이상 싸움을 지속할 여력이 없게 되었다.

..전열을 정비한 후 남한산성으로 달려가야 한다.

전국 각지에서 출동했던 근왕병이 거의 격파되고 장수들과 병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죽어갔다. 이조는 1637 정축년이 밝자 청군에 화친을 청했지만 국서들이 오가는 중, 척화파 김상헌은 후금의 홍타이지를 황제라 칭하는 이조판서 최명길의 답서를 보고 찢어버렸다고. 이에 죄없는 나라의 백성들을 위해 찢어진 국서를 다시 정서해 청 진영을 보내자 화친을 반대한 척화신과 세자를 보내어 결국 조선의 항복을 받아내고 정축조약을 이행하게 하였다. 소현세자 일행이 서울을 떠난 후에도 북으로 끌려가는 수많은 피로인 행렬이 어마했다고 전한다. 청은 세자와 봉림대군을 심양에 볼모로 잡고 중요한 제사나 행사 명과의 전쟁을 치를때에도 세자 형제를 참가시켜 전투 장면을 직접보게 했다고 한다.

소현세자는 청에 머무는 동안, 1644년 청나라 군대에 의해 명의 최후를 목격했고 북경 자금성에 머물며,천문과 역법에 밝은 선교사를 원했던 중국 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요청으로 1622년에 북겨에 와 있던 독일인 선교사 아담 샬을 만나게 된다. 명 황제의 신임을 받아 온 이후 청이 1644년에 입성해서도 서양 과학 문명을 인정했던 조정에 신임을 얻고 있던 아담 샬 지닌 서양 과학 문명. 세자는 언젠가 조선에 돌아가 부강하게 만들 꿈을 꾸는 조선이 떠받들던 명나라가 무너지며 인질 신분의 세자의 조선 환국이 결정되며 아담 샬을 조선 행에 동행하고자 했으나 황제가 허락하지 않아 좌절되었다. 소현세자는 8년 동안 갖은 고초를 겪다 돌아왔지만 아버지인 인조는 세자의 귀환을 겉으로와는 달리 속으로 반기지 않았고, 세자의 독살 의혹도 있을 만큼 세자와 세자빈을 냉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함께 귀국한 봉림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한 이듬해 소현과 세자빈의 아들 삼형제까지 제거하며 끝까지 왕권에 대한 광기와 집착을 보였다.

물론, 자신의 자녀이나 다른 후궁들의 입김에 조선의 왕들은 같은 핏줄을 내치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며 군신들 또한 자신들의 세력 팽창이나 입신을 위해 왕가와 결혼시키며 정치적 도모를 했다고 감안하더라도 인조가 무리하게 왕권을 빼앗고 허술하게 국방을 유지했던 방식과 외침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해 무능한 정권이었다는 역사적 평가를 피할 수 없었다는 것.

작금의 외교적 상황이 소환되며 훌륭한 리더십이란 무엇인가, 일반 국민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정권의 결말이 심히 걱정되는 것은 이 책이 절묘한 시기에 나와주어 오욕의 역사마저 되돌아보는 일이 매우 의미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만 같다.


이 리뷰는 북루덴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으나 개인의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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