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 건너 요동 땅은 본래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유민과 말갈(여진족) 세력이 발해를 이루었고 거란족의 나라 요가 발해를 멸망시키고 여진을 괴롭히고 탄압했다. 천여년이 이르는 탄압 속 명맥을 잇던 생여진에서 금을 세운 태조는 불과 건국 10년 만에 요를 멸망시켰다. 끊임없는 대륙의 힘겨루기는 금이 '정강지변'으로 송나라를 멸하고 이후 몽골제국의 2대 태종은 영토확장에 탁월했던 칭기즈칸에 의해 멸하게 된다. 거란족과 몽골족 이후 한족이 세운 명에게 온갖 설움을 당한 여진은 여러 부족으로 찢어져 대항하는 세력을 누르고 누르하치가 통일하여 후금으로 칸에 오르며 여진의 패권을 쥐게 된다. '팔기군'이라는 강력한 군을 확립해 타락해가는 명에 대적하는데, 이에 명은 임진왜란 때 지원군을 보냈다는 이유를 들어 조선에 원군을 요청 압박해온다. 누르하치의 강한 복수극에 광해군은 후금과의 마찰을 우려해 명나라 장수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적당히 싸우다 항복을 해도 좋다는 의미로 원군을 보내게 된다. 압록강을 건넌 조선군은 군량도 충분치 않아 굶주리는 등 최악의 상황에서 명군은 기세등등한 팔기군에 패전을 거듭하여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은 1만3천명 중 8천을 잃었다고 한다.
누르하치의 숙원인 명을 정벌하는 일은 아들 홍타이지 대에 실현된다. 요동 벌을 제패하긴 했으나 농사지을 땅에 사람이 부족했고 명이나 조선과의 무역이 아니면 경제적으로 모든 물자가 부족했다. 기마병을 앞세우고 약탈했던 것 과거와 달리, 홍타이지는 영민했고 대외정복의 명분으로 조선을 정벌하기로 한다.
정묘년 1627년 1월 여진족, 한족, 몽골족의 다국적군 3만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들어와 3천 병력으로 주둔 중인 의주성이 함락된다. 당시 의주부윤 이순신의 조카 이완이 결사항전을 했으나 후금군에 패해 전사했다고 한다. 안주와 평양을 거쳐 한양까지 밀고 들어온다는 소식이 조정에 알려지자 당황한 인조는 세자에게 26명을 붙여 분조를 맡기고 종묘의 신주와 종실 가족들을 이끌고 강화도로 몽진을 가며 후금군이 수전에 약하리라 생각해 안전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후금은 여러 패륵들의 연합으로 한양으로 오기도 전 분열을 겪으며 화친을 제의해오고 '조선은 명과의 왕래를 끊고 형제국이 되자'는 것이다. 강화를 반대하는 척화파와 찬성하는 주화파는 격렬하게 나뉘는 중에 결국 후금과 협상으로 3월3일 후금 대신들 앞에 강화를 맹약하게 된다. 조정은 외교에서 한발 물러섰지만 압록강 하구 용천부와 철산부에서 백성을 대피시킨 용천부사 이희건은 100여 명의 군사에 불과해 용골산성을 지키려다 전사. 정봉수 의병장 같은 이는 왜구 토벌에서 활약해 따르는 의병들이 4천명을 모집해 반격했으며 백성들은 이에 힙입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싸웠다고 한다. 개전 이래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 조선군을 격파하던 팔기군도 용골산성전투에서는 패할 수 밖에 없던 이유는,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끈질기게 맞선 백성들과 의병들이었다는 점에서 기억해야 할 싸움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조가 강화를 맺고 후금에 꺽인 반면, 그의 아들인 소현세자는 어떤 행보를 보였는가? 이괄의 난과 같은 비상시 분조를 대비해 원자를 바로 세자로 책봉된 소현세자는 열여섯에 불과했고 세자의 어린 나이를 감안해, 세자를 가르치는 무리 세자시강원의 강관들 26명을 분조행렬로 1월24일 도성을 떠났다. 수원을 지나 여타 고을에서 군사와 백성들에게 전란으로 인한 고충을 묻고 충청도 감영 공주에서 그리고 전주에 이르며 의병을 모집해 전장으로 보내는 등의 분조 업무를 했다고 한다. 세자는 삼남 지역 민심을 고려해 문.문과의 과거를 총괄하고 후금과의 정묘약조 이후 강화행궁을 떠나 4월 도성에 환궁한다.
평안도와 황해도의 피해는 심각했으며 정묘호란을 바라보는 명에서는 조선이 가도의 모문룡을 제거하기 위해 후금을 끌어들이고 군량까지 지급한 것으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후금은 실제로 약조에 포함되지 않은 세폐까지 욕받고 군비와 전함까지 요구했지만 인조는 숭명 사상이 아니어도 약해진 국방력과 파탄 직전의 경제 여력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명과 후금 사이 균형있게 외교를 했던 광해군이 전쟁을 피해갔지만 인조 정권은 엄청난 피해로 곤욕을 겪고도 10년 동안 가도의 모문룡 문제로 혹은 집권 후 권력 유지를 위한 일에 몰두하고 팽창하는 후금을 배척하는 외교를 함으로써 병자호란을 자초한 것이라 평가된다.
' 오랑캐와의 관계가 파국에 이르러 조만간에 전쟁이 발생할지도 모르니, 충의로운 선비는 각기 있는 책략을 다하고 용감한 사람은 종군을 자원하여 다 함께 어려운 난국을 타개하고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 는 교서를 발표하고 기밀문서를 역관 정명수에 의해 홍타이지에게 까지 들어가며 1636 병자년 12월 마침내 몽골, 청군, 한군 총 12만 대군에 침략을 당한 것이 병자호란이다.
적병이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고립된 성에서 인조와 군신들은 위태로움을 느끼고... 막강한 청군에 대항한 조선군은 수많은 외침에 훌륭한 작전 경험 기개있는 무장들이 있어 승리와 패배를 반복. 류림의 지휘하에 치뤄진 승전 김화전투같은 기록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