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죽음을 잊고 사는 시대다. 사람들은 우울, 불안, 외로움 같은 죽음이 관장하는 감정들을 껴안고 살아가면서도 사후 세계는 믿지 않는다.

죽고 싶다, 죽을 것 같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막상 죽음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갈팡질팡한다.어린아이가 노인이 되듯 시간의 섭리에 따른 일일 것이라 막연히 생각하지만 인간사는 예상치 못한 무수한 죽음과 죽음의 여러 양상으로 이루어져 왔다.그동안 죽음을 다룬 책들은 삶에 있어 죽음이 갖는 의미를 모색하거나, 죽음에만 깊은 무게를 두거나, 죽음이 주는 메시지에만 집중했다. 켜켜이 쌓기만 한 죽음의 무게와 위압에서 우리들은 자연히 그것을 마주하기보다는

회피하는 쪽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의 저자 이연식은,서양화 를 전공하고 현재 미술사를 살펴보며 예술의 정형성과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시각으로 저술, 번역, 강연 활동을 하고 계신 분이다. 죽음이라는 무거울 것만 같은 주제를 이번에는 어떻게 다루었는지 궁금했다. 그는 죽음에 대한 생각은 '이미지'를 빌려 전승되었고, 사진이나 그림으로 조각 등으로 관련된 죽음에 관한 이미지는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라고 한다. 인간사의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사연, 그리고 죽음의 안팎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넘나드는 시선 속의 유령의 존재로 함께 언급할 것이라고 했다.


 프랑스 대혁명과 관련된 그림 중 가장 유명한 <마라의 죽음>은 프랑스 혁명 정부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자 유명한 저널리스트의 자코뱅파의 지도자였던 장 폴 마라가 칼에 찔려 숨진 사건의 장면을 여러 화가들이 그렸는데 마라가 욕조에 널판을 놓고 서류를 검토하며 일하는 중에 방에 들어선 코드데 라는 여성이 저지른 살인 장면이다. 자코뱅파와의 정쟁에서 밀려난 지롱드파를 옹호했던 지적인 여성이었던 그녀는 '공포 정치'를 주도하고 수많은 사람을 반혁명 분자라며 단두대에서 죽였기에 코르데 그녀가 직접 처단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한다. 혁명 정부 당시의 그림인 자크 루이 다비드 이후폴 자크 에메 보드리의 <샤를로트 코르데1860>작품은 마라의 암살을 코르데의 입장을 대변하듯이 그렸다. 암살자인 그녀는 사형에 처해졌지만 말이다.

장 조제프 베르츠의 <마라의 암살,1880>또한 같은 맥락에서 누군가는 암살자, 누군가는 순교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상복은 검은색으로 오랜 세월 굳어져온 전통과 같은데,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죽음을 지켜보는 이들은 스스로 죽음에 벗어나기 위해 검은 천으로 한껏 가리는 이미지로 등장한다. 검은색은 덮어 가리는 행위이며 보티첼리의 <아펠레스의 비방>에서 긍정적인 가치인 진실이 알몸의 여성으로, 참회를 검은 두건을 쓴 나이든 여성으로 묘사되어 있다.


 또한 그리스 영웅 테세우스가 크레타를 향해 출발할 때부터 무시무시한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살아올 거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던 테세우스의 아버지이자 아테네 왕이었던 아이게우스는 아들이 죽었다면 출발할 때처럼 검은 돛을 무사하다면 흰 돛을 달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테세우스는 살아 귀환하면서도 검은 돛을 흰 돛으로 바꿔다는 것을 잊어버렸기에 아이게우스는 검은 돛을 단 배가 보이자마자 낙심하여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검은 돛은 윌리엄 터너 <평화-수장>에서도 빛과의 선연한 대비로 위태로운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형체는 빛을 가두고 빛은 갇히다 파열하여 형태를 내부로 집어 삼키는 모습으로 데이비드 윌키라는 동료이자 친구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다.

 대부분의 인상주의 화가들이 자연에 검정이 없기에 피하려고 애썼던 것과 달리, 마네는 '검정으로 빛을 냈다'는 평가도 받을만큼, 신비롭고 확실하게 그 매력을 잡아내었다. <제비꽃 장식을 단 베르트 모리조>라는 작품이 그 한 예이다.(죽음은 검정)


또다른 인상주의 화가 중 지금도 사랑받는 클로드 모네는 죽음을 어떻게 그렸을까? 아내 카미유가 오래 앓다 암으로 숨을 거두자 그런 죽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그리는 것이 어색했던 것일가? 모네의 붓질은 망설임 그 자체로 보인다. 당혹감과 난감함이 뒤섞여 결국 그는 자신의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고 서명을 하지 않았다. 모네 사후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서명을 도장으로 만들어 찍었지만, 그래도 혼란스러운 화가의 고심이 느껴지는 <죽은 까미유>는 그의 그림에서의 변곡점을 보여주는게 아닐까 생각,했다.

구스타브 클림트의 제자 에곤 실레는 젊을 때부터 죽음에 대해 그렸는데 <은둔자들>에서 그 자신과 스승을 그렸는데 그때보다 나이가 들면서, 의지하던 클림트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자 실레는 공허한 죽음을 캄캄한 심정으로 그렸다고 한다. 이 책의 표지는 실레가 <죽은 클림트,1918>를 그린 것이라고 하니 그의 상실감이 어떨지 짐작이 갈 만하다.

찰스 디킨스의 단편 <크리스마스 캐럴>은 유령들의 방문을 받아 스크루지가 과거, 현재의 유령과 함께 밤새도록 돌아보고 미래의 비참한 유령을 맞닥뜨리면서 현재를 바꾸지 않으면 미래는 암담할 것이라 예고한다. 책의 삽화에 나타난 유령 말리는 스크루지처럼 탐욕스러운 삶을 살았고 천국으로 가지 못한 채 이승과 저승 사이를 방황하다 옛 동료이자 아직은 기회가 남아있을 때 개심하라는 말을 남긴다.

하지만 저자는 이는 꿈일 뿐, 유령이 우리 곁에 머물러 산 자들에게 말하고 행동하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이의 입을 빌어 산 자가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이 아닌지, 단편의 삽화 하나로 우리가 지혜를 깨닫기를 바라고 있다. 죽은 이는 돌아올 수 없고, 돌아와서도 안 되는 존재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존경했던 파블로 피카소는 실제 여자 관계가 복잡하고 오래 살았던 열정적인 화가의 인생을 살았지만, 여성이나 주변 인물들의 자신의 세계의 부속품으로 여겼다고 한다. 수많은 여성들을 취해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를거라는 공포를 담은 <상처 입은 미노타우로스>는 그림에서조차 자신같은 괴물도 손내미는 여자들로부터 구원을 받기를 원했다니...이제와서 실소가 나올 만한 일이다. 독특하고 열정적인 그림 세계와는 별개로 인간적으로는 본받을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할까?


자신이 곧 죽음의 세계에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죽음으로부터 마리아를 멀리 두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온전히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사실, 나의 종교적 지식이 한없이 부족해, 예수와 관련한 그림에 대한 해석은 이해하기에 좀 어려웠고, 죽음이라는 맥락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는 성경의 설정들이 나온다. 그렇다 하더라도, 작가의 상상력을 보탠 마리아 막달레나와 예수를 그린 그림, <나를 만지지 마라> 제목의 일련의 작가들의 작품들의 해석은 꽤 믿음직했다. 부활한 예수가 마리아가 자신을 만져 반가움과 친근함을 표하려 하자, 죽음으로부터 그녀를 지키고자 했다는 해석이 그것이다.

공교롭게도, 남편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오늘 날씨도 꾸물한 가운데 책을 읽다가 나는 뭔가 작은 파문을 느꼈다. 누군가의 죽음, 그것도 피가 섞이지 않은 자의 죽음이지만, 마음속으로 애도하게 되고그래도 죽음이 삶의 일부라는 깨달음 말이다. 20대에 피붙이가 돌아가셨을 때의 모습이 소환되기도 했고, 지금 40대에 받아들일 수 있는 죽음의 무게가 결코 삶이라는 무게보다 그리 무겁지 않다는 것이라는 깨달음과 함께...


이 리뷰는 시공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으나 개인의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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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5 23: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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