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의 사회 - 말해지지 않은 무궁무진한 여자들의 관계에 대하여
권김현영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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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소설은 종종 읽었어도 본격 페미니즘을 맞딱뜨리긴 다소 불편감이 있어 멀리했던 독서의 분류에 속했었다.

그러나 내가 정말 애정하는 책들, 영화 그리고 심지어는 대중적인 서바이벌 TV예능프로그램까지 총망라한 저자의 열정이 엿보이는 목차를 보니 책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을만큼 궁금했다. 작가는 어떤 경험을 가지고 있을까?

권김현영(權金炫伶, 1976년 ~ )은 여성주의 연구활동가이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집행위원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객원교수를 지냈으며, 현재는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기획위원으로 재직중이다. 2020년 올해의 양성평등문화상 양성평등문화지원상 개인부문을 수상했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여자의 삶에서 다른 여자들과의 관계 외에도 동성 사회의 다양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여성은 남성의 타자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이며 인간 관계로 이루어진 사회 곧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대중 문화 콘텐츠들에 남성을 대체한 여성들이 예능을 하고 성공을 거두고 이러한 여성 서사는 특히 오랜 시간 사랑받아온 《작은 아씨들》, 《빨강머리 앤》 같은 곳에서 계속 리메이크되어 여자의 적이 여자(여적여)가 아니며여 여자들과의 관계에 대한 강박도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운 모습이 보여지는 시대가 되었다고 말한다.

소설 《작은 아씨들》 은 1970년대 이후에 비평가들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고 가치를 부여받았을만큼 중요전환점을 가지고 있다. 여성의 소비 지향성과 허영심에 대한 당대의 여성 혐오가 들어있다고 혹평도 있고 가부장적 플롯에 머물렀다는 비평들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작가 루이자 메이 올컷은 실제로 여성의 자립과 여성 공동체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있던 페미니스트였다.

사실, 내가 기억하는 이 소설은 어린 시절 만화나 TV시리즈보다 2019년 영화화된 그레타 거윅의 손에서 탄생한 것이다. 원작과 이전 영화들에서 에이미가 다소 이기적이고 허영심이 많으며 철없는 행동으로 조 마치의 헌신적이고 선머슴(의리있는)같은 역에 대비된 묘사였다면, 플로렌스 퓨가 분한 2019년의 에이미는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미래를 도모하는 현실주의자로 묘사된다. 한 남자 로리를 사이에 둔 자매의 삼각관계가 뻔한 스토리로 흘러가지 않고 로리의 존재는 조와 에이미의 유대 관계를 더 돈독해질 수 있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때문에 영화가 더 내 머릿속에 남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특히 기억에 남았던 장면을, 저자도 80p.에서 인용하고 있다.

여자도 감정만이 아니라 생각과 영혼이 있고 외모만이 아니라 야심과 재능이 있어요.

여자에겐 사랑이 전부라는 말이 신물이 나요. 지긋지긋해요. 그런데 너무 외로워요.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사랑하는 것과는 다른 마음이고 중요한 건 여자의 삶에서 사랑은 어떤 위치여야 하는지이다.

동성 친구 관계, 특히 여자친구들끼리의 관계는 진정한 우정관계로 발전 가능한가? 이는 저자 자신의 경험에서, 대학교 1학년 교양 수업의 첫시간을 소환하는데, '우정이 무엇인가?'를 적었던 선생님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인용하며 "다른 모든 것을 가졌다고 해도 필로스philos가 없는 삶은 누구도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며 동기들끼리 잘 지내라고 했다. 그러나 여학생들에게는 부정적으로 언급하였고, 동기를 강조하던 선배 중 누구 하나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친구란 없다고 말하는 것을 기억했다. 저자는 그래서 언젠가 오래된 폄훼의 역사에 대해 글을 쓰겠다고 생각하곤 했다는 것이다.

2.서로 길러내는 우정에 대해, 《빨강머리 앤》 은 동맹으로서의 순수함, 1908년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원작 백인 중산층 가정의 모범적인 소녀 다이애나와 고아원 출신으로 집안의 노동력을 위해 입양된 앤 사이의 우정이 지고한 이상을 가진 그 동맹 관계임을 보여준다.신분제나 인간 이하로 취급받던 여성인 고대 그리스 우정이 아닌 근대적 의미에서의 우정은 출신과 무관하게 존재 그 자체의 동등성으로 타인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유익하되 그것이 우정의 조건이 되면 안 되고,

동등하되 집단의 무리로서 소속하는 것 이상의 배타적 특별함이 있는 것.

무엇보다 순수하게 '상대의 좋은 점을 좋아해주는 것'

이러한 맥락에서 7.이토록 다른 우리가 친구가 되기까지의 <청춘시대> 드라마는 전혀 모르던 하우스메이트가 함께 살아가면서 어느새 진정한 '우정'을 만들어가는 과정 그 자체를 보여준다. 적대에서 출발했지만 소문을 뚫고 서로를 직면하며 위험에 처하면 기꺼이 달려나가 구해지는 시간들을 보내며 타자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진 틈을 메워가는 여성의 서사, 남성과의 관계가 없이도 그녀들이 존재하고 여성의 삶에서 사랑이란 우정보다 작은 부분을 차지할 수 있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고 보았다.

<방옥숙의 비밀> 은 우정과는 결이 다른 여자들간의 관계에 대해서 말한다. 198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아파트'란 중산층의 욕망과 실천의 대상이자 이성애 결혼 제도 안에 들어간 중하층계급 여성들이 살고자 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제공해주는 상징이다. 그녀들의 초과된 욕망이 만들어낸 아파트, 특히 강남 한강뷰 아파트란 공간에서 빚어내는 부녀회 '방옥숙'들의 파국을 보여주는 네이버웹툰이었다.

집값에 진심인 분들이라는 빈정거림을 듣는 방옥숙을 비롯한 노블 골드 캐슬 아파트 부녀회의 그녀들, 겨우 이뤄낸 중산층의 삶을 놓치고 싶지 않았고, 남편의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 남성 생계 부양자 모델의 허구적 성격을 폭로하는 동시에 전업주부 여성들이 적극적인 투자 행위를 비롯해 저축과 관리,자녀 교육과 집안 일, 간병, 돌봄 노동 등 다양한 방식으로 역할을 수행하는 규범화된 일들이 가부장제 가족 제도에 있다는 것이다. 내 경우에도 주택 실천에 관해 최시현 박사님의 책<부동산은 어떻게 여성의 일이 되었나>(창비,2021)를 읽고 이러한 성별회된 중산층의 시민 윤리, 투기화된 실천의 주체로 여성들은 자발적으로가 아닌 어쩔 수 없는 지점에 놓여져 있다고 생각해왔다. 아직 보지 못한 이 웹툰은 사회 부조리, 성별화의 부조리를 아파트라는 것을 매개로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 책을 읽다보니 검색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스트릿 우먼 파이터>는 최근까지도 화제의 중심에 있는 Mnet의 간판 프로그램이다. 여기에 등장한 여자들은 춤이라는 강한 무기로 무장하고, 리더를 주축으로 좋은 리더, 좋은 크루(멤버)의 작은 사회들을 모아 보여주고 있었다. 일명 <스우파> 출연진들은 계급 미션을 서열 싸움이 아닌 수싸움 읽기와 리더십 경쟁으로 소화해 여자들의 싸움이 서로 상생하는 굿 파이트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모든 춤꾼들이 행복하게 출 수 있게 되길 바란다.'제일 먼저 서바이벌에서 물러난 웨이비(팀)의 리더 노제가 남긴 말이 내 기억에 소환되며 조직 전체를 위해 리더가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지를 깨닫게 해주어 시청자들의 팬덤이 생겨나고, 과거의 안 좋은 인연과 스승과 제자, 선후배, 배틀의 상대자였던 여자들이 다양하게 맺는 관계를 거듭되는 회에서 보여줌으로써, 갈등과 화해 그리고 배틀이 스트릿 댄스 씬을 멋있고 풍요롭게 해왔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언니들이라면 아무리 싸워도 괜찮은 안심되는' 서사가 되고 역사가 된다는 것이라고 보았다.


저자는 <언니네>라는 인터넷 기반의 페미니스트 공동체 커뮤니티의 운영진을 했었고 그녀가 경험했던 여자들의 사회는 남자없는 사회가 아니라 남자가 필요 이상 중요해지지 않는 사회다. 남자가 여자친구의 아이디를 빌려 접속하지 않고 남자들을 걸러내지 않고 일종의 개인 블로그나 위키백과 같은 지식놀이터를 만들었고 이때의 경험이 여자들의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지를 참조할 수 있게 했다고 한다. 소수자의 문제를 여성혐오에 대한 세간의 시선들을 다시 생각해보자 한다. 영화 <기생충>으로 상을 받는 봉준호 감독을 보고 충격을 받은 한국계 헐리웃 배우 산드라 오는 자신이 영화계에서 소수자였고 한국계 미국인 여자라는 자신의 위치를 다시 생각해봤다고 했다. 문제는 피부색이 아니고, 여성이 남성 중심 사회에 소수자란 위치지만 '여자들의 사회' 즉 여자들만의 사회에서 여자는 소수자가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며 대중문화에서 흔히 여왕벌로 그려지거나 아메리칸 탑모델 혹은 골때리는 그녀처럼 캣파이트가 일상적이지도 않다는 것에 공감하게 되었다. 저자는 여자 상사들에 대한 부정적인 표현들이 많지만 일반화할 정도로 케이스가 풍부하지 않기에 실체 없이 만들어진 고정 관념 때문에 '다른 해석'을 할 여지가 없었다고 했다. 여자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지지하고 응원하는 관계로 지내는 것은 쉽지도 당연하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은 가부장제 사회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방식으로 여성 동성 사회를 만들어왔다고 단언한다. 그 증거들을 대중문화 속에서 찾아내는 작업이었고 아주 즐거웠다고 에필로그에서 밝히고 있다.

세상의 반이 여자이고 인간 사회의 단면에 속한 '나'를 되돌아보니 맞고 틀린 내가 보였던 책이어서 참 감사했다.

[이 글은 휴머니스트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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