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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의 계획 VS 안중근의 반격 - 교과서가 다 담지 못한 안중근 의거
류은 지음, 이강훈 그림 / 책과함께어린이 / 2021년 10월
평점 :
부제 '교과서가 다 담지 못한 안중근 의거'와 표지의 총격 장면을 대하니 어떤 숨은 이야기가 있을지, 교과서에 묘사된 사건에서 우리가 보지 못했던 알지 못했던 또다른 진실이 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하얼빈 기차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총을 쏜 대상은 러시아 군대에 둘러쌓여 환대를 받고 있는 통감(지금의 외교부) 이토 히로부미. 이 사건으로 러시아 경찰에 체포된 그가 러시아 법정이 아닌 일본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사형을 받았던 사실은 기록에 남아 교과서에 나와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왜 러시아법이 아닌 일본 법인지? 일본인도 아닌 그를 일본에게 넘긴 러시아의 입장은 무엇인지? 궁금해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차이나는 클라스라는 교양과 예능을 합친 장르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한철호 교수의 안중근 편을 못봤고, 뮤지컬계에서 유명한 그를 소재로한 뮤지컬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궁금함이 증폭되었어요.
사실, 류은 작가의 말대로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안중근을 일제 강점기의 인물로 알고 있다는 것처럼 저도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이에요. 안중근은 일제 강점기 즉, 한일 병합(합방으로 배웠는데 요즘은 다른 용어로 배우나봅니다 허...) 으로 강제로 일본에 속국이 되었다는 사건 직전에 이미 사형장의 이슬이 되셨다고 하네요. 그럼에도 일찍이 우리의 자주적인 힘으로 동아시아의 평화와 발전을 도모하고 일본의 야욕을 알아차리자 동아시아의 평화를 방해하는 일본, 특히 그 핵심인물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함으로써 중국이나 일본 등의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동등한 나라로 자주적으로 인정받기를 바란 것이죠.
그렇다면 110년 여년 전 동아시아 정세를 들여다보고, 그리고 지금의 우리가 각국의 관계를 제대로 정립하고 미래에 대한 해답을 찾기를 저자의 바람대로 해봤으면 합니다.
1800년대 말 전세계의 힘의 균형이 달라지고 통상을 요구하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그리고 한.중.일 삼국에 불어닥친 변화는이들의 지도층과 일반 국민들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을까요? 조선 침략의 첫걸음을 내디닌 일본/ 흔들리는 조선의 주권, 그리고 이에 저항한 이들의 등장 1부에서 살펴보고, 2부는 구체적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역할과 우리나라에 행한 만행에 대해, 3부는 안중근의 좌절과 치열한 싸움 끝에 생을 마감하게 된 결과와 의의에 대해 알아보아요.
일본이 일으킨 청(중국)과 러시아와의 전쟁, 두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의 조정에 두 나라의 간섭을 걷어내고자 했으나 국모였던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이 반역을 꾀했다는 누명을 씌우려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미국인 교관이나 러시아 건축가 등의 목격자의 증언으로 일본이 관여했다는 사실, 서양 강대국에서 비난 여론이 일자 일본은 당시 미우라 공사를 해임하는 선에서 끝났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을미년 을미사변입니다.
이토가 조선 공사로 미우라를 보냄으로써 계획한 잔인한 공모였고 훗날 의거를 일으킨 안중근이 법정에서 이토를 배후로 지목한 사건이었기에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럼 안중근의 출생과 살아온 배경은 어떨까요? 강화도 조약 3년 후 태어난 안중근은, 그의 아버지인 안태훈은 신문물을 배우러 갈 유학생이었으나 나라 안에 개화정책으로 갈등이 심해지고 급진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의 실패로 죽임이나 유배를 피해 안태훈은 가족들을 이끌고 황해남도 청계동으로 도망치게 됩니다. 안중근은 지형은 험했지만 부족함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고 어려서부터 사냥을 즐기고 공부에는 소홀했습니다. 그러나 '번개 입'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어떤 걱정의 말을 듣거나 해도 당당하게 막힘없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어딘가에 의협심이 강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 멀고 가깝고 가리지 않고 찾아가 어울릴만큼 친구 사귀기도 좋아했다고 합니다. 부유한 양반 집안에 태어나 대체로 편안한 삶을 살 수도 있었으나 그가 16살이 되던 해인 1894년 일반 백성들의 어려워진 삶이 곪아터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났고 동학을 믿었던 일부 양반과는 달리 그이 집안은 조정에 대한 반란을 한 농민들의 반대편에 서서 임금에 충성하라는 유교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했다고 합니다.
그런 그의 생각과 달리하는 이들과의 만남,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 일본이 속여온 속내와 이토라는 자의 계략을 깨달은 그는 청나라에 자리를 잡은 인사들을 차례로 만나 의거를 일으킬 사람들을 모으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다음 세대 교육을 위해 재산을 털어 학교를 짓고 교사가 됩니다.
일본의 불법적 국권 찬탈을 알리는 헤이그특사 실패와 고종의 퇴위 소식에 안중근은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의병과 자금을 모으고,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해야 한다는 연설을 합니다. 이로서 안중근은 독립군 부대 '대한의군'을 창설하고 참모중장이 되어 일본군과 싸웁니다. 크게 패하기도 했고, 러시아 의병 활동이 여의치 않자 부끄러운 마음으로 단지 동맹을 결성하고 이토를 막을 방안을 강구하게 되었습니다.
안중근의 삶 30여년은 개항 후 열강의 침입으로 점철되었고, 31살 1909년 그가 사형되던 해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이 망하기까지의 과정과 맞물려 있는 것이죠. 대부분의 양반들이 어리석게도 국민들의 희생을 발판 삶아 일본의 앞잡이가 되기도 하고 스스로 자멸했던 반면 안중근은 천주교와 주변의 도움으로 스스로 군인이 되고, 영웅의 삶을 개척했습니다.
안중근이 사형된 이후, 그의 동생 둘도 독립투사가 되었으며 다른 여러 의사들이 나라와 해외까지 나오게 되었기에 그의 죽음과 사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독립운동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됩니다. 전 재산을 헌납해 독립 운동을 하고, 뜻을 굽히지 않고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독립운동을 하다 숨진 여러 의사들이 있었던 와중에, 동학 농민 운동 때부터 안중근 집안과 인연이 있던 김구 선생은 안중근의 의거 이후 함께 일을 공모했다는 의심을 받아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갖가지 차별과 공포, 압박에도 우리 민족은 1919년 3월1일 고종의 장례식을 계기로 전국적인 항일 투쟁을 이어나갔고 만세 운동은 남녀노소, 신분과 관계없이 만세를 불렀습니다. 중국 상하이에는 임시 정부가 들어서고 백성이 주인이라는 뜻의 깨달음을 반영한 '대한민국' 이 새로 태어난 것이었습니다.
안중근과 김구의 우정, 그리고 이름모를 수많은 의병의 목숨들, 어린아이들과 부녀자들 그리고 신분의 고저를 막론하고 하나가 된 대한민국인들이 우리 조상이라는 자랑스러운 역사에 감사할 수 있었던 책이었습니다.
이 리뷰는 책과함께어린이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으나 개인의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