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미국 한인 셰프가 아니다. 스타셰프~ 10년이 넘게 각 종 셰프상을 수상하고 세계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다.
어린 시절, 그는 요리 잘하는 어머니, 요식업에 종사하는 평범한 한인 가정에서 자랐다. 하지만 고르게 성적이 나쁜, 공부 못하는 학생이었고 졸업학점도 좋지 않아 집이랑 멀리 떨어진 주 대학을 갔다. 친할머니는 한국에서 앞장서 기독교로 개종을 했고 무시무시한 할머니 덕분에 교회에 나갔다. 장로교 교회를 다닌 할머니와 부모님, 누나들은 그를 끌고 갔다. 그는 잠자코 따라갔지만 '진짜 사후의 삶만이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면 저들은 왜 더 많은 사람을 교회로 데려오지 않는 걸까? 왜 앉아서 고기나 구워 먹을 생각을 하는 걸까?' '하지만 왜 이래야 돼?'라고 생각하고 의문을 가질만큼 자랐고 다른 가족들이 성경공부를 하고 누나는 특히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진짜 신자였지만 그는 학생예배를 싫어했고 십 대로 접어들 무렵부터 거칠게 반행했다. 그는 어린 시절 골프에 재능을 보여(아버지의 골프 용품점에 숨어있기도 했다) 골프로 유명한 학교 중의 하나인 조지타운 프렙을 다녔지만 공부 잘하는 아시아계에도 속하지 못하고 비아시계 아이들처럼 뛰어나지 못해 열등감에 빠졌다고 한다. 가정에서 공부한 성경 덕분에 종교 수업만큼은 따라갔지만.
대학에서는 종교학을 했고 유럽에서 교환학생으로 갔었고 대학을 졸업하고는 회사에 다녔다. 그러나 하찮은 일이라 세세히 기억을 못하는 일이었고 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그는 그의 솔직함에 높은 점수를 준 컨설턴트의 제안을 거절하고 요리학교에 가게 된다.
그는 대학 때 동네 술집에서 바텐더 조수로 집 근처 스테이크하우스에서 버스보이(주방에서 식탁까지 요리를 나르는 사람)로 일했고 주방에서 일하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반대했다. 결국, 그는 회사를 관두고 뉴욕 맨해튼 프렌치 컬리너리 인스티튜트(6개월)를 들어가 졸업하기까지 치열하고 빡빡하게 생활했다. 평일 낮에는 수업을 밤에 장 조지 봉게리히텐의 머서 키친에서 그리고 주말에는 크래프트에서 전화 응대를 했고 스물둘에 요리를 시작한 그는 열여섯 살부터 요리를 해온 이들에 비해 엄청나게 뒤쳐져 있었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경험을 쌓으려고 발버둥 쳐야 했다. 날재료(식재료)를 손질하는 일 '미장 플라스'는 진짜 주방에서 그를 놀라게 했고, '가르드 망제' (샐러드, 애피타이저 등의 차가운 음식을 담당하는 조리부)에서 오랫동안 일하게 되었는데 아침 준비조와 저녁 식사 서비스조를 최대한 번갈아가며 크래프트에서 2년 반 동안 일했다고 한다. 근무시간이길었지만 건강이 나빠지지도 의욕이 떨어지지도 않을 만큰 의지력이 대단했다.
2003년 카페 불뤼에서 그는 매일 18시간 일하고 센트럴 파크 건너편 대학 친구집 소파 침대에서 자고 일어나면 출근 그리고 5분 만에 샤워하고 잠들거나 샤워를 하지 않고 바로 잠들거나 했다고 한다. 스파르타의 용사처럼 소수 정예의 팀의 일원이었고 음식의 조예가 깊지 않은 손님들에게 항상 최고의 요리를 냈다. 6개월 간 그의 인내심은 다 되어갔고 일하고 또 일하는 사이 주방과 실생활의 경계선도 무너졌기에, 이전부터 몇년 간 정신과 의사와 상담을 했고, 카페 불뤼에서 일하던 막바지 양극성 성격장애를 겪었고 심한 울증을 버티며 일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우울증은 울증과 조증을 반복하고 지속적인 통증과 고통에 몰아넣었고, 상담의사에게 털어놓은 이야기들....
그럭저럭 잘 보냈다고 생각한 어린 시절에도 혼자 시간을 너무 오래 보냈기에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배했고, 아버지의 극성에 시달리고 어머니와도 갈등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우울증의 증세는 일 중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