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 민간잠수사회는 2014년 세월호 사고가 발생하고 국가가 구하지 못한 생명들을 수습했던 해경공무원도 군인들도 아닌 평범하지만 '산업잠수사'라는 특별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 25인이로 이루어져 있다.
사고와 그 이후, 그들의 7년 간의 이야기를 안덕훈 작가가 2019~2021년에 걸쳐 인터뷰하고 그들의 입장 당시 사회적 분위기 등을 엮어 재발간한 책이다. 집필에 참여한 12인 외 나머지 13인 중에는 고인이 된 이들도 있고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참여하지 못할만큼 아마 심각한 고통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잠수사들도 있으리라 짐작된다.

4월16일 세월호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좌초되고, 해양경찰도 해난구조대도 모두 우왕좌왕 하는 사이 배는 점점 뒤집힌다. 사고 소식을 접하고 오보에 이어 각 일터에 있던 민간 잠수사들은 서로 동료들
을 찾고 장비를 챙겨 팽목항으로 향한다. 수백 명의 목숨이 잠겼지만 바지선도 형편없었고 시간은 점차 지체 되고 제대로 체계적 지시를 내리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4월 20일 황병주, 백인탁, 이상진, 김순종 잠수사는 오후 4시경에야 맹골수도 거센 바다에 구조를 위해 처음으로 세월호 선체로 입수해 들어갔으며 이는 구조인력 중 최초였으며 구조되지 못한 여객들 중 단원고 학생들의 안타까운 주검을 건져낸 날로 기록된다.
미안하다. 아저씨가 너무 늦어서...
침몰 3일만에 본격적인 구조를 하게 된 그들은, 하루 일분일초 희생자들의 유족들을 위해 안전수칙도 지키지 못한 채 하루에 감압없이 4~5회 수심 40미터 이상을 잠수해야 했기에, 상황은 매우 긴박하게 돌아갔다. 수많은 주검을 물 밑에 두고 적은 인력으로 수습작업을 강행하고 좁은 선원용 식당이나 크레인 운전석에 들어가 얼어붙은 몸을 녹이고 먹을 것 조차 그들이 머무르는 바지선에 닻지 못했지만, 잠수사들은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고통을 더 크게 염려했기에, 오열하는 유가족들 앞에서 아이들의 주검을 전해주며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해경과 해군이 가진 장비와 메뉴얼로는 선체 진입이 불가능했고 언론에서는 현장 상황을 잘 알지 못하고 이런 저런 추즉만을, 전문가라 자처하는 사람들은 현장에 왔다 거센 조류를 보고 발도 담그지 못한 채 입수를 포기하고 돌아갔다.
5월로 접어들며 수색작업은 계속되었고 '언딘 리베로' 라는 해경과 계약을 맺은 회사의 장비와 시설이 배치되었다.5월4일 해경책임자는 이제까지 현장에 있던 민간잠수사들 대신 장비를 갖춘 해경 잠수부를 VIP와 사진찍기 위해 언론앞에 서게 했고 정작 목숨을 걸고 수색작업한 이들을 눈에 띄지 않게 출입을 통제했다고 증언했다. VIP방문 이후, 해경은 두 명의 신규 민간잠수사를 무리하게 합류시켰다 현장 상황에 미처 적응하지 못한 한 명 이광욱 잠수사가 공기 공급 호스가 끊겨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며 그의 사망 책임을 민간잠수사에게 돌리고 민간잠수사 리더격인 공우영 씨를 과실치사 혐의로 고발하게 된다.
자칫 잠수사들이 이 회사와의 결탁이 있었다, 그리고 민간잠수사들 일당이 100만원이며 시신 1구 수습 시 500만원이라는 터무니 없는 얘기가 당시 청와대 대변인에게서 나오기도 했다. 묵묵히 수습 작업에 몰입하던 잠수사들도 분노하며 장비를 챙겨 현장을 떠나고자 했으나, 해경과 해수부 고위급 인사들이 달려와 사정하며 만류했고 유족들의 간절한 마음들을 외면할 수 없어 7월까지 동료 잠수사들은 현장을 지켰다고 한다.
당신들이 우리 아이들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잠수사들이 수습작업을 벌이던 중 유가족들의 현수막 글.
7월 10일 세월호 수색 및 수습 현장은 해양경찰청에 해고 문자 통보에 그들의 3개월에 걸친 행보는 멈추었었다. 해경은 잠수 방법을 바꾸기로 했고 '끝까지 우리와 함께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 7월 15일 산업재해에 준하는 치료와 보상을 약속했다 같은 달 30일 치료비 정부지원은 중단되었다.
광장에서는 세월호의 진실을 요구했고 정부는 이들을 여론으로부터 격리하고 세월호참사는 정권의 희생양으로 정치적으로 이용되었고, '민병대와 같았던' 민간잠수사들을 수색 작업에서 돌아온 후 각종 부상과 트라우마로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당시 해경과 해수부 간부들은, 노고를 잊지 않겠다 꼭 보상하겠다 공수표를 남발했지만 승진을 하거나 정권이 끝나자 자신들이 소관이 아니라며, 이들은 공무원이 아니므로 아무런 보상에 대한 책임도 지지 않았다.
2015년 2월 통증 치료 등 일부 비용 정부지원은 재개되었다 다시 3월29일 중단되고 말았으며 이광욱 잠수사 유가족과 416연대 등 해경 간부 3명을 업무상 과실 치사 혐의로 고발했으나 서울중앙지검은 고발 건을 각하했고, 그 해 12월14일~16일 열린 '세월호참사 진상 규명 청문회' 에서 전광근 잠수사와 고 김관홍 잠수사는 참고인석에서
"아직까지 세월호에서 못 올라온 아홉 구의 실종자들을 아직도 가슴의 묻어두고 있습니다. ...저희가 그만큼 열심히 해드렸고 많은 유가족들한테 미안하다고 또 친구들한테 끝까지 다 못 해줘서 미안하고..."
정작 기억나지 않는다며 발뺌하던 해경 간부들과 많은 책임자들은 아무도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사과를 하지 않았고 유일하게 진심으로 사과를 전한 전광근 잠수사에게 청문회를 지켜보던 유가족들이 울음과 박수를 동시에 떠뜨렸다고 한다.
민간잠수사들은 ‘골괴사’라는 병으로 인해 천직으로만 알았던 잠수를 할 수 없게 되었고, 수습 현장에서 힘들게 사투를 보낸 일들이 불현듯 생각나면 불면, 우울, 분노 등 트라우마 증상들이 재현되어 힘든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평범한 가장이며 식구들의 밥벌이를 위해 잠수를 하는 직업 잠수사이다. 일상을 살았더라면 국가가 제대로 구조 시스템 작동했다면, 위정자들에게 맡기고 자신들이 있어야 할 곳에서 일했더라면, 설사 거기에서 다치더라도 산업재해로 인한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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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이성을 붙잡고 다 읽을 수 있을까? 아니 심연과 같은 그 날의 기억으로 갔다가 다시 되돌아 올 수 있을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세월호 잠수사 12인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사고 이후 현행 법은? 그들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지?? 계속적으로 이성적이고 합리적 질문을 할 수 있었다. 2020년 항소심 끝에 공우영 잠수사의 과실치사 혐의 대법원 무죄가 선고되고(5년이 걸림), 김관홍법(4.16세월호참사 피해 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 일부 개정법률안)등의 제정과 시행 그리고, 시민들의 관심과 잠수사 영화 <로그 북>, 그리고 12월 이 책의 첫 발간으로 북 콘서트와 언론의 관심 등으로 적지 않은 성과가 있었다.
2019년 1차 발간되고, 재출간되어 올해에 다시 나왔으며, 경기-안산 통합재난심리지원단이 '안산정신건강트라우마센터(안산온마음센터)'로 전환하여 세월호참사 피해자들의 위해 노력해 오고 있고 영화로 잠수사들의 일지가 기록되는 일들이 참 다행이다. 7년 전 멍한 채 바라보던 끔찍한 뉴스와 악몽들이 두고두고 귀감이 되어 오늘의 우리에게 경고의 메세지를 전해주고 있어 다행이다.
이 리뷰는 출판사 생각나눔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으나 개인의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