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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옳은가 - 궁극의 질문들, 우리의 방향이 되다
후안 엔리케스 지음, 이경식 옮김 / 세계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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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여러 윤리적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려면 절대주의를 버리고 하나의 개념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좌우라는 정치적 이분법에는 없는, 세대 인종 종교 사이에서 우리가 벌이는 문화전쟁에는 없는 바로 이 개념, 겸손 말이다.”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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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말하려는가? 그 전에 스스로에게 세 가지를 질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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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나는 얼마나 실감하고 있는가? 나는 그 문제로 얼마나 아파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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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가지 질문에 대답을 모두 "정의를 말할만큼 충분히!"라고 외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중 한가지 정도에는 당당하게 외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으로 '정의'를 말하는 자가 될 수 있을까? 더군다나 '나는 이미 모두 알 고 있다'라는 오만한 자의식이 '나는 그 문제로 충분히 아파했다'라는 고백으로 이어지는 경우를 적어도 나는 본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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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에 대한 문제에서 윤리에 대한 문제로 넘어와보자. <무엇이 옳은가-궁극의 질문들, 우리의 방향이 되다>의 저자 후안 엔리케스는 지금 우리가 '옳다'고 외치는 윤리를 한발짝 떨어져서 볼 것을 권유한다. 우리가 윤리라고 말하는 것, 타인과의 관계에서 '옳은' 행동, '옳은'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정말 옳은가. 결국 정의란 시대가 만들어내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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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보니 이런 제목의 저자 인터뷰 기사가 있다. <미래세대에게 우리는 '야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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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엔리케스는 우리가 '옳다'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를 책 전체를 들어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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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는 기술의 문제이다. 기술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감각을 확장하여 우리의 사고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다. 유전자 가위와 인간 편집 기술, 체외수정과 '생식' 개념의 근본적 변화, 초고지능의 인공지능의 등장, 동성애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세포나 염기서열이 없다는 과학적인 발견... 이런 기술들은 '인류'라는 신화를 무너트리고,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지경이 얼마나 광대하고 거친지를 알려주며 그 기술이 없던 시대의 윤리를 송두리째로 바꾸어놓는다. 한마디로 우리의 지금 상태, 지금의 생각을 위해 100년 후엔 어떤 보증인도 남아있지 않을 거라는 말이다. 강산이 10년만에 변한다고 했던가. 강산이 변하면 우리가 보는 풍경이 달라지고, 우리가 아는 것에 따라 윤리와 정의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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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계층 이동과 시스템의 문제이다. 특히 이 대목에서 후안 엔리케스는 '그럼에도 옳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보몰의 비용병폐이론을 들어서 계층간 이동을 막고 생명정치를 추동하는 시스템의 비윤리성을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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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흐름과 관계 없이 생산성은 거의 제자리지만 비용은 꾸준하게 오르는 분야가 많이 존재한다. 이런 상황을 보몰의 비용 병폐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 중상류층으로서의 진입 기회, 즉 부자가 될 기회를 잡으려면 좋은 교육을 받아야 하고 건강한 신체를 유지해야 하며 자녀를 잘 돌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바로 이런 것들이 보몰의 비용 병폐에 가장 쉽게 발목 잡히는 부문들이자 엄청난 시장왜곡이 발생하는 부문이다.”

-pp.23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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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을 독점하고 있다가 그들이 그것을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할 때 훨씬 더 높은 가격에 파는 행위는 매우 비양심적이며 비윤리적이다. 그러나 보몰의 비용 병폐 이론이 작동하고 있는 여러 분야에서는 비윤리적이게도 우리 스스로 이것을 허용하고 있다.”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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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은 말하자면 기회의 평등에 대한 것이다. 평등이라는 말, 공정이라는 말이 그 어느때보다 왜곡된 의미로 사용되는 2022년 한국에서 반드시 숙고해야 할 것이 기회의 평등일 것이다. 자신은 마치 영원히 건강하고, 영원히 부유할 것처럼, 올림포스 산의 신전에 사는 신들처럼 고약한 인간들은 이러한 '비윤리성'에 대해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정당하게 살아왔고, 이런 내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되는 거야. 하지만 그들은 화초를 늘 따뜻하고 풍족한 조건에서 자라도록 해주는 아늑한 '온실'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식물들이 사라지고 불태워지고 뿌리뽑혔는지 알지 못한다. 저자 후안 엔리케스는 얼핏 보면 도덕 상대주의자처럼 보이지만 시스템의 문제에서만큼은 비판의 날을 세운다. 옳고 그름을 따질만한 문제도 아닌 것이다. 미래세대에게 자신을 이입해볼 것도 없이, 야만스러운 행태는 이미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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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는 '시대인식'의 힘이다. 이 대목에서는 특히 정신질환자들의 범죄에 관한 윤리적 딜레마가 다뤄진다. 온갖 끔찍한 일을 저지른 사람에게 엄벌을 내리는 일은 사회의 균형과 국민의 법감정에 대응하는 수준에서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들의 범죄가 기술 발달과 그에 수반한 인식 변화에 따라 변명 가능혹은 오히려 보호받아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데 이른다면 우리는 그들의 범죄 행위에 대해 도대체 어떻게 정의를 말할 수 있을까. 아프다는데, 제정신이 아니었다는데.. 더군다나 감옥운영의 비즈니스적인 측면들 곧 수감자 수에 따른 지원금 수령이나 수감자 가족들의 초과 지출과 직결된 체제 문제까지 우리가 알아버렸다면?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난제라는 데 아마 대부분이 동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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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겸손'이라는 핵심어가 도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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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즉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관행들은 앞으로 얼마든지 개선될 서 있다는 마음을 집단적으로 가져야 한다.”

-p.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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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는 늘 변한다. 윤리는 개선된다(이 점은 저자의 희망사항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필연적으로 미래의 어느 한 세대에게 비윤리적인 자들이 된다. 역사를 망치고 환경을 망친 주범. 장애인과 LGBTQIA를 혐오하고 차별했던 미개한 독불장군. 저자는 이런 미래 세대의 평가를 피할 수는 없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렇게 호소하고 있다. “그러니 겸손하자라고. 저자는 여기에 몇 가지 조건을 덧붙인다. “집단적으로 겸손하자라는 말은 곧 겸손을 아는 세대, 자신의 윤리가 절대적일 수 없음을 알고 겸허히 한계를 받아들이는 세대를 구성하자는 요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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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의 확산으로 우리가 새삼 알게 된 사실이 정말 많다. 그중 가장 극적인 사실 하나는 전세계 인간들의 몸이 모두 연결되어있다는 것일 테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 아니, 옷깃을 스치면 밀접 접촉자다. 우리는 그 스친 옷깃 때문에 병에 걸린다. 영구적인 신체 손상을 입거나 죽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연결의 감각에서 한 가지 중요한 태도가 추가되어야만 파국을 막을 수 있다. 나는 그것이 저자가 겸손이라 말한 것과 통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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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가 걸리니까 나도 걸렸잖아! 라는 말은

네가 걸리면 나도 걸리니 너도 병에 걸리지 마 라는 문장으로 바뀌어야 하고

나아가 이 문장은

내가 병에 걸리면 네가 병에 걸리니 나도 병에 걸리지 않을게라는 한줄로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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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만약 이 책으로 강의를 한다면 정말 한 학기 내내 이 한권으로만 토론 수업을 진행할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토론거리가 제시되어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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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오지 않은 시 - 포스트휴먼 시대 시의 미래
공현진 외 지음 / 소명출판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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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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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오지 않은 시>>, 공현진, 백선율, 성현아, 윤은성, 이경수, 황선희, 소명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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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위해 개발된 인공지능 기술이 인간에게 위협적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인간보다 바둑을 잘 두는 인공지능, 인간이 수백 년 축적한 이론과 기법을 며칠만에 학습해서 듣기 좋으면서도 독창적인 음악을 작곡하는 인공지능, 소설을 써서 공모전 예심을 통과하는 인공지능, 그 다음은 뭘까. 인공지능 발전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지루한 질문, ‘로봇과의 연애가 가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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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이 주는 언캐니Uncanny, 운하임리히Unheimlich는 다만 인간과의 상사성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알고리즘 설계를 따라서만 움직이는 약인공지능의 시대가 스스로 학습하고 성능 업데이트를 진행하는 강인공지능의 시대로 넘어갈 때, 인간이 느끼는 '위협'은 가히 절멸의 공포에 맞먹는다. 하지만 그 '절멸'의 공포는 한편으로는 조금 우스운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전능하기를 꿈꾸었던 휴머니즘의 거울쌍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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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휴먼-팬데믹이라는 이중의 구속 안에서 우리는 머지않아 인간의 인간다움마저 초과될 것만 같은 악몽에 저마다 조금씩 가위눌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바로 그 우왕좌왕함과 서성거림, 모자람, 비합리성 때문에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다. 어떤 결핍을 발견할 때마다 '인간적이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시는 가장 인간적인 장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황선희, <상실을 다루고, 나누고, 간직한 채 넘어서(지 않)>,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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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더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인공지능의 기술력이 아니라 인간의 폭주와 무절제다.

-이경수, <포스트휴먼 시대 시 교육의 역할과 방향>,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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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놀로지와 융합하고, 접속하고, 자꾸 새로운 생명이 되어가는가능성의 지대. 포스트휴먼과 트랜스휴먼을 생각하는 기술적인 논의는 인간 신체의 문제와 기계와의 공존, 나아가 기계로서의 신체를 생각하게 한다. 이미 스마트폰과 밀접하게 접속해버린 우리의 몸-스마트폰과, 마셜 매클루언의 표현처럼, '신체의 연장으로서의 미디어'개념으로부터 출발하자면, 그 끝에는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 조건이 무엇인지에 관한 최종심급의 질문이 남아있다. 만약 우리가 인간이기 위해 '이것'하나만을 남겨야 한다면 무엇을 남겨야 할까. ? 심장? 팔과 다리? ? 아니면 정신? 기억? 데이터? 무엇이 당신인가. 무엇이 인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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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의 논리가 누군가에게는 배제의 논리로 작동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우리의 '바깥'을 환하게 펼쳐 놓으려는 시도와 노력들을, 우리는 시를 통해 만날 수 있다. (...) 더욱, 우리가 '인간'이라고 여기던 것들이 생경하게 느껴지기를 바란다.

-공현진, <세숫비누 일곱 개의 인간>, pp.116~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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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질문을 포스트'휴머니즘'의 차원, 곧 로지 브라이도티가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이라 이름붙인 논의로 끌어간다면 우리는 '휴먼'의 범주 자체를 숙고하게 된다. '포스트휴먼'이즘이 우리에게 미래사회에 대한 기대감과 동시에 어떤 '갑갑함'을 준다면, 포스트'휴머니즘'은 당혹감과 죄책감(윤리)을 불러일으킨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신했던 인류가 실은 다른 모든 동물, 식물, 자연물, 심지어 쓰레기 더미와 같은 "물질"이며, 세계란 그 모든 물질들의 관계와 뒤얽힘이며, 우리가 그동안 (문자로 기록된)역사 발전의 주체로 여겨온 인간이 실은 "잘 구성된 무기물"(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일 뿐임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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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휴머니즘의 질문들은 신의 질서로부터 빠져나와, 종교심의 중요한 한 근원인 '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실증주의로 극복하고, 인간의 질서를 다시 세우려 했던 근대의 심원을 뒤흔든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동시에 우리는 모든 것이다. 계몽의 시대Age of Enlightenment를 지나 마주친 포스트휴먼의 아포리아 앞에서 '인류'는 아니 물질은 다시 암흑의 시기에 들어서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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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라는 자기한정성을 내재한 답변을 뒤집고 '또한' 그러하다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도록 기능하는 시는 여성, 퀴어, 트랜스젠더 등의 소외된 집단이 자신의 죄성을 향한 의심을 거두게 한다. (...)주체가 되지 못했던 ''들이 서로의 고통에 적극 감응하며 그 고통이 실재함을 보증해주고,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성현아, <죄성을 극복하는 비인간의 ''>, p.15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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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계몽의 근대를 ''으로, 포스트휴먼 이후의 시대를 '암흑'으로 분류하기에는 계몽의 찬란한 빛이 뿌리 깊은 혐오와 배제를 연료 삼아 타올랐음이 포스트휴먼/탈근대의 논의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근대는 윤리의 이름을 독점한 젠더와 입법권력에 의해서(주디스 버틀러), 또한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이라는 범주 밖의 존재들, 이를테면 여성과 장애인 동물과 식물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로지 브라이도티, 수나우라 테일러), 혹은 인간만이 모든 행동의 주체임을 선언했던 (가여운)오만함에 의해서(제인 베넷)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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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새로운 불을 밝힐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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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일차적으로는 언어라는 질료로 구성되지만, 무엇보다 언어라는 규범으로는 표현하지 못할 언어 밖의 영역을 향해 계속해서 자신의 몸을 열고자 하는 장르이다.

-윤은성, <관계성을 고민하는 생성의 언어>,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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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명의 시 연구자가 함께 기획한 <아직 오지 않은 시>는 포스트휴먼 시대에 관한 기술적 고찰로부터 출발하여, 포스트휴먼 시대의 존재론을 거쳐, 타자와의 관계와 연대를 사유한다. 그 중심에는 '쓰는 주체'와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고 여겨지는 '' 장르의 살핌과 분석이 놓여있다. 인공지능이 시를 쓰는 시대는 머지않아 도래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를 쓰는 인간은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강한 믿음으로, 다섯 명의 공저자는 근대적 휴머니즘 바깥에서 시가 이어나갈 미래와 시가 열어줄 새로운 관계성(때로는 새로운 정의)에 대해 그들의 견해를 눌러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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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시는 인간을 말하기 위해서 혹은 인간이 이해한 대로 인간 아닌 존재가 지닌 생기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럴 수 없음을 고백하고 인간 스스로를 반성할 뿐이다. (...) '인간적'인 생각이 무너지는 장면 속에서 우리는 인간이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인간 아닌 존재들의 다양하면서도 고유한 힘과 마주하게 된다.

-백선율, <불순한 혼종들을 위한 잡상>,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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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1부와 3부의 집필을 맡은 이경수는 시의 존재의미에 사람들이 표하는 우려에 일정부분 동의하면서도 오히려 '공감'이라는 시의 본질에 집중하여 시와 시 교육이 가야할 길을 제시한다. 그 길은 무엇보다 차별과 혐오를 벗어나는 힘으로서의 공감능력의 역설이고, 공감능력을 회복할 방법으로서의 시 쓰기/읽기의 필요성 강조, 그리고 '새로운 독자'들의 역능의 인정이다. 2부를 구성한 공현진, 성현아, 황선희, 윤은성, 백선율의 글은 각각 비주체, 젠더, 감정, 언어, 이미지의 차원에서 포스트휴머니즘과 작금의 시가 연결되는 지점을 탐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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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사회를 구축하고 우리 자신의 공감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일, 그리고 시에 의미화 바깥의 잉여의 자리를 끊임없이 만들어 가는 일이다. 그리하여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시를 패배주의에 반대하는 태도로 쓰는 일, 인공지능과 싸우다가 괴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시의 정신에 입각해 인공지능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타자 존중의 사회를 만들어 가는 일에서 인공지능 시대 시의 가능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시적 정의'를 우리 사회에 구현하고 더 나아가 시와 우리의 삶을 구원해 줄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다.

-이경수, <인공지능 시대 시의 윤리와 시적 정의>,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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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인상적이었던 것은, 시에 대한 탐구인 이 한 권의 '학술서'로부터 힐링 에세이와 정치 선언문, 자기계발서와 서평집의 효능을 모두 느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시라는 장르가 가진 고유의 힘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시를 쓰고 싶은 마음도 시를 읽고 싶은 마음도, 그리고 누군가에게 시집 한 권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도 생기는 책이다.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시를 패배주의에 반대하는 태도로 쓰는 일, 인공지능과 싸우다가 괴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시의 정신에 입각해 인공지능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타자 존중의 사회를 만들어 가는 일에서 인공지능 시대 시의 가능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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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움 - 예술과 철학의 질문들
백민석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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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민석의 소설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16믿거나말거나박물지>>와 <<공포의 세기>>, <<해피 아포칼립스!>>를 읽으면서 백민석과 ‘예술’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특히 추함과 그로테스크가 줄 수 있는 사유의 틈새를 정확히 노려 찌르는 작가였다. 백민석의 소설을 즐겨 읽다보면 허무주의자가 되거나 오히려 아나키스트가 될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도 했었더, 내게 그는 쌓는 작가라기보다는 부수는 작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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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민석의 ‘소설 쓰기’ 혹은 ‘예술 전반’에 가지고 있을 창작론 혹은 예술관이 궁금해진 건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 역시도 언제나 부수는, 그러나 무해한 예술을 고민해왔기 때문이었다. 카톡이든 인스타든 언제나 프로필에 걸어두는 ‘똑똑해지되 살벌해지지 말것’이라는 말은 무해함에 관한 것이고, ‘쉬워지되 시시해지지 말것’은 부숨에 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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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내게 백민석의 신간 에세이 <<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움>>은 선물같은 책이었다. 간혹 들어오는 감사한 서평 요청에 모두 응답할 여유가 없음에도 RHK의 제안을 수락했던 건 백민석의 예술관과 그만의 심미안을 엿보고 싶은 궁금증 때문이었다. 소설, 영화, 미술, 음악을 넘나드는 작가의 예술편력은 나에게 한 가지 공통된 질문을 남겼다. 우리는 예술을 왜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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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라는 술어에 나는 예술가의 창작뿐 아니라 관객/독자/청자의 능동적인 수용 행위까지를 포괄하려한다. 결국 전시는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일이고, 책은 내용을 가장 잘 전달하기 위한 매체일진대 예술 ‘하기’에서 수용자를 배제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예술은 도무지 쓸모가 없다. 예술은 우리의 삶에 어떤 축적도 잉여생산물도 발생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예술을 하기 위해 만만찮은 비용을 낸다. 티켓을 사고, 책을 구입하며, 시간을 쓴다. 도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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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답일 수도 있겠다. 새로움, 어떤 것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태도, 모든 ‘평범’을 의심하는 마음가짐, 아니 어쩌면 마음의 평온함, 몸의 이완, 세계와 일체가 된 듯한 합일감… 그리고 거기서부터 키워나가는, ‘삶의 역량’… 백민석 역시 이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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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민석은 그중 어떤 것도 틀리지 않았으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 반복적인 존중은 오히려 하나의 압도적이고 아름다운 해석을 무너트린다. 그의 미학 에세이는 이론으로 후려치는 류의 학술적인 글쓰기라기보다 자신의 예술 ‘하기’에 대한 진솔한 일기에 가깝다. 그리고 나는 백민석의 견해에 동조하거나 반대한다. 분명한 건 그의 글이 나를 예술 ‘하도록’ 독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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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이 책은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나 <<정확한 사랑의 실험>>과 닮았다. 하지만 백민석과 신형철의 스타일은 다르다. 신형철은 작품을 해부하여 능수능란한 집도의처럼 ‘최선의 답’을 찾아낸다. 그만의 놀랍도록 정확한 표현력과 문장력이 이때 빛을 발한다. 신형철은 그만의 미학을 착실히 쌓아올린다. 그의 글을 읽으면, 나도 신형철처럼 영화를 ‘보아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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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백민석은 작품을 겉부터 속까지를 차근차근 무너트린 후에 그대로 둔다. 거기에 자신의 견해를 조금 첨가하는 데서 그의 에세이는 그친다. 대신 작가는 자신의 소설 작품으로 또다른 예술을 지어올린다. 이 단계는 모든 독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부여된 숙제처럼 느껴진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나도 뭔가를 써야겠다고, 쓰기를 멈추지 말자고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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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마치 미학 에세이의 건축가와 혁명가 같다. 하지만 ‘끝끝내 이해하려는 치밀한 노력’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자체의 잔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는 분명 모두 소중한 예술 ‘하기’의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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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말하자면, 연구자로서 전자를, 소설가 지망생으로서 후자를 지향해야하는 입장이다. 어렵고도 어렵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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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비메탈 계보도 - 1970~90년대를 관통하는 헤비메탈을 추억하다
사은국 지음 / 도서출판 11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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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인스타 스크롤을 내리다가 ‘덕질’에 관한 명확한(!) 분류를 보았다. 일반적인 ‘애호’의 단계는 정규 콘텐츠를 다 소비했을 때 끝나지만, 덕질은 시리즈가 끝났을 때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것이다. 너무 공감되는 말이라 내 지난 ‘덕질’들을 그 분류법에 한참 동안 대입해보며 즐거워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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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는 끝난다. 시대도, 작품도, 연예인 혹은 작가의 활동 기간도 언젠가 끝난다. 시리즈의 방영 기간과 연예인의 활동기에 ‘동시대적으로’ 호흡할 수 있었다면 덕후로서는 그만한 자랑거리가 또 없겠지만, 시공간의 차이는 덕질의 확산을 결코 막을 수 없다. 덕질은 일상이 되고 인생의 한 시절에 넓고 깊게 스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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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지 돌아갈 ‘마음의 고향’은 그렇게 마련된다. 출퇴근과 마감이라는 일상적 독소에 찌들어 사는 중, 이 ‘나만의 영토’에 문득 발을 들여놓으면 왠지 모르게 눈물겨운 환대를 받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것은 저자의 표현처럼 “몸과 정신에 쌓였던 독소가 쫙 빠지는 짜릿한 경험”일 때도 있고, 펑 하고 눈물이 솟구칠 듯한 격한 감정을 동반할 때도 있다. 마들렌과 홍차 향기를 맡은 것처럼, 특정 영화/노래/가수/책/장르와 함께한 기억들이 폭풍처럼 되살아나면 우리는 거기에 그날의 기억을 얹는다. 그 결과 덕질은 점차 내 인생의 모습을 닮아간다. 그러므로 모든 덕질은, 컬렉션은 같을지라도, 제각각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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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가 끝나고 덕질이 시작된다면 그 첫 자리에 ‘계보’를 향한 열망이 있다. 해덕(해리포터 덕후)들에게는 해리포터만큼이나 그의 부모와 선대의 이야기, 호그와트의 역대 교장들의 이름과 행보가 중요하다. 문학 덕후들에겐 작가들 간의 영향 관계를 알아가고, 머릿속에 나름의 문학사를 구성하는 것이 동시대의 작품을 읽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다. 지금 내가 푹 빠져있는 것들의 뿌리를 알고 싶은 열망은 때로 취향에 대한 책임감을 자극하는데, 그 과정은 ‘메모와 반복 학습’이라는 공부의 형태로 종종 연결된다. 그러므로 “마니아의 20년 노트”라는 문구를 달고 출간된 『헤비메탈 계보도』는 비록 객관적인 정보와 지식 나열이 위주인 책이지만 그 자체로 한 권의 ‘일기’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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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대넓얕』 표제의 ‘지적 대화를 위한’이라는 표현에서 책의 두 가지 목적을 읽어낼 수 있다. 하나는 이 책을 읽고 잘난척(꼰대질)을 좀 해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책에 나열된 단편적 지식을 미끼 삼아 주변의 ‘진짜 덕후’를 낚아 올리라는 것이다. 이 중 후자의 목적이 제대로 달성된다면 우리는 그제서야 진정한 ‘지적 대화’에 참여하게 되고, 한 장르와 분야의 정수를 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대넓얕』 류의 책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연구라기보다는 덕후의 ‘컬렉션북’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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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평범한 직장인”이자 “메탈 헤드(메탈 음악 마니아)”로 규정한 사은국 작가는 『헤비메탈 계보도』라는 자신의 콜렉션북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렇기에 ‘메탈 계보에 이 밴드가 빠졌다니’와 같은 탄식은 책의 성격에 대한 곡해다. (근데 왜 메가데스가 ‘그 외 밴드’인가.. ㅂㄷㅂ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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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전문 음악 평론가도 아니고 음악을 업으로 삼지도 않지만, 뉴욕 반스앤노블에 빼곡히 꽂힌 록 음악 서적을 보고 사무치는 부러움을 느꼈다는 고백에서 메탈에 대한 순수한 진정성을 감지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헤비메탈 계보도』의 뜨거운 에너지는 증명된 것이 아닐까. 통권으로 읽어버리기보다는 한 권의 자료집으로 소장하고 틈틈이 꺼내 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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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냉정 - 난폭한 세상에 맞서는 우리의 자세
박주경 지음 / 파람북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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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경 작가의 <<따뜻한 냉정>>은 문유석 작가의 <<개인주의자 선언>>과 함께 읽음직한 에세이집이다.


문유석과 박주경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진 저자다. 그들은 ‘민족’이나 ‘우리가 남이가’ 식의 뭉뚱그림이 집단력을 이끌어내던 시대가 끝났음을 일찌기 알아차린 ‘기성세대’다. 여기서 이미 두 권의 글모음집은 닮을 운명이었다.


두 사람은 정이 주는 따스함과 치유력을 기억하는 동시에, 그것이 어떤 난폭한 모습으로 변질되어 현대인들을 괴롭히고 있는지 알고있다. 자연스럽게 문유석과 박주경 작가의 글은 집단주의의 폭력성 속에서 개인을 찾아내면서도, ‘정’이라는 가치를 지켜낼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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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개인주의자 선언>>과 <<따뜻한 냉정>>이 제시한 방법은 무엇인가? 리뷰의 표제에서 암시했듯, 두 작가는 ‘개인주의’가 집단주의의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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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경 작가는 <<따뜻한 냉정>>의 주장들에 기자로서 현장에서 겪었던 일들과 앵커로서의 소회를 근거로 들고 있다. 가장 생생하고 명징한 증언이자 증명이다. 그 속에는 회식 문화 속에서 고초를 겪어야 했던 막내(사실상 좌장을 제외한 모두)들의 이야기와, 상처입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고찰, 그리고 타인의 고통을 더 자극적인 ‘그림’으로 전시할 뿐, 정작 ‘질문’은 던지지 않는 게으른 언론에 대한 고발과 언론인으로서의 반성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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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박주경 작가의 문투와 감각 또한 전혀 낡지 않았다. 평소 SNS로 팔로워들과 활발히 소통하는 그인만큼 일화 소개나 신조어 사용(가히 독보적...)도 지루하거나 고루하지않다. <<따뜻한 냉정>>이 사실상 ‘개인주의를 내면화하고 살아가게 될 청년 세대’에게 던지는 응원의 메세지인 만큼 이런 세심한 부분들은 글 전체에 힘을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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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주의와 개인주의는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내가 가장 중요하니, 남은 어떻게 되든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기주의라면 개인주의에는 ‘나 만큼이나 남도 존중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깔려있다. 따라서 개인주의 대신에 ‘탈카르텔’이라는 표현을 써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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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박주경 작가의 <<따뜻한 냉정>>을 통해 우리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기본 전제부터 다른 것임을 재확인하게 된다. <추천의 글>에서 김훈 작가가 쓴 ‘박주경의 글은 듣기를 포함하는 말하기이다’라는 표현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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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주의의 전제는 ‘혼자’라는 차가움이지만 개인주의의 전제는 ‘함께’라는 온기다. ‘함께’속에 있을때만 개인의 공간(혹은 ‘방’)이 성립할 수 있는 까닭이다.

증오의 뜨거움이나 냉소의 차가움이 아닌 희망의 따뜻함. 그 적정 온기가 절실한 시대입니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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