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움 - 예술과 철학의 질문들
백민석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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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민석의 소설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16믿거나말거나박물지>>와 <<공포의 세기>>, <<해피 아포칼립스!>>를 읽으면서 백민석과 ‘예술’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특히 추함과 그로테스크가 줄 수 있는 사유의 틈새를 정확히 노려 찌르는 작가였다. 백민석의 소설을 즐겨 읽다보면 허무주의자가 되거나 오히려 아나키스트가 될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도 했었더, 내게 그는 쌓는 작가라기보다는 부수는 작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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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민석의 ‘소설 쓰기’ 혹은 ‘예술 전반’에 가지고 있을 창작론 혹은 예술관이 궁금해진 건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 역시도 언제나 부수는, 그러나 무해한 예술을 고민해왔기 때문이었다. 카톡이든 인스타든 언제나 프로필에 걸어두는 ‘똑똑해지되 살벌해지지 말것’이라는 말은 무해함에 관한 것이고, ‘쉬워지되 시시해지지 말것’은 부숨에 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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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내게 백민석의 신간 에세이 <<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움>>은 선물같은 책이었다. 간혹 들어오는 감사한 서평 요청에 모두 응답할 여유가 없음에도 RHK의 제안을 수락했던 건 백민석의 예술관과 그만의 심미안을 엿보고 싶은 궁금증 때문이었다. 소설, 영화, 미술, 음악을 넘나드는 작가의 예술편력은 나에게 한 가지 공통된 질문을 남겼다. 우리는 예술을 왜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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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라는 술어에 나는 예술가의 창작뿐 아니라 관객/독자/청자의 능동적인 수용 행위까지를 포괄하려한다. 결국 전시는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일이고, 책은 내용을 가장 잘 전달하기 위한 매체일진대 예술 ‘하기’에서 수용자를 배제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예술은 도무지 쓸모가 없다. 예술은 우리의 삶에 어떤 축적도 잉여생산물도 발생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예술을 하기 위해 만만찮은 비용을 낸다. 티켓을 사고, 책을 구입하며, 시간을 쓴다. 도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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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답일 수도 있겠다. 새로움, 어떤 것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태도, 모든 ‘평범’을 의심하는 마음가짐, 아니 어쩌면 마음의 평온함, 몸의 이완, 세계와 일체가 된 듯한 합일감… 그리고 거기서부터 키워나가는, ‘삶의 역량’… 백민석 역시 이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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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민석은 그중 어떤 것도 틀리지 않았으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 반복적인 존중은 오히려 하나의 압도적이고 아름다운 해석을 무너트린다. 그의 미학 에세이는 이론으로 후려치는 류의 학술적인 글쓰기라기보다 자신의 예술 ‘하기’에 대한 진솔한 일기에 가깝다. 그리고 나는 백민석의 견해에 동조하거나 반대한다. 분명한 건 그의 글이 나를 예술 ‘하도록’ 독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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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이 책은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나 <<정확한 사랑의 실험>>과 닮았다. 하지만 백민석과 신형철의 스타일은 다르다. 신형철은 작품을 해부하여 능수능란한 집도의처럼 ‘최선의 답’을 찾아낸다. 그만의 놀랍도록 정확한 표현력과 문장력이 이때 빛을 발한다. 신형철은 그만의 미학을 착실히 쌓아올린다. 그의 글을 읽으면, 나도 신형철처럼 영화를 ‘보아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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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백민석은 작품을 겉부터 속까지를 차근차근 무너트린 후에 그대로 둔다. 거기에 자신의 견해를 조금 첨가하는 데서 그의 에세이는 그친다. 대신 작가는 자신의 소설 작품으로 또다른 예술을 지어올린다. 이 단계는 모든 독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부여된 숙제처럼 느껴진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나도 뭔가를 써야겠다고, 쓰기를 멈추지 말자고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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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마치 미학 에세이의 건축가와 혁명가 같다. 하지만 ‘끝끝내 이해하려는 치밀한 노력’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자체의 잔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는 분명 모두 소중한 예술 ‘하기’의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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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말하자면, 연구자로서 전자를, 소설가 지망생으로서 후자를 지향해야하는 입장이다. 어렵고도 어렵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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