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비메탈 계보도 - 1970~90년대를 관통하는 헤비메탈을 추억하다
사은국 지음 / 도서출판 11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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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인스타 스크롤을 내리다가 ‘덕질’에 관한 명확한(!) 분류를 보았다. 일반적인 ‘애호’의 단계는 정규 콘텐츠를 다 소비했을 때 끝나지만, 덕질은 시리즈가 끝났을 때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것이다. 너무 공감되는 말이라 내 지난 ‘덕질’들을 그 분류법에 한참 동안 대입해보며 즐거워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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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는 끝난다. 시대도, 작품도, 연예인 혹은 작가의 활동 기간도 언젠가 끝난다. 시리즈의 방영 기간과 연예인의 활동기에 ‘동시대적으로’ 호흡할 수 있었다면 덕후로서는 그만한 자랑거리가 또 없겠지만, 시공간의 차이는 덕질의 확산을 결코 막을 수 없다. 덕질은 일상이 되고 인생의 한 시절에 넓고 깊게 스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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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지 돌아갈 ‘마음의 고향’은 그렇게 마련된다. 출퇴근과 마감이라는 일상적 독소에 찌들어 사는 중, 이 ‘나만의 영토’에 문득 발을 들여놓으면 왠지 모르게 눈물겨운 환대를 받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것은 저자의 표현처럼 “몸과 정신에 쌓였던 독소가 쫙 빠지는 짜릿한 경험”일 때도 있고, 펑 하고 눈물이 솟구칠 듯한 격한 감정을 동반할 때도 있다. 마들렌과 홍차 향기를 맡은 것처럼, 특정 영화/노래/가수/책/장르와 함께한 기억들이 폭풍처럼 되살아나면 우리는 거기에 그날의 기억을 얹는다. 그 결과 덕질은 점차 내 인생의 모습을 닮아간다. 그러므로 모든 덕질은, 컬렉션은 같을지라도, 제각각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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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가 끝나고 덕질이 시작된다면 그 첫 자리에 ‘계보’를 향한 열망이 있다. 해덕(해리포터 덕후)들에게는 해리포터만큼이나 그의 부모와 선대의 이야기, 호그와트의 역대 교장들의 이름과 행보가 중요하다. 문학 덕후들에겐 작가들 간의 영향 관계를 알아가고, 머릿속에 나름의 문학사를 구성하는 것이 동시대의 작품을 읽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다. 지금 내가 푹 빠져있는 것들의 뿌리를 알고 싶은 열망은 때로 취향에 대한 책임감을 자극하는데, 그 과정은 ‘메모와 반복 학습’이라는 공부의 형태로 종종 연결된다. 그러므로 “마니아의 20년 노트”라는 문구를 달고 출간된 『헤비메탈 계보도』는 비록 객관적인 정보와 지식 나열이 위주인 책이지만 그 자체로 한 권의 ‘일기’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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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대넓얕』 표제의 ‘지적 대화를 위한’이라는 표현에서 책의 두 가지 목적을 읽어낼 수 있다. 하나는 이 책을 읽고 잘난척(꼰대질)을 좀 해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책에 나열된 단편적 지식을 미끼 삼아 주변의 ‘진짜 덕후’를 낚아 올리라는 것이다. 이 중 후자의 목적이 제대로 달성된다면 우리는 그제서야 진정한 ‘지적 대화’에 참여하게 되고, 한 장르와 분야의 정수를 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대넓얕』 류의 책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연구라기보다는 덕후의 ‘컬렉션북’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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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평범한 직장인”이자 “메탈 헤드(메탈 음악 마니아)”로 규정한 사은국 작가는 『헤비메탈 계보도』라는 자신의 콜렉션북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렇기에 ‘메탈 계보에 이 밴드가 빠졌다니’와 같은 탄식은 책의 성격에 대한 곡해다. (근데 왜 메가데스가 ‘그 외 밴드’인가.. ㅂㄷㅂ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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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전문 음악 평론가도 아니고 음악을 업으로 삼지도 않지만, 뉴욕 반스앤노블에 빼곡히 꽂힌 록 음악 서적을 보고 사무치는 부러움을 느꼈다는 고백에서 메탈에 대한 순수한 진정성을 감지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헤비메탈 계보도』의 뜨거운 에너지는 증명된 것이 아닐까. 통권으로 읽어버리기보다는 한 권의 자료집으로 소장하고 틈틈이 꺼내 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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