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내셔널의 밤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박솔뫼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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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문학은 무겁고 어렵다는 편견 앞에서, 누구나 읽고 싶은 점고 매력적인 이야기를 담은 작은 책을 만들기로 해서 나온 책이 아르테의 작은책 시리즈다. 작은책 시리즈는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를 담은 소설로 기획되었는데, 한 손에 들어오는 작은 판형과 원고지 300매라는 가벼운 분량 안에서 정통 소설의 맛을 느낄 수 있게 했다. 주목받는 젊은 작가들과 함께 만들어가는데, 그 시작을 알리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박솔뫼 작가의 [인터내셔널의 밤]이다.

 

  실제로 책을 받아보니, 사이즈가 작아서 웬만한 겨울 외투 주머니에 쏙 들어가 어디든 가볍게 가지고 다니며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막상 책을 읽어보니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인터내셔널의 밤]은 부산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만난 한솔과 나미 두 여행자의 이야기를 담고있다.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혼잣말들이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는데, 묘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태어난 이후 줄곧 우리는 이 사회 안에서 규정되고 인정받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자신의 세계에서 인정받지 못한 한솔과 나미는 각자의 자리에서 떠나 “신기하고 무섭고 이상한 기분”의 심리 상태에서 기차의 옆자리 사람으로 마주하게 된다.

 

  p.19

  요즘은 옆자리에 누가 앉든 보통은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다. 옛날엔 말을 걸고 대화를 나누었을까. 지금은 전화 목소리가 너무 크다거나 가방을 치워달라거나 제가 친구가 왔는데 혹시 자리를 바꿔 주실 수 있을까요, 그럴 때 말고는 말을 거는 상황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무슨 책을 읽으세요 어디까지 가세요 오늘 뭐 하세요, 이런 자연스럽지만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대화들. 막상 이야기를 주고받자 별것 아닌 일처럼 여겨졌다. 어색하지도 어렵지도 않았다.

 

  한솔에게는 인생에서 무언가 사건이 있었고 그 이후, 이전의 삶을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멀리 일본에 가 있는 친구에게서 청첩장을 받고 갈 수 없을 것 같아 거절하려 하지만, 조금씩 변해갈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지금의 자신과, 이십 년 전 친구의 결혼식에 가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중년이 된 자신을 상상하며 결국 참석하기로 마음먹는다.

 

  p.56

  실제 한솔이 여권을 받을 때 구청 직원들은 한솔의 주민등록상 성별이 여성일 것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군필 여부만 여러번 물었다.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면 군대를 가지 않은 이십 대 젊은 남성이 어떻게든 해외에 나가고 싶어서 여권을 만들러 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한솔이 설사 이십 대 젊은 남성이라고 해도 아니 군복무를 마치지 않은 이십 대 남성이라면 더욱 여권을 만들어 외국을 여행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몸을 먼 곳으로 보내기가, 자신을 어딘가로 옮기는 것에 많은 관문이 놓여 있는 것이 선명해 보였다.

 

 한편 나미는 자신을 보호해준다고 믿던 곳에서 도망쳐 나온 뒤 쫓기는 불안 속에 괴로워하며 그동안 아끼며 보살피던 아이들을 두고 나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것 때문에 가슴 아파한다. 커서, 다 자란 후에 다시 만나면 되지 않느냐는 한솔의 질문에 나미는 지금의 모습은 다시 볼 수 없는 모습이라고 단언한다. 한 사람을 좋아하고 알아봐주는 일은 여러 모습을 모두 지켜봐주는 일이 아닐까.

 

  p.44

  교단에서 도망친 이후 병원에서 일하는 이모네 집에서 한 달간 숨어 살았다. 숨어 살았다고 해야 할까.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았으니 숨어 살았다고 할 수 있겠지. 이모는 오십대 중반으로 결혼은 하지 않았고 외가와는 거의 교류를 하지 않았다. 나미는 도무지 도망칠 곳이 없어서 생각을 하다 하다 이모를 떠올렸고 병원으로 무작정 찾아가 기다렸다. 물론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을 찾고 있을 거라는, 찾아내고야 말 것이라는 생각에 늘 머리가 곤두서 있었다.

 
“시간은 길고 시간은 많고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을 거야. 그냥 살면 된다”는 유미 이모의 말은 도망쳐 나온 세상을 등지고 새로운 관문 앞으로 발을 떼볼 용기를 갖게 해준다.

항구와 커다란 여객선 사진을 함께 바라보던 두 사람은 이제 각자의 새로운 여행지로 다시 떠나려 한다. 두려움을 딛고 하나의 새로운 관문을 통과하면서 한솔은 가뿐한 발걸음과 함께 센티멘털을 느끼며 수첩에 한 문장을 남긴다. “모든 것이 좋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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