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 해신 서의 창해 십이국기 3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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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ㅇ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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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하나님의 주권 - 롬 9:1-11:36 복음주의 설교자 존 파이퍼의 로마서 강해 시리즈 5
존 파이퍼 지음, 주지현 옮김 / 좋은씨앗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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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 (존 파이퍼,복음과 하나님의 주권,좋은씨앗)

 

드디어 나왔다. 존 파이퍼의 로마서 강해 5복음과 하나님의 주권말이다. 처음 로마서 강해 4권을 접하고, 미처 구매하지 못했던 1권부터 3권까지 전부 구매하였다. 그리고 5권이 출판되기를 기다렸다.

로마서 강해 5권은 로마서 9장부터 11장까지 다루고 있다. 38번의 설교로 구성되어 있는데, 책 제목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주권 사상을 전파한다. 특히 책 서두에 저자가 주권사상에 사로잡힌 이유를 설명하며, 하나님의 주권은 그저 조사대상이 아니라 선포할 대상이라며, 죄인 된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한다. (p17)

하나님의 주권 사상,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셨다는 교리를 설교하기란 쉽지 않다. 설명이 미흡하면 오해를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선택의 교리를 뒤집어보면, 필히 누군가의 배제가 떠오른다. 한 교회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가 배제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까지 미치면 어색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그런지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지만, 목회자로부터 선택교리 설교를 자세히 들어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대게는 그냥 그런 것이 있다고, 또는 피상적으로 들었던 것 같다.

왜 교회 안에서 선택의 교리는 외면되었던 것일까? 목회자들의 피상적인 앎 때문일 수도 있겠다. 또는 성도들에게 은혜와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존 파이퍼는 이런 생각에 반대한다. 오히려 선택의 교리가 신앙 생활하는데 필히 필요하고 은혜가 된다고 말한다. 한 성도의 예를 들면서, 절망적인 상황가운데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사살 자체가 힘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선택당한 자의 기쁨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의 실패가 하나님의 실패로까지 어지지 못한다. 나의 넘어짐에도 불구하고 그의 구원 사역을 완성해가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그 사실을 믿게 될 때, 조금은 더 안도하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우리 편에서의 적절한 믿음의 반응이 필요하다.

벌써부터 6권이 기다려진다. 올해는 로마서를 계속 묵상해야겠다. 존 파이퍼의 도움을 받아 전체적으로 로마서 이해하고 적용해 보길 원하는 사람에게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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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부활의 신학 - 죽음 너머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며 김균진 저작 전집 8
김균진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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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망각한 사회.

(김균진,죽음과 부활의 신학,새물결플러스)

 

오랜 암투병과 그로인한 부작용이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작년 타들어가는 8월을 맞이하기 전 6월에 이미 사망선고를 받았다. 아니 그전부터 이미 죽음의 그림자를 감지했다. 치료는 중단된 상태였고, 호스피스 병동을 오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예상한다. 하지만, 삶을 포기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희망포기는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암흑에 의학도, 기도도, 어설픈 위로도 묻혔다. 무력감을 느끼며 죽음을 알려고 책을 읽어댔다. 관련 책들은 많았고, 죽음은 삶에 대한 이해를 넓혀줬다. 그래서 더더욱 죽음을 탐구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리곤 후회했다. 더 빨리 알았다면 하고 말이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죽음에 직면하고서도 응시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죽음의 배재현상이다. 사회에 만연한 죽음의 현상들이 있지만 애써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무감각해진 그들은 죽음을 감지해내지 못한다. 가족을 땅에 묻고도 죽음이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왜일까? 성숙한 삶의 태도인가? 아니다. 깊은 신앙의 힘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들은 죽음을 부인한다.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퍼스가 생각한 것처럼, 죽음은 경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일까? (p53) 그럴지도 모르겠다.

 

죽음의 배재 현상을 성의 터부로부터 찾은 사람이 있다. 인종심리학자 고러(G.Gorer)과 의학자 바알(C.W.Wahl)이다. 그들에 의하면 과거 성에 대한 터부가 죽음에 대한 터부로 대체된 것이다. 과거에는 성에 대한 공론을 부끄럽게 생각했다면, 이제는 죽음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하여 오늘날 죽음은 의사소통 장애를 겪고 있다. (p74)

 

친족이나 가족의 장례를 치르고 나면 주위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위로형이다. ‘힘들지.’라는 말로 어깨를 두드리며 슬픔을 달래주려고 한다. 또 하나는 분투형이다. ‘더 열심히라는 말로 생활을 독려한다. 죽음을 묵상, 생각하라고 권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애도는 딱 3일 안에 끝내야 하는 패드스푸드와 같은 것이다. 교회조차 다르지 않다. 죽음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 장례는 하나의 행사로 그치고 만다. 여기서도 죽음은 실종된다.

 

죽음의 순간이 다가와도 어머니는 좀처럼 삶을 포기하지 못하셨다. 살아있음을 사랑하셨다. 그런 어머니에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나에게 물었다. ‘엄마, 죽으면 너희들 어떻게 하니?’ 그때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목이 뻣뻣해졌고 생각은 끊겼다. 침묵했다. 죽음을 머릿속으로 이해했지만 가슴이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어머니와 함께했던 추억가운데 한 곳으로 잠시나마 되돌아 갈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주저하지 않고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래서 죽음을 이야기하겠다.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 있더라도 죽음을 응시하겠다.

 

눈 빠지게 기다렸네.’ 23일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온 나에게 어머니가 한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이 마지막 말이 되었다.

죽음을 망각한 곳엔 삶이 없다. 죽음의 배재가 곳 삶의 재배임에 다름없다. 우리는 죽음을 이해할 때, 삶을 알 수 있다. 필연적으로 죽음을 자주 접하게 되는 사역자에게 이 책을 권한다. 피상적 죽음에 대한 이해가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삶조차 더욱 풍성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만든다. 죽음은 곧 삶에 대한 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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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망각한 사회.

(김균진,죽음과 부활의 신학,새물결플러스)

 

오랜 암투병과 그로인한 부작용이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작년 타들어가는 8월을 맞이하기 전 6월에 이미 사망선고를 받았다. 아니 그전부터 이미 죽음의 그림자를 감지했다. 치료는 중단된 상태였고, 호스피스 병동을 오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예상한다. 하지만, 삶을 포기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희망포기는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암흑에 의학도, 기도도, 어설픈 위로도 묻혔다. 무력감을 느끼며 죽음을 알려고 책을 읽어댔다. 관련 책들은 많았고, 죽음은 삶에 대한 이해를 넓혀줬다. 그래서 더더욱 죽음을 탐구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리곤 후회했다. 더 빨리 알았다면 하고 말이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죽음에 직면하고서도 응시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죽음의 배재현상이다. 사회에 만연한 죽음의 현상들이 있지만 애써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무감각해진 그들은 죽음을 감지해내지 못한다. 가족을 땅에 묻고도 죽음이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왜일까? 성숙한 삶의 태도인가? 아니다. 깊은 신앙의 힘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들은 죽음을 부인한다.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퍼스가 생각한 것처럼, 죽음은 경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일까? (p53) 그럴지도 모르겠다.

 

죽음의 배재 현상을 성의 터부로부터 찾은 사람이 있다. 인종심리학자 고러(G.Gorer)과 의학자 바알(C.W.Wahl)이다. 그들에 의하면 과거 성에 대한 터부가 죽음에 대한 터부로 대체된 것이다. 과거에는 성에 대한 공론을 부끄럽게 생각했다면, 이제는 죽음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하여 오늘날 죽음은 의사소통 장애를 겪고 있다. (p74)

 

친족이나 가족의 장례를 치르고 나면 주위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위로형이다. ‘힘들지.’라는 말로 어깨를 두드리며 슬픔을 달래주려고 한다. 또 하나는 분투형이다. ‘더 열심히라는 말로 생활을 독려한다. 죽음을 묵상, 생각하라고 권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애도는 딱 3일 안에 끝내야 하는 패드스푸드와 같은 것이다. 교회조차 다르지 않다. 죽음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 장례는 하나의 행사로 그치고 만다. 여기서도 죽음은 실종된다.

 

죽음의 순간이 다가와도 어머니는 좀처럼 삶을 포기하지 못하셨다. 살아있음을 사랑하셨다. 그런 어머니에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나에게 물었다. ‘엄마, 죽으면 너희들 어떻게 하니?’ 그때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목이 뻣뻣해졌고 생각은 끊겼다. 침묵했다. 죽음을 머릿속으로 이해했지만 가슴이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어머니와 함께했던 추억가운데 한 곳으로 잠시나마 되돌아 갈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주저하지 않고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래서 죽음을 이야기하겠다.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 있더라도 죽음을 응시하겠다.

 

눈 빠지게 기다렸네.’ 23일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온 나에게 어머니가 한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이 마지막 말이 되었다.

죽음을 망각한 곳엔 삶이 없다. 죽음의 배재가 곳 삶의 재배임에 다름없다. 우리는 죽음을 이해할 때, 삶을 알 수 있다. 필연적으로 죽음을 자주 접하게 되는 사역자에게 이 책을 권한다. 피상적 죽음에 대한 이해가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삶조차 더욱 풍성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만든다. 죽음은 곧 삶에 대한 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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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망각한 사회.

(김균진,죽음과 부활의 신학,새물결플러스)

 

오랜 암투병과 그로인한 부작용이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작년 타들어가는 8월을 맞이하기 전 6월에 이미 사망선고를 받았다. 아니 그전부터 이미 죽음의 그림자를 감지했다. 치료는 중단된 상태였고, 호스피스 병동을 오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예상한다. 하지만, 삶을 포기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희망포기는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암흑에 의학도, 기도도, 어설픈 위로도 묻혔다. 무력감을 느끼며 죽음을 알려고 책을 읽어댔다. 관련 책들은 많았고, 죽음은 삶에 대한 이해를 넓혀줬다. 그래서 더더욱 죽음을 탐구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리곤 후회했다. 더 빨리 알았다면 하고 말이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죽음에 직면하고서도 응시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죽음의 배재현상이다. 사회에 만연한 죽음의 현상들이 있지만 애써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무감각해진 그들은 죽음을 감지해내지 못한다. 가족을 땅에 묻고도 죽음이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왜일까? 성숙한 삶의 태도인가? 아니다. 깊은 신앙의 힘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들은 죽음을 부인한다.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퍼스가 생각한 것처럼, 죽음은 경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일까? (p53) 그럴지도 모르겠다.

 

죽음의 배재 현상을 성의 터부로부터 찾은 사람이 있다. 인종심리학자 고러(G.Gorer)과 의학자 바알(C.W.Wahl)이다. 그들에 의하면 과거 성에 대한 터부가 죽음에 대한 터부로 대체된 것이다. 과거에는 성에 대한 공론을 부끄럽게 생각했다면, 이제는 죽음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하여 오늘날 죽음은 의사소통 장애를 겪고 있다. (p74)

 

친족이나 가족의 장례를 치르고 나면 주위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위로형이다. ‘힘들지.’라는 말로 어깨를 두드리며 슬픔을 달래주려고 한다. 또 하나는 분투형이다. ‘더 열심히라는 말로 생활을 독려한다. 죽음을 묵상, 생각하라고 권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애도는 딱 3일 안에 끝내야 하는 패드스푸드와 같은 것이다. 교회조차 다르지 않다. 죽음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 장례는 하나의 행사로 그치고 만다. 여기서도 죽음은 실종된다.

 

죽음의 순간이 다가와도 어머니는 좀처럼 삶을 포기하지 못하셨다. 살아있음을 사랑하셨다. 그런 어머니에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나에게 물었다. ‘엄마, 죽으면 너희들 어떻게 하니?’ 그때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목이 뻣뻣해졌고 생각은 끊겼다. 침묵했다. 죽음을 머릿속으로 이해했지만 가슴이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어머니와 함께했던 추억가운데 한 곳으로 잠시나마 되돌아 갈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주저하지 않고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래서 죽음을 이야기하겠다.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 있더라도 죽음을 응시하겠다.

 

눈 빠지게 기다렸네.’ 23일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온 나에게 어머니가 한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이 마지막 말이 되었다.

죽음을 망각한 곳엔 삶이 없다. 죽음의 배재가 곳 삶의 재배임에 다름없다. 우리는 죽음을 이해할 때, 삶을 알 수 있다. 필연적으로 죽음을 자주 접하게 되는 사역자에게 이 책을 권한다. 피상적 죽음에 대한 이해가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삶조차 더욱 풍성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만든다. 죽음은 곧 삶에 대한 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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