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글 - 우리의 글쓰기가 가야 할 길
조르조 아감벤 지음, 윤병언 옮김 / 책세상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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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게 읽었다. 현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에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덕분에 독자로 하여금 사유를 이끌어 내는 책.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라는 개념이 아리송하면서도 흥미롭다. 관점의 전환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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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 서른 살 빈털터리 대학원생을 메이지대 교수로 만든 공부법 25
사이토 다카시 지음, 김효진 옮김 / 걷는나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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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법에 관한 책을 읽은 것은 처음이다. <예담>출판사에서 나온 이동진 독서법과 병행하며 읽었다. <이동진 독서법>은 가독성이 좋고,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선명했다. 사이토 다카시의 이 책은 이동진 독서법의 내용에서 좀 더 심층적으로 써내려간 느낌이다.

 

독서법이라는 단어엔 익숙하다. 하지만 처음 이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땐, 조금 의아했다. 독서하는 데에도 어떤 방법이랄 게 있나, 그냥 읽으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독서법에 관한 책들에겐 딱히 손이 가질 않았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 나의 독서가 어쩌면 제대로 된 독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어떤 회의가 들었다.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든 것이다. 그제야 독서법에 관한 책들에게 눈길이 갔다.

사이토 다카시의 이 책은 독서의 중요성과 더불어 저자만의 독서방법, 일종의 독서의 노하우랄까, 그런 것들을 전하고 있는 책이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자기 계발서 라고도 볼 수 있다. 말이 나온 김에 자기 계발서에 관한 나의 생각을 잠깐 기술하자면 이렇다.

 

자기 계발서의 내용은 대부분 비슷하다.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익히 알고 왔던 삶의 지침 정도가 대부분이다. 자기 계발서가 아니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조언들 있지 않은가. 예를 들면, 시간관리를 잘해라, 책을 많이 읽어라, 메모하는 습관을 길러라 등등. 이건 당연한 얘기다. 문제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이유만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잊고 산다는 점이다. 자기계발서는 바로 이런 틈새를 공략한다. 사람들이 잊고 지내던 것들을 다시금 상기시켜 준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스스로에 대한 경각심을 두드려주는 역할을 한다.

이 책 역시 그런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볼 때, 자기계발서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넓은 범주에서 보자면 말이다.

 

독서는 왜 중요한가, 라는 물음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답한다. ‘인생은 책을 얼마나 읽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여기서 말하는 읽었다는 기준에 대해 사람들 저마다 생각이 다른 것 같다. 자칭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이들만 봐도 그렇다. 누군가가 자기자신을 두고, ‘나는 책을 좋아한다(독서를 좋아한다)’고 말할 때, 그가 말하는 책이란 곧 자신이 좋아하는 한 분야일 확률이 높다. 쉽게 말해 편협한 독서를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소리다. 어떤 사람은 경제경영서만 읽고, 또 어떤 사람은 문학서적만 읽는다. 또 누군가는 장르물만 읽는다. 내 주변에도 그런 이들이 꽤 있고, 과거엔 나 역시 그랬다.

 

언젠가 지인과 함께 밥을 먹을 때의 일이다. 어쩌다보니 소설가 김훈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그런데 상대방은 김훈을 모른다고 했다. 나는 적잖이 놀랐다. 책을 좋아한다는 사람이! 게다가 소설가 등단을 꿈꾸는 사람이 김훈을 모른다고. 김훈은 문학에 관해선 문외한인 사람조차도 알 법한 사람 아닌가. 그는 대체로 장르소설이나 만화를 좋아했다. 편협한 독서를 했다는 증거다. 이 사람, 소설가가 되기엔 독서력이 너무나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속으로 잠깐 했던 것 같다. 느슨한 의미의 독서란 대체로 이런 것과 같다.

 

단 한권의 책만 읽은 사람은 한권도 읽지 않은 것과 같다’, 이 말을 누가 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이 말 역시 편협한 독서의 위험성을 말해주고 있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독서가 주는 이로움에 대해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겠다. 독서는 삶의 고난에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을 준다고. 또한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고통을 훨씬 잘 견뎌낼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물이나 상황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은 그 사람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결정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치관과 세계관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조금 추상적으로 얘기하자면, 그것은 곧 자기만의 방을 갖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문제는 방의 상태이다. 이 방의 상태는 양질의 독서력과 어느 정도는 상관관계를 갖는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책을 읽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자신만의 세계관이 확실한 것 같다. 건축으로 치자면 자기만의 설계도가 구축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저 다수의 흐름에 휩쓸려 이리저리 이끌려 다닐 뿐이다. 결론은, 책을 읽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자기 삶의 주체성이 높다는 생각이다.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된 자, 그렇지 않은 자. 이 둘의 차이는 과연 어떠할까.

 

고등학교 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문학서적만 읽었다. 그것도 국내소설만 읽었다. 대학에 들어온 이후부턴 본격적으로(?) 시집을 읽기 시작했고, 이런저런 외국문학도 접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읽는 책이라는 것은 문학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아마 전공 탓인 이유도 있었겠지. 막상 졸업 이후엔 대중과학서적에 흥미가 갔다. 우울증을 다룬 책을 읽다가 우울증을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다룬 부분을 읽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뇌 과학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조금씩 독서의 폭을 넓혀나갔다. 나는 지금도 이 사실을 무척 다행스럽게 여긴다.

 

P.142

책을 읽었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다 읽은 후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가?

어느 부분이 가장 기억에 남는가?

다시 읽는다면 어느 부분을 제일 먼저 읽겠는가?

어떤 점을 배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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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세계 종교 여행 사계절 1318 교양문고 12
김나미 지음 / 사계절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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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에 관해 알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했었다. 하지만 마땅한 입문서를 찾기가 어려워 이런 저런 책을 뒤적이다가 내려놓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던 차에 발견한 책이다. 기독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에 대해 전반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청소년 눈높이에 맞춰 씌어졌기 때문에 입문서로 적당하다.

 

어떤 장르의 입문서를 구할 때면 늘, ‘청소년을 독자대상으로 삼는 책들을 고른다. 청소년 눈높이에 맞추어 씌어졌기 때문에 내용이 어렵지 않고, 가독성이 좋은 책들이 많다. 만화로 된 도서 역시 입문자들에게 추천할만하다. <주니어 김영사>에서 나온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50> 시리즈가 바로 그렇다. 그렇게 고른 책 치고 실패한 적이 거의 없다. 이 책 역시 그중의 한권이다.

 

종교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다. 그것이 종교의 속성이다. 특히나 유일신을 믿는 종교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 보수성은 때론 자유를 허용치 않는다는 점에서 폭력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이슬람교가 그렇다. 이슬람은 평화신에 대한 복종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알라의 뜻에 복종하여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는 뜻이다. 알라에게 절대 복종하는 것은 이슬람교의 처음이자 마지막과도 같다. 그리고 이슬람교는 여성에게 아주 엄격하고 까다로운 관례를 제시한다. 베일이나 일부다처제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코란의 법경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은 모든 이슬람국가에게 적용되는 사항은 아니고, 일부 극단적인 이슬람국가(이슬람 무장세력, 사우디아라비아)에게 해당 된다. 무슬림 여성들이 베일을 쓰는 이유는 남편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 피부나 얼굴을 보여선 안 된다는 계율이다. 이것은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이라는 사실을 전제하는 계율이다. 여성의 인권을 위협하는 계율이며, 성 차별적이다. 폭력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종교라는 이름을 쓰고 자행되는 폭력들은 이슬람 외에도 많을 것이다.

 

두 번째로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은 불교에 관한 부분이었다. 불교에서는 신을 믿지 않는다. 불교는 신앙 중심이 아닌 수행 중심의 종교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타 종교에 비해 관용적이며, 포용적이다. 배타성이 강한 유일신 종교(기독교, 이슬람교 등)들과는 다르다.

불교는 아시아의 종교다. 인도에서 시작해 중국을 통해 아시아에 전래 되었다. 서양인들이 위와 같은 불교의 매력을 좇는 경우도 있다. 신앙 중심인 기독교는 신자들에게 믿을 것을 말한다. 하지만 불교는 수행 중심의 종교이기 때문에 믿음을 설파하지 않는다. 바로 그런 점이 사람들에게 편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부처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고 몸과 마음의 집착을 끊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소유란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고집멸도라는 말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한 부처의 가르침은 앞서 읽은 데이비드 호킨슨의 놓아버림과도 같은 맥락이다. 자신을 놓아버릴 것. 자신을 끊임없이 놓아버릴 것. 그러나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끝없는 내적수련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라고 부르는 것이 실제로 일까요? 여러분은 몸이나 느낌, 지각, 의식, 의지 따위를 통해 내가 있다고 느낄지도 모르죠.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부처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은 것이 이것이에요. 그렇다면 정말 는 있는 것일까요? 어쩌면 는 환상 아닐까요? 어쩌면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내 마음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 구절은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코기토(Cogito)’와도 같다. 코기토는 근대의 프랑스 사상가인 데카르트에 의해 나온 말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바로 그의 명제이다. ‘라는 개념은 생각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 또한 이것은 실존주의 철학과도 맞물려 있다.

불교는 타 종교와는 다르게 철학과도 접목되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또한 그것이 불교의 매력(?)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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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아 버림 - 내 안의 위대함을 되찾는 항복의 기술 데이비드 호킨스 시리즈
데이비드 호킨스 지음, 박찬준 옮김 / 판미동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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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꼭 필요한 책이었다. 살면서 내가 사람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말 중의 하나는 바로 그것이다. ‘넌 생각이 너무 많아’. 그들은 내게 생각을 멈출 것을 권했다. 하지만 마음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어떤 좋지 않은 일이 내게 닥쳤을 때, 나는 오로지 그것에 나의 신경을 집중하곤 했다. 생각은 나를 자주 집어삼켰고, 나는 나의 생각과 감정에게 지배당하곤 했다.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한 셈이다. 그 결과, 남들보다 스트레스에 취약해지는 순간이 잦아졌다. 외부는 고요했지만 나의 내부에선 언제나 생각과 감정들이 요동치고 있었다.

책의 저자는 바로 이러한 생각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오버씽킹(Over thinking)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지나치게 생각이 많아 걱정이 떠나지 않는 현상.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되는 현상이다.

생각이라는 것은 부정적인 감정을 놓아버리는 데에 있어 방해가 될 뿐이라고, 대신 자신의 감정을 그저 생생히 느끼라고 저자는 책에서 말한다. 감정이 올라오는 순간마다 감정을 놓아버리는 것. 이러한 항복 기제야말로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가장 실용적이고도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말하며, ‘놓아버림기법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놓아버림 기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감정에 저항하고 싶은 바람을 놓아버릴 것 (저항 때문에 감정이 지속되는 것이다). 감정에 저항하거나 감정을 바꾸려는 노력을 포기하면 감정이 달라지면서 강도가 약해진다. 둘째, 놓아버릴 때는 모든 생각을 무시할 것. 셋째, 감정을 분출하거나 겁내거나 비난하지 않고, 감정을 가지고 도덕을 따지지 않는 것. 요컨대 판단을 멈추고 감정은 감정일 뿐임을 알아보는 것이다.

언젠가 심리상담센터를 찾았던 일이 기억난다. 그때 나는 누군가로 인해 불쾌함을 겪은 상황이었다. 불쾌함이 스트레스로 전가되어 신체적 통증으로 나타날 정도였다. 내가 나의 이야기를 하자, 그걸 듣고 있던 상담사는 내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사람에게 화를 내지 못했던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스스로를 용서할 줄 알아야 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타인에 대한 화는 결국 스스로에 대한 그것과 상관관계에 있다는 것. 나는 결국 본질적으론 나 자신에게 화가 나 있던 셈이었다. 이걸 깨닫고 나자 갑자기 마음이 평온해지면서 불쾌한 사건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놓아버림기법을 행하고 있던 것인지도 몰랐다.

이것은 이 책의 자부심파트와도 연결되는 지점이다. 책에서 말하는 자부심이란 곧 자존심의 다른 말처럼 읽히기도 한다. 자존감이 낮을수록 자존심은 강해지는 법이라고 했다. 살다보면 상대에게 어떤 공격을 가하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그런 순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속엔 자존감의 위기를 느끼는 내가 있었다. 그랬던 것 같다. 자기중심을 잃지 않는다면 외부상황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자기중심을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자기감정을 내려놓는 일.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 책은 내게 꼭 필요한 책이었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놓아버림 기법이 감이 잘 잡히질 않았다. 저자가 일컬어 준 대로 실천해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내 안에서 올라오는 나쁜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두고자 했다. 하지만 어떤 압력만 느껴질 뿐, 놓아버렸다는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어쩌면 압력을 느꼈다는 것 자체가 무의식적인 억압의 반증일 수도 있겠다. 놓아버림 기법을 실천하기엔 아직 내가 가진 역량(?)이 많이 부족하다고 판단된다. 끊임없는 내적 수양과 자기성찰 없이는 쉽지 않으리라 짐작된다. 앞으로 여러 번의 시도를 통해 놓아버림에 조금씩 더 가까워질 수 있다면 좋겠다.

책을 통해 내가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생각을 멈출 것 (생각을 멈추기 위해 몸을 움직일 것). 그리고 자부심을 놓아버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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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2020-02-19 0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계속 놓아버린다는게 헷갈려요, 어떤분이 홉킨스 박사님이 놓아버림은 ˝ 주여 당신 뜻대로 하소서~˝ 의미와 같다고도 하셨다더군요. 그걸 떠올리면 조금 도움이 되긴 하더라구요, 글 잘보았습니다.

whdgns1097 2021-07-09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의뜻대로하소서 마이클싱어의 책도보면도움되요
 
오후 네 시 블루 컬렉션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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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 노통브의 오후 네시를 다 읽었다. 소설을 끌고 나가는 주된 인물은 주인공인 베르나르댕이다. 베르나르댕은 매일 정해진 시간마다 주인공의 집에 방문한다. 방문의 목적은 딱히 없다. 그냥 방문하는 것이다. 주인공인 는 매번 베르나르댕과의 대화를 시도하지만, 번번히 실패한다. 그도 그럴 것이 베르나르댕에겐 대화할 의지가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는 그에게 질문을 몇 차례 던진다. 그에 대한 베르나르댕의 대답은 언제나 단조롭다. ‘아니오가 그의 주된 대답이다. 그러한 틀에 박힌 대답 이외엔 어떤 사교적인 행위도 그에게선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왜 매일같이 이웃인 의 집에 방문하는 것인가. 이유는 알 수 없다. (만약 방문의 이유가 소설에서 분명히 드러났더라면 소설의 긴장감은 떨어졌을 것이다) 어떻게서든 베르나르댕으로 하여금 긴 대답을 이끌어내기 위한 그의 노력은 가히 필사적이다. 그러한 필사성은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더해져 마침내 두 사람 간의 묘한 기류를 형성하는 주된 요소가 된다. 또한 의 시도는 마치 예스Yes’No’라는 대답만으로 이루어진 타인의 세계에 어떻게든 균열을 내고자 하는 몸부림처럼 보인다. 그러한 몸부림은 두 사람의 의미 없는 대화를 통해 고조에 다다르는데, 그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독자인 나로선 절로 웃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이처럼 우스꽝스러운 풍경이라니. 이것은 블랙 유머스럽다. 한편으론 어딘지 모르게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떠올리는 면도 있다.

 

사람은 스스로가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한다. 자기 자신에게 익숙해진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이다. 세월이 갈수록 인간이란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그 인물을 점점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낯설게 느껴진다고 한들 무슨 불편이 있을 것인가? 그 편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게 되면 혐오감에 사로잡힐 테니까‘_P.9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점들 중 하나는 바로 자의식이다. 자의식을 갖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사회적인 관계다. 사람은 누구나 타자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깨닫는다. 혼자라는 익숙한 상태에선 스스로에 대해 어떤 것도 새로이 발견할 수 없다. 타인과 부딪혀야만 알 수 있다. 스스로에 대한 평가 역시 마찬가지이다.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어떤 객관성/냉정함을 위해 우리는 때론 타인의 시선을 빌리기도 한다. 타자를 통한 스스로와의 거리두기가 확립될 때에야 비로소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 대해 한번 더 숙고할 필요성을 느낀다. 에밀은 베르나르댕을 통해 스스로가 어떤 인물인지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한번 더 질문하고 싶다. 그런 방식을 통해 깨달은 나 자신이라는 인간 역시 어쩌면 내가 만든 선입견은 아닌가. 그렇게 보면 인간이란 얼마나 유동적인 존재인지.

 

소설의 끝 부분에서 그는 결국 베르나르댕을 살해하고 만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어디선가 에밀의 안도의 한숨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동시에 섬뜩하게 여겨졌다. 그는 어쩌면 스스로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가는 데에서 오는 자기혐오감을 견디기 어려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타자는 지옥이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처럼 어쩌면 그에겐 베르나르댕이 지옥과도 같은 존재였을까. 그러나 외국시인 아담 자가예프스키는 이런 말도 하지 않았는가. ‘타인만이 우리를 구원한다’. 스스로가 어떤 인물인지 일깨운다는 점에서 타자는 과연 구원일까, 아니면 지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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