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네 시 블루 컬렉션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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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 노통브의 오후 네시를 다 읽었다. 소설을 끌고 나가는 주된 인물은 주인공인 베르나르댕이다. 베르나르댕은 매일 정해진 시간마다 주인공의 집에 방문한다. 방문의 목적은 딱히 없다. 그냥 방문하는 것이다. 주인공인 는 매번 베르나르댕과의 대화를 시도하지만, 번번히 실패한다. 그도 그럴 것이 베르나르댕에겐 대화할 의지가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는 그에게 질문을 몇 차례 던진다. 그에 대한 베르나르댕의 대답은 언제나 단조롭다. ‘아니오가 그의 주된 대답이다. 그러한 틀에 박힌 대답 이외엔 어떤 사교적인 행위도 그에게선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왜 매일같이 이웃인 의 집에 방문하는 것인가. 이유는 알 수 없다. (만약 방문의 이유가 소설에서 분명히 드러났더라면 소설의 긴장감은 떨어졌을 것이다) 어떻게서든 베르나르댕으로 하여금 긴 대답을 이끌어내기 위한 그의 노력은 가히 필사적이다. 그러한 필사성은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더해져 마침내 두 사람 간의 묘한 기류를 형성하는 주된 요소가 된다. 또한 의 시도는 마치 예스Yes’No’라는 대답만으로 이루어진 타인의 세계에 어떻게든 균열을 내고자 하는 몸부림처럼 보인다. 그러한 몸부림은 두 사람의 의미 없는 대화를 통해 고조에 다다르는데, 그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독자인 나로선 절로 웃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이처럼 우스꽝스러운 풍경이라니. 이것은 블랙 유머스럽다. 한편으론 어딘지 모르게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떠올리는 면도 있다.

 

사람은 스스로가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한다. 자기 자신에게 익숙해진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이다. 세월이 갈수록 인간이란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그 인물을 점점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낯설게 느껴진다고 한들 무슨 불편이 있을 것인가? 그 편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게 되면 혐오감에 사로잡힐 테니까‘_P.9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점들 중 하나는 바로 자의식이다. 자의식을 갖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사회적인 관계다. 사람은 누구나 타자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깨닫는다. 혼자라는 익숙한 상태에선 스스로에 대해 어떤 것도 새로이 발견할 수 없다. 타인과 부딪혀야만 알 수 있다. 스스로에 대한 평가 역시 마찬가지이다.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어떤 객관성/냉정함을 위해 우리는 때론 타인의 시선을 빌리기도 한다. 타자를 통한 스스로와의 거리두기가 확립될 때에야 비로소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 대해 한번 더 숙고할 필요성을 느낀다. 에밀은 베르나르댕을 통해 스스로가 어떤 인물인지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한번 더 질문하고 싶다. 그런 방식을 통해 깨달은 나 자신이라는 인간 역시 어쩌면 내가 만든 선입견은 아닌가. 그렇게 보면 인간이란 얼마나 유동적인 존재인지.

 

소설의 끝 부분에서 그는 결국 베르나르댕을 살해하고 만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어디선가 에밀의 안도의 한숨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동시에 섬뜩하게 여겨졌다. 그는 어쩌면 스스로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가는 데에서 오는 자기혐오감을 견디기 어려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타자는 지옥이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처럼 어쩌면 그에겐 베르나르댕이 지옥과도 같은 존재였을까. 그러나 외국시인 아담 자가예프스키는 이런 말도 하지 않았는가. ‘타인만이 우리를 구원한다’. 스스로가 어떤 인물인지 일깨운다는 점에서 타자는 과연 구원일까, 아니면 지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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