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이 사라진 날 - 진동하는 삶, 엔지니어가 일군 궤적과 명함 너머의 풍요에 대하여
장호현 지음 / 좋은땅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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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명함이 사라진 날, 비로소 나를 마주하다/장호현 『명함이 사라진 날』 서평

진동하는 삶, 엔지니어가 일군 궤적과 명함 너머의 풍요에 대하여

우리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명함을 건넨다.

명함에는 이름과 직장, 직급과 연락처가 적혀 있다. 짧은 시간 안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해주는 편리한 종이 한 장이다.

그러나 회사를 떠나 더 이상 건넬 명함이 없어졌을 때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직장과 직책이 사라지고 나면 나는 누구이며,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은 내게 무엇으로 남는 것일까.

장호현 저자의 『명함이 사라진 날』은 한국전력공사에서 엔지니어의 길을 시작해 세계적인 기업의 한국 대표에 이르기까지 치열하게 살아온 한 사람이 은퇴 후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쓴 자전적 에세이이자 자기계발서다.

흔들림 속에서 전문성을 쌓고 정상에 올랐던 시간뿐 아니라 명함을 내려놓은 뒤 비로소 발견한 삶의 풍요와 여유도 함께 이야기한다.


비전공자에서 진동 전문가로

장호현 저자는 한국전력공사, 현재의 한국수력원자력에서 근무하며 엔지니어의 삶을 시작했다.

이후 세계적인 산업 기술 기업인 GE의 진동 분석 전문기업 벤틀리 네바다(Bently Nevada)에서 한국 영업총괄과 대표를 맡았고, GE Digital Solutions의 한국 대표도 역임했다.

진동 감시와 진단 분야의 엔지니어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느슨한 삶을 탐구하는 작가이자 색소포니스트로 자신의 새로운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저자의 이력만 보면 처음부터 전문적인 지식과 특별한 재능을 갖춘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는 대학에서 열역학과 유체역학을 배웠을 뿐 기계 전공자가 아니었고, 진동 분야는 사실상 독학으로 쌓아 올린 영역이었다고 말한다.

한국전력공사에 들어갔을 당시에는 진동 감시와 진단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었다. 현장에서 부딪치고 공부하며 자신의 지식을 만들어갔다.

더 체계적이고 깊이 있는 강의를 준비하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했고, 훌륭한 강의를 들으면 그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해 다시 현장에 적용했다.

비전공자라는 한계를 핑계로 삼기보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전문성을 쌓아 결국 진동 감시와 진단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다.

이 책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도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저자와 똑같은 직업을 갖거나 같은 자리에 오르지 않더라도, 전문가가 되기 위해 그가 했던 공부와 훈련, 노력의 태도는 우리도 자신의 분야에서 실천해볼 수 있다.



나만의 기술 영업과 11배 성장의 기록

저자는 한전이라는 안정적인 울타리를 넘어 치열한 경쟁의 세계로 나아갔다.

자신의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기술 영업이라는 새로운 길을 개척했고, 현장에서 고객을 직접 만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신뢰를 쌓아갔다.

그 과정에서 단순히 제품을 판매하는 데 머무르지 않았다. 고객이 겪고 있는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기술을 통해 해결책을 제시하며 관계를 만들어갔다.

책의 목차에 등장하는 「나만의 기술 영업」, 「결별의 시기, 날개를 달다」, 「비전공자가 전문가의 길로」, 「한 몸에서 나온 두 마리의 앵무새」와 같은 제목에는 저자가 전문가이자 조직의 리더로 성장하는 과정이 담겨 있다.

그는 자신만의 기술 영업을 통해 11배 성장이라는 성과를 만들었고, 한국 대표로서 조직을 이끌며 세계 시장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누군가는 이 대목을 읽으며 저자의 화려한 성공에 거리감을 느낄 수도 있다.

대기업과 글로벌 기업에서 대표를 맡고 기록적인 성장을 이룬 경험은 평범한 직장인이나 자영업자에게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만 바라보면 그 과정에서 저자가 견뎌야 했던 수많은 불안과 선택, 공부와 책임을 놓치게 된다.

이 책에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랐는가’보다 그 자리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을 어떻게 준비하고 단련했는가이다.


목차를 따라 읽는 한 사람의 인생 궤적

이 책은 프롤로그 「불안이라는 파동기를 통과하는 당신에게」에서 시작해 총 다섯 장으로 이어진다.

제1장 「흔들리는 파동 위에 새겨진 궤적」에서는 저자가 선택한 길과 한전에서의 생활, 새로운 도전과 전문가가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선택된 길, 그 서막」, 「흔들림이 남긴 아름다운 파동」, 「한전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결단」, 「나만의 기술 영업」, 「11배 성장의 신화」, 「비전공자가 전문가의 길로」 등의 글을 통해 불안과 도전이 어떻게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는지를 들려준다.

제2장 「마주한 정점」에서는 오랜 기다림 끝에 한 나라의 책임자가 되고, 4차 산업혁명의 변화 속에서 새로운 기술과 시장을 개척했던 이야기가 펼쳐진다.

타고난 재능이 부족하다면 전략으로 채우고, 조직을 이끄는 리더라면 외부 고객뿐 아니라 자신과 함께 일하는 직원이라는 ‘내부 고객’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저자가 성공의 비밀을 책상 앞의 이론이 아니라 현장에서 흘린 시간 속에서 찾았다는 점도 주목하게 된다.

제3장 「내가 건너온 그늘이 너희의 풍요가 되기를」에는 일과 가족 사이에서 살아온 저자의 마음이 담겨 있다.

아들들과 학원에 가는 길, 수많은 출장과 460박의 호텔 생활, 아버지의 고향, 가족과 함께했던 해외 출장, 성장한 아이들의 손을 맞잡았던 순간 등을 돌아본다.

성공을 향해 치열하게 달렸던 시간 뒤에는 함께하지 못했던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애틋함도 남아 있었다.

이 부분을 읽으면 책이 단순한 직장 성공담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사람의 성취 뒤에 가족의 기다림과 희생이 있었으며, 결국 삶에서 오래 남는 것은 직함보다 사람과의 관계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제4장 「서랍을 비우고 길을 걷다」에서는 마침내 명함이 사라진 뒤의 삶을 이야기한다.

제주 올레길과 혼자 걸었던 산길, 새로운 인연과 아들들과의 작별, 두 번의 미국 여정 등을 통해 저자는 직장인의 정체성을 내려놓고 자신의 속도로 걷는 법을 배운다.

제5장 「느슨함이 주는 풍요」에서는 자신을 위한 시간표를 만들고, 색소폰을 연주하며, 못다 한 일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고 현재에 머무는 삶을 이야기한다.

마지막 「진동하는 삶」과 에필로그 「진동이 멈춘 자리에 피어난 느슨함」에 이르면 책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기계의 진동을 감시하고 분석해온 엔지니어였던 저자는 이제 자신의 삶에서 일어났던 흔들림과 파동을 돌아본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정상 상태에 도달하려 했던 삶이 명함을 내려놓은 뒤 비로소 느슨함과 여유를 만난 것이다.


성공의 잣대는 사람마다 다르다

저자는 자신의 분야에서 분명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비전공자에서 전문가가 되었고, 안정적인 직장을 떠나 새로운 시장에 도전했으며, 글로벌 기업의 한국 대표로 조직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인생과 나의 현재를 그대로 비교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성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에게는 높은 직책과 경제적인 성취가 성공일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가족과 평온하게 살아가는 일이나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이어가는 것이 성공일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성공을 바라보다 보면 나는 왜 저렇게 살지 못했는지 생각하며 오히려 자신을 작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저자의 삶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있다.

누군가의 인생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며 보여준 태도와 노력 가운데 나에게 필요한 부분을 배워야 한다.

그런 관점으로 읽는다면 이 책은 성공한 기업인의 자랑이 아니라 한 사람이 수많은 흔들림을 지나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온 기록으로 다가온다.




나에게도 명함이 사라졌던 시간이 있었다

나 역시 직장을 퇴직한 뒤 새롭게 행정사 일을 시작하면서 비슷한 고민을 한 적이 있다.

오랜 시간 몸담았던 직장을 그만두고 나니 더 이상 이전의 소속과 직책으로 나를 설명할 수 없었다. 익숙했던 이름표가 사라진 자리에 무엇을 놓아야 할지 몰라 잠시 흔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직장을 그만두고 살아보니 명함이 있거나 없다고 해서 삶 자체가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명함이 없어도 나는 여전히 같은 사람이었다. 가족과 함께 생활하고, 사람을 만나고, 해야 할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직장 명함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능력까지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다만 행정사사무소를 열고 다시 새로운 명함을 만들었을 때의 기분은 조금 괜찮았던 것 같다.

그 명함에는 이전 직장에서 주어진 직책이 아니라 내가 직접 선택해 시작한 일이 적혀 있었다. 내 이름과 ‘행정사’라는 직업이 새겨진 명함을 바라보며 다시 사회 속에서 나의 자리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 명함이 나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명함이 나를 증명한 것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기로 한 나의 선택과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이 그 명함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명함은 없어질 수 있지만 그 명함을 사용하며 살아온 시간과 경험, 새롭게 도전했던 용기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명함이 사라진 날』이라는 제목이 더욱 가깝게 다가왔다.

명함이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히 직장을 잃거나 은퇴한다는 뜻만은 아니다. 익숙했던 정체성에서 벗어나 직함 없이도 존재하는 나 자신을 다시 만나게 되는 과정일 수 있다.

그리고 때로는 새로운 명함을 만들며 삶의 다음 장을 시작할 수도 있다.


50대인 내가 바라본 앞으로의 10년

나는 50대다.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삶을 돌아보면 저자만큼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는 어렵다.

한편으로는 조금 더 일찍 목표를 세우고 노력했더라면 지금의 모습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할 때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이미 지나간 시간을 아쉬워하기보다 지금부터 살아갈 시간을 바라보게 되었다.

50대는 인생을 정리해야 하는 나이가 아니라 앞으로의 삶을 새롭게 준비할 수 있는 시기다.

지금부터라도 저자가 비전공자의 한계를 넘어 전문가가 되기 위해 공부했던 것처럼 나의 일과 관심 분야를 꾸준히 배우고 실천한다면, 10년 뒤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멋진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거창한 성공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지금보다 더 많은 경험을 쌓고, 내 일에 자신감을 갖고,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늘 하루의 공부와 작은 노력이 당장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10년 동안 쌓이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만큼 큰 차이를 만들 수 있다.

저자의 성공을 부러워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함보다 오래 남는 것

직장에 다닐 때는 회사와 직책이 곧 나 자신인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누구에게나 명함을 내려놓는 날이 찾아온다.

그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직함이나 지위가 아니라 그동안 쌓아온 실력과 경험, 사람들과 나눈 관계, 그리고 자신의 삶을 대하는 태도일 것이다.

정호현 저자는 명함이 사라진 날 비로소 자신을 마주했다고 말한다. 직업도 지위도 타이틀도 내려놓고 나니 자신과 가족, 삶의 의미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잃은 것 같았던 그날이 사실은 진짜 자신을 찾아가는 새로운 출발이었다.

『명함이 사라진 날』은 전문성을 쌓으며 치열하게 일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노력의 방향을 보여주고, 은퇴나 인생의 전환점을 앞둔 사람에게는 명함 너머의 삶을 생각하게 한다.

성공담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면 자기계발서라기보다 한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에세이처럼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저자와 나의 삶을 비교할 필요는 없다.

저자는 저자의 길을 걸었고, 나는 나의 길을 걸어가면 된다.

다만 오늘의 나를 조금씩 성장시키는 노력만은 포기하지 않고 싶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10년 뒤 나의 모습도 지금보다 더 단단하고 풍요로워져 있을 것이라 믿는다.

명함이 사라진다고 삶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명함이 없는 시간에 진짜 나를 발견하고, 다시 만든 한 장의 명함을 통해 새로운 출발을 확인하기도 한다.

앞으로 언젠가 지금의 행정사 명함을 내려놓게 되더라도, 그동안 쌓은 경험과 사람들과 나눈 마음은 내 삶 속에 오래 남아 있을 것이다.

명함보다 오래 남을 나만의 실력과 이야기, 그리고 삶의 의미를 지금부터 차근차근 만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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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 러시아 ㅣ 머니 뭐니 세계사 3
강일우 저자 / 펜타클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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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대화로 쉽고 재미있게 만나는 러시아 역사/강일우 『주식회사 러시아』 서평


도대체 러시아는 왜 저러는 걸까?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나라다. 문학과 음악에서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남겼지만, 정치와 전쟁에서는 차갑고 강한 모습을 보여왔다.

유럽에 속한 나라인지 아시아에 속한 나라인지 한마디로 정의하기도 어렵다. 풍부한 석유와 천연가스를 바탕으로 세계 경제와 국제 정세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강일우 작가의 『주식회사 러시아』는 우리가 알고 있는 듯하면서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러시아의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낸 책이다.

무엇보다 딱딱한 설명문이 아니라 역사 속 인물과 나라들이 서로 대화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마치 러시아라는 거대한 기업이 어떻게 성장하고 위기를 겪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졌는지를 한 편의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는 것 같다.


30년 출판 경험을 지닌 강일우 작가

강일우 작가는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창비 출판사에서 30년간 근무하며 창비청소년문학 시리즈를 기획했고, 창비교육도 설립했다. 현재는 AI 시대를 살아갈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통찰력을 길러주는 책을 기획하고 집필하고 있다.

공저로 정치·경제·환경을 다룬 『고전톡』 1~3권이 있으며,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동화집 『난 뭐든지 할 수 있어!』를 번역하기도 했다.

오랜 시간 출판 현장에서 청소년을 위한 책을 만들고 기획해 온 작가답게, 이 책 역시 어려운 역사를 독자의 눈높이에 맞춰 전달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용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줄이기보다 중요한 역사적 사건과 국제관계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이야기의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구성했다.

쉽게 쓰였지만 내용까지 가볍지는 않은 책이다.




나라와 역사 속 인물들이 직접 나누는 대화

『주식회사 러시아』의 가장 큰 특징은 대화체로 쓰였다는 점이다.

러시아와 주변 국가들, 역사 속 인물들이 등장해 서로 대화를 나누며 당시의 상황을 설명한다. 한 나라가 어떤 선택을 했고, 다른 나라가 왜 반발했는지를 대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보통 세계사 책에는 수많은 인물과 국가, 연도와 사건이 한꺼번에 등장한다. 역사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누가 누구와 싸웠는지, 한 사건이 다음 사건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놓치기 쉽다.

하지만 이 책은 각 나라를 하나의 등장인물처럼 보여주고, 사건이 벌어진 순서에 따라 이야기를 이어간다. 복잡한 국제관계도 인물들의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비교적 쉽게 이해된다.

연도를 외우는 데 집중하기보다 각 나라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살펴보게 한다는 점도 좋았다.

본문 곳곳에 등장하는 그림도 이해를 돕는다. 역사적 사건과 인물, 전쟁 장면을 세밀하게 보여주어 글로만 읽을 때보다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소설을 읽듯 이야기를 따라가고, 그림 속에서 인물과 사건을 찾아보는 재미도 있는 역사책이다.


목차를 따라 읽는 러시아의 성장과 몰락

책은 「도대체 러시아는 왜 저러는 걸까?」라는 머리말과 「세상의 끝, 거대한 주유소」라는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이어지는 열 개의 장은 러시아가 탄생하고 제국으로 성장해 소련을 거쳐 오늘날의 러시아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시간순으로 보여준다.

1장 「늪지대에서 제국이 되다」에서는 키예프 루스와 몽골의 지배, 모스크바의 부상을 다룬다. 러시아라는 나라가 어떤 환경에서 시작되었고 어떻게 힘을 키웠는지를 설명한다.

2장 「수염을 자른 황제」에서는 표트르대제의 서유럽식 개혁과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을 만날 수 있다. 수염을 자르게 할 정도로 강하게 개혁을 추진했던 황제의 이야기를 통해 러시아가 유럽의 강국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3장 「드레스 입은 여제, 제국을 키우다」에서는 러시아의 영토 확장과 크림반도, 폴란드의 역사를 살펴본다.

4장 「눈밭에 묻힌 나폴레옹」에서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과 불타는 모스크바를 다룬다. 혹독한 추위와 러시아의 전략이 세계사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5장 「곰과 사자의 땅따먹기」에서는 러시아와 영국이 벌인 그레이트 게임과 크림전쟁을 이야기한다. 영토와 영향력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경쟁이 지금의 국제관계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6장 「족쇄는 풀렸지만, 빚더미에 앉다」에서는 농노해방령의 한계와 황제 암살 사건을 다룬다. 제도가 바뀌었다고 해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곧바로 나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7장 「작은 섬나라에게 물리다」에서는 러일전쟁과 마지막 황제의 몰락을 이야기한다.

8장 「붉은색 간판으로 바꿔 달다」에서는 러시아 혁명 이후 소련이 탄생하고 스탈린 체제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한다.

9장 「붉은 깃발, 베를린에 꽂히다」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와 냉전의 시작을 다룬다.

10장 「붉은 제국의 부도, 그리고 돌아온 차르」에서는 소련의 해체와 푸틴의 에너지 제국까지 이어진다.

마지막은 「영원한 겨울은 없다」라는 에필로그로 마무리된다.

목차만 따라가도 러시아가 작은 공국에서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하고, 혁명을 통해 소련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오늘날의 러시아가 되기까지의 큰 흐름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청소년을 위한 책이지만 내용은 가볍지 않다

이 책은 청소년을 주요 독자로 삼아 쓴 역사책이다.

하지만 청소년을 대상으로 했다고 해서 내용이 부실하거나 지나치게 단순하지는 않다. 러시아 내부의 역사뿐 아니라 프랑스, 영국, 독일, 폴란드, 일본 등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도 함께 다룬다.

몽골의 지배부터 표트르대제의 개혁, 나폴레옹의 원정, 크림전쟁, 러일전쟁, 러시아 혁명,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 소련 해체와 푸틴 시대까지 중요한 사건들이 빠짐없이 연결되어 있다.

어려운 용어를 늘어놓는 대신 사건이 왜 일어났고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설명한다.

쉽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러시아 역사의 큰 줄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한 작가의 배려가 돋보였다.



깊이 있는 역사책으로 가는 첫걸음

개인적으로 나는 역사를 좋아하는 편이라 이런 형식의 책보다는 한 시대와 사건을 조금 더 깊이 있게 다룬 역사책을 선호한다.

한 사건이 벌어진 정치적·사회적 배경과 여러 학자의 해석을 자세히 살펴보는 책을 읽는 즐거움도 크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미 러시아 역사에 익숙한 독자라면 대화체로 빠르게 전개되는 구성이 조금 가볍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어렵고 두꺼운 역사책을 읽으면 수많은 인물과 사건에 막혀 흥미를 잃기 쉽다. 전체적인 흐름을 모른 채 세부적인 내용부터 공부하면 사건들이 서로 연결되지 않고 단편적인 지식으로 남기도 한다.

먼저 『주식회사 러시아』와 같은 책을 통해 러시아 역사의 큰 흐름을 익힌 뒤, 관심이 생긴 인물이나 사건을 깊이 다룬 책으로 넘어간다면 훨씬 수월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깊이 있는 역사책을 대신하기보다 그 책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주는 입문서에 가깝다.


지루한 역사책이 어려웠던 독자에게

세계사에 관심은 있지만 딱딱하고 지루한 역사책이 부담스러웠던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글이 빽빽한 책보다 만화나 그림이 많은 책을 좋아하는 아이, 역사적 사건의 순서를 자주 헷갈리는 청소년, 러시아가 왜 오늘날과 같은 나라가 되었는지 알고 싶은 성인이 읽어도 좋다.

부모와 아이가 함께 읽은 뒤 표트르대제의 개혁이나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러시아 혁명과 소련의 해체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보아도 좋을 것 같다.

어른도 세계사를 처음부터 다시 공부하고 싶을 때가 있다. 학창 시절 시험을 위해 외웠던 역사를 이제는 사건의 흐름과 나라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는 책이다.

러시아는 어느 날 갑자기 강대국이 된 것이 아니다. 몽골의 지배와 유럽 국가들과의 경쟁, 혁명과 전쟁, 소련의 탄생과 해체를 거치며 지금의 모습이 만들어졌다.

『주식회사 러시아』는 그 길고 복잡한 역사를 대화와 그림으로 쉽고 흥미롭게 보여준다.

역사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러시아의 흐름을 다시 정리하는 시간이 되었고, 처음 역사를 만나는 독자에게는 더 깊은 세계사로 들어가는 친절한 출발점이 되어줄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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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 인간학
최병석 지음 / 좋은세상바라기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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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AI에게 일은 맡겨도 인생은 맡기지 마라/DOS에서 인공지능까지 경험한 내가 읽은 『아날로그 인간학』/최병석 지음


요즘은 AI가 없으면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검색과 번역, 문서 작성과 자료 정리뿐만 아니라 그림과 영상 제작, 상담과 교육, 의료와 행정업무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많은 분야에서 AI가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던 일을 이제는 AI가 몇 초 만에 처리해준다. 우리는 질문을 입력하고 잠시 기다리기만 하면 정리된 답을 받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최병석 작가의 『아날로그 인간학』은 이렇게 편리해진 시대에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우리는 AI를 활용하고 있는가, 아니면 AI에 우리의 생각과 삶을 맡기고 있는가.



흑백 모니터에서 AI 시대까지

나는 컴퓨터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시절부터 컴퓨터를 사용해온 세대다.

처음 컴퓨터를 배웠을 때는 DOS라는 운영체제를 사용했다. 지금처럼 화면에서 아이콘을 누르는 방식이 아니라 검은 화면에 명령어를 일일이 입력해야 했다.

모니터도 컬러가 아닌 흑백이었고, 원하는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명령어를 직접 기억하고 정확하게 입력해야 했다. 한 글자만 잘못 입력해도 프로그램이 실행되지 않았다.

그러다 286, 386, 486 컴퓨터가 차례로 등장했다. 새로운 컴퓨터가 나올 때마다 처리 속도가 빨라지고 기능도 다양해졌다. 윈도우가 보급되면서 컴퓨터는 훨씬 편리해졌고,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거쳐 이제는 사람의 질문을 이해하고 글과 그림, 영상까지 만들어주는 AI 시대가 되었다.

불과 40여 년 만에 우리는 화면에 명령어를 하나씩 입력하던 시대에서, 말로 부탁하면 복잡한 업무까지 대신 처리해주는 시대에 살게 된 것이다.

『아날로그 인간학』을 읽으며 처음 컴퓨터를 배우던 시절과 지금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비교해보게 되었다.

기술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발전했지만, 그 기술을 사용하는 인간도 함께 성장하고 있는지는 다시 생각해볼 문제였다.



나는 생각하며 AI를 사용하고 있는가

나 역시 행정사로 일하면서 AI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복잡한 자료를 요약하고, 서류 내용을 정리하고, 문장의 초안을 작성하거나 필요한 정보를 분류할 때 AI를 활용한다. 과거에는 몇 시간 동안 자료를 읽고 정리해야 했던 일을 지금은 훨씬 빠르게 처리할 수 있다.

업무의 효율이 높아졌고 시간도 많이 절약됐다. AI는 일을 하는 데 분명 유용하고 편리한 도구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되었다.

나는 과연 생각하면서 AI를 사용하고 있을까.

AI가 작성해준 내용을 충분히 검토하고 있는지, 그 답이 맞는지 다시 확인하고 있는지, 나의 경험과 판단을 더해 최종 결론을 내리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행정업무는 사람의 권리와 의무, 사업과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AI가 자료를 정리하고 초안을 작성하는 일은 도와줄 수 있지만, 법령과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책임까지 대신 질 수는 없다.

AI가 실무를 도울 수는 있어도 의뢰인의 상황을 깊이 이해하고, 어떤 방향이 그 사람에게 가장 적절한지를 결정하는 일은 결국 행정사인 내가 해야 한다.

AI에게 일을 맡기는 것과 판단까지 맡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내비게이션을 사용하며 잃어버린 감각

책을 읽으며 내비게이션을 사용하기 전과 후의 운전 습관도 떠올랐다.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에는 새로운 곳에 가기 전에 지도를 확인하고 큰 건물이나 교차로를 기억했다. 어느 길에서 방향을 바꿔야 하는지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운전하는 동안 주변의 도로와 건물을 유심히 살폈다.

한번 다녀온 길은 다음에 갈 때 어느 정도 기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차에 타면 목적지부터 입력한다. 익숙한 곳을 갈 때도 습관적으로 내비게이션을 켠다. 안내하는 길을 따라 무의식적으로 운전하다 보니 여러 번 다녀온 곳인데도 길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때가 있다.

내비게이션 덕분에 길을 잃을 가능성은 줄었지만, 스스로 길을 찾고 기억하는 능력은 약해진 것이다.

AI도 이와 비슷할 수 있다.

AI가 빠르게 답을 찾아준다고 해서 내가 그 내용을 이해한 것은 아니다. 정리된 문장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곧 나의 생각이 되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질문하고 고민하며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을 계속 생략한다면, 생각하는 힘도 길을 기억하는 감각처럼 조금씩 약해질 수 있다.

편리한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편리함 속에서 나의 감각과 판단을 완전히 내려놓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기술을 거부하는 사람이 아닌 주도권을 지키는 사람

『아날로그 인간학』이 말하는 아날로그 인간은 새로운 기술을 거부하거나 과거의 방식만을 고집하는 사람이 아니다.

AI를 사용하되 자신의 삶에 대한 주도권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 AI가 제시한 답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다시 질문하고, 자신의 경험과 가치에 비추어 판단하며, 그 선택의 결과를 책임지는 사람이다.

책의 핵심은 AI와 인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 아니다.

AI가 잘하는 일은 AI에게 맡기되 인간이 지켜야 할 영역은 분명하게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복적인 업무와 자료 정리, 초안 작성과 정보 분류는 AI가 훨씬 빠르게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이 중요한지 정하는 일,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일, 서로 다른 가치 사이에서 선택하는 일, 관계를 맺고 결과에 책임지는 일은 인간의 몫이다.

AI는 많은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지만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는 결정해주지 못한다. 설령 AI의 제안을 따랐더라도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결국 사람에게 남는다.

그래서 “AI에게 일은 맡겨도 인생은 맡기지 마라”라는 문장이 더욱 강하게 다가왔다.




아날로그 인간학습법 HLF

책의 후반부에서는 ‘아날로그 인간학습법 HLF(Human Learning Framework)’를 통해 AI 시대에도 지켜야 할 인간의 능력을 이야기한다.

그 핵심은 질문하고, 생각하고, 기준을 세우고, 결과를 감당하며, 사람과 연결되는 힘이다.

‘깨우는 사람 Question’은 이미 주어진 답을 받아들이는 데서 멈추지 않고 더 깊이 질문하는 사람이다. 좋은 질문은 단순히 답을 얻는 문장이 아니라 익숙했던 문제를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게 한다.

‘품는 사람 Thinking’은 빠르게 결론을 내리기보다 질문을 오래 품고 충분히 생각하는 사람이다. AI 시대의 사고력은 즉시 답하는 능력보다 성급한 결론을 견디며 자기 생각을 만들어가는 힘에 가깝다.

‘세우는 사람 Decision’은 수많은 선택지 가운데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는 사람이다. 결정은 단순히 하나를 고르는 일이 아니라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갈 것인지 방향을 정하는 일이다.

‘감당하는 사람 Responsibility’은 자신의 선택과 그 결과 앞에 서는 사람이다. AI가 실행을 도왔더라도 최종 판단과 책임까지 AI에게 넘길 수는 없다.

‘잇는 사람 Empathy’은 다른 사람의 감정에 무조건 동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의 상황과 삶의 맥락을 이해하려는 사람이다. 빠르게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보다 상대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관계를 깊게 만드는 능력이 더욱 중요해진다.

질문, 생각, 판단, 책임, 공감은 모두 인간만이 지켜야 할 자리와 연결되어 있다.



빠른 답보다 좋은 질문이 필요한 시대

AI는 질문을 입력하면 매우 빠르게 답을 만들어준다.

하지만 어떤 질문을 해야 하는지는 인간이 결정해야 한다. 질문이 잘못되면 아무리 정확하고 빠른 답이라도 필요한 결과를 얻기 어렵다.

우리는 흔히 답을 찾지 못해서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제대로 질문하지 못해서 문제의 본질을 놓치는 경우도 많다.

행정사로서 의뢰인의 일을 처리할 때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어떤 서류가 필요한가”만 묻는 것과 “이 사람이 정말 이루려는 목적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든다.

AI가 서류 목록과 절차는 빠르게 알려줄 수 있다. 하지만 의뢰인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고 무엇을 걱정하며 어떤 결과를 원하는지 이해하려면 사람의 대화와 공감이 필요하다.

좋은 질문은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고 사람을 깊이 이해하게 하는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편리함과 인간다움 사이에서

우리는 이미 AI 이전의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

AI는 앞으로 더 많은 분야에서 사용될 것이고, 지금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사람의 일을 도울 것이다. 따라서 AI를 무조건 두려워하거나 거부하는 태도만으로는 변화하는 시대를 살아가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AI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이다.

AI가 만들어준 답을 나의 생각으로 착각하지 않는 것, 중요한 결정 앞에서 나만의 기준을 세우는 것, 결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것, 사람의 감정과 사정을 숫자와 자료만으로 판단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오히려 인간의 질문과 가치, 관계와 책임은 더욱 중요해질 수 있다.

AI가 우리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더 빠르게 답하는 시대에는 무엇을 아느냐보다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고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인간을 구별하는 힘이 될 것이다.



AI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에게

『아날로그 인간학』은 AI를 사용하는 특정 직업군만을 위한 책이 아니다.

회사에서 보고서를 작성하는 사람,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 사업을 운영하는 사람, 글과 그림을 만드는 사람, 행정과 상담업무를 하는 사람은 물론 일상에서 검색과 내비게이션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볼 만하다.

이 책을 읽는다고 AI 사용을 줄이거나 편리한 기술을 모두 포기할 필요는 없다.

다만 AI가 대신해준 일이 많아질수록 내가 직접 생각하고 판단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더욱 분명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나는 앞으로도 행정업무를 하면서 AI를 계속 활용할 것이다. 자료를 정리하고 초안을 만들며 반복적인 일을 줄이는 데 AI의 도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AI가 제시한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확인하며, 나의 경험과 전문성을 더해 판단하려고 한다. 의뢰인의 말을 직접 듣고 그 사람의 상황을 이해하며 최종 결정에 대한 책임도 내가 져야 한다.

컴퓨터가 처음 등장했을 때도 사람들은 새로운 기술을 배우며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AI라는 또 다른 거대한 변화 앞에 서 있다.

도구는 달라졌지만 중요한 것은 여전히 같다.



AI에게 일은 맡길 수 있어도 질문과 판단, 관계와 책임, 그리고 나의 인생까지 맡겨서는 안 된다.

『아날로그 인간학』은 편리함에 익숙해져 생각하는 과정까지 생략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한 책이었다. AI와 경쟁하는 방법이 아니라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면서 AI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생각하게 했다.

AI를 자주 사용하는 사람일수록 한 번쯤 자신의 사용 습관과 삶의 주도권을 점검하며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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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마지막 피부과
박상영.박의정 지음 / 나비의활주로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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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증상 너머 피부가 보내는 신호를 읽다/환자의 생활과 마음까지 살피는 두 의사의 치료 일지

『당신의 마지막 피부과』 / 박상영·박의정 지음 / 나비의활주로


피부는 우리 몸에서 가장 가까이 있고 누구의 눈에나 쉽게 보이는 부분이다.

작은 뾰루지 하나에도 신경이 쓰이고 피부가 붉어지거나 가려우면 일상생활까지 불편해진다. 다른 질환과 달리 증상이 겉으로 드러나다 보니 피부질환을 앓는 사람은 몸의 고통뿐 아니라 타인의 시선과 마음의 상처까지 함께 견뎌야 할 때가 많다.

그래서인지 『당신의 마지막 피부과』는 나에게 무척 가깝게 다가온 책이었다.

내 남동생이 오랫동안 아토피 피부염으로 고생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았고, 첫째 아이도 여드름 피부라 평소 피부질환과 관리법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그동안 내가 피부를 주로 겉으로 드러난 증상만으로 바라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증상 너머 원인을 해독하는 두 의사

책의 표지에는 ‘증상 너머 원인을 해독하는 두 의사의 치료 일지’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처음에는 ‘해독’이라는 말이 낯설고 새롭게 느껴졌다. 이 책에서 말하는 해독은 단순히 몸속의 독소를 제거한다는 의미라기보다, 피부에 나타난 증상을 하나의 신호로 보고 그 뒤에 숨은 원인을 세심하게 읽어낸다는 의미에 가깝다.

같은 피부질환이라도 사람마다 생활환경과 식습관, 수면, 스트레스, 가족관계와 마음의 상태가 다르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증상만 잠시 가리는 것이 아니라 왜 피부 장벽이 무너졌는지, 왜 질환이 반복되는지, 환자의 생활 속에서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를 함께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식품영양학을 전공한 나는 평소에도 음식과 생활 습관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환자의 피부만 보는 것이 아니라 식습관과 생활환경까지 폭넓게 살피는 두 의사의 진료 방식이 더욱 마음에 와닿았다.

물론 피부질환의 원인과 치료법은 사람마다 다르므로 전문의의 정확한 진단이 우선되어야 한다. 이 책도 하나의 방법을 모든 환자에게 적용하기보다 환자 한 사람의 삶을 자세히 이해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피부과 전문의 박상영·박의정

박상영·박의정 두 저자는 현재 진주고운피부과 대표원장으로 환자들을 진료하고 있다.

박상영 원장은 피부과 전문의이자 피부과학 석사로 국군함평병원 피부과장을 지냈다. 대한피부과학회와 대한피부과의사회뿐 아니라 대한아토피학회, 대한백반증학회, 대한건선학회, 대한여드름학회 등 다양한 전문학회의 정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박의정 원장은 경상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전공의 과정을 거쳐 전문의 자격을 취득했다. 사천삼성병원 진료원장과 사천중앙병원 진료부장, 소예피부과 원장을 지냈으며 임상레이저, 비만·미용 치료, 미용성형레이저 분야의 여러 학회에서 정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두 사람은 같은 진료실에서 환자를 만나지만 책 속에서 들려주는 목소리와 경험은 조금씩 다르다. 그럼에도 두 저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진료의 방향은 서로 닮아 있다.

화려하고 새로운 치료법을 자랑하기보다 환자를 더 깊이 이해하려 하고, 치료의 속도를 높여 더 많은 환자를 받기보다 같은 이유로 다시 병원을 찾지 않도록 돕는 것을 의사의 본분으로 여긴다.

“피부과는 무너진 피부 장벽을 다시 세워, 환자의 평범한 일상을 되찾아주는 곳”이라는 책의 문장이 두 의사의 진료 철학을 잘 보여준다.



생애주기를 따라 읽는 여섯 가지 피부 이야기

책은 피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에서 출발해 아이와 청소년, 성인과 노년의 피부 문제까지 총 6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피부과에 대한 오해와 진실’에서는 가려움의 고통, 레이저 치료에 대한 오해, 피부와 약의 관계, 완치와 관리의 차이를 설명한다. 우리가 피부과 진료를 받으며 흔히 품었던 궁금증을 먼저 풀어주는 부분이다.

2부 ‘부모와 의사가 함께 지켜야 할 아이의 피부’에서는 아이의 피부질환을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죄책감을 느끼는 부모들에게 말을 건넨다. 올바른 진단의 중요성과 아토피 피부염을 꾸준히 관리하는 방법, 피부색의 차이로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의 이야기도 담겨 있다.

3부 ‘격동의 사춘기 피부, 뿌리부터 바로잡기’에서는 사춘기 피부와 여드름을 다룬다. 빠른 치료 속도보다 올바른 방향이 중요하다는 점, 피부가 보내는 신호와 냄새의 의미, 사춘기 아토피 치료가 어려운 이유 등을 실제 진료 경험과 함께 풀어낸다.

첫째 아이가 여드름 피부라서 나는 이 부분을 더욱 주의 깊게 읽었다. 여드름은 겉으로 보이는 염증만의 문제가 아니라 성장기의 생활 습관과 감정, 자존감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4부 ‘삶의 무늬가 새겨지는 시간, 성인기 피부 이야기’에서는 반복되는 피부질환과 면역력, 바이러스, 점과 흉터, 무좀과 두드러기 등 성인이 자주 경험하는 피부 문제를 살펴본다.

5부 ‘당당함을 채워주는 미용 치료의 본질’에서는 피부가 달라지며 삶과 자신감도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예뻐지고 싶은 마음을 가볍게 평가하지 않으면서도, 미용 치료는 건강한 피부와 올바른 인식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6부 ‘생명을 지키고 일상을 구하는 일’에서는 피부과 의사의 역할이 단순히 외모를 가꾸는 데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피부암과 만성질환, 생사를 가르는 판단의 순간과 끝이 보이지 않는 두드러기를 치료하는 과정이 담겨 있다.

마지막에 실린 ‘의사는 답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답을 찾아가는 사람’이라는 제목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처럼 느껴졌다.



피부질환은 몸뿐 아니라 마음도 아프게 한다

남동생이 아토피 피부염으로 고생하는 모습을 오랫동안 보면서 피부질환이 단순한 가려움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려워서 잠들지 못하고, 긁어서 상처가 생기며, 좋아진 듯하다가 다시 악화되는 과정이 반복된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옷을 고르고 외출을 망설이는 일도 생길 수 있다. 환자뿐 아니라 곁에서 지켜보는 가족도 함께 지치고 때로는 자신을 탓하게 된다.

책에는 “제가 잘못일까요?”라고 묻는 부모들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아이의 피부질환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며 자책하는 부모들에게 두 의사는 죄책감보다 정확한 진단과 꾸준한 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환자의 증상만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질환으로 환자와 가족이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살피는 모습에서 두 의사의 정성이 느껴졌다.

첫째 아이의 여드름도 마찬가지다. 어른의 눈에는 성장기에 흔히 나타나는 증상처럼 보여도 아이에게는 외모와 자신감에 영향을 미치는 큰 고민일 수 있다.

좋은 치료는 피부의 변화만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가 느끼는 불편함과 두려움, 상처받은 마음까지 이해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료보다 관리, 속도보다 방향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빠르게 증상을 없애는 일보다 질환이 반복되는 이유를 이해하고 환자가 스스로 관리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이었다.

현대인은 빠른 결과에 익숙하다. 피부질환도 약을 바르거나 시술을 받으면 곧바로 깨끗해지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피부는 오랜 생활 습관과 환경, 몸의 변화가 함께 드러나는 곳이기에 단시간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치료에는 환자의 인내심과 의사의 섬세함이 함께 필요하다.

의사는 환자가 말하는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고 원인을 찾아야 하며, 환자는 자신의 생활을 돌아보면서 꾸준히 관리해야 한다. 치료의 주체가 의사 한 사람만이 아니라 환자와 의사가 함께하는 과정이라는 점이 이 책을 통해 잘 전달된다.

화려한 시술이나 빠른 효과보다 평범한 일상을 되찾아주는 진료, 환자가 같은 이유로 다시 병원을 찾지 않도록 돕는 진료를 지향하는 두 의사의 태도가 따뜻하게 다가왔다.



피부질환으로 고민하는 사람과 가족에게

『당신의 마지막 피부과』는 특정 피부질환의 치료법만을 정리한 의학 안내서가 아니다.

아토피와 여드름을 비롯해 백반증, 건선, 탈모, 무좀, 두드러기와 피부암까지 다양한 피부 문제를 다루지만, 그 중심에는 언제나 환자의 삶이 놓여 있다.

피부질환으로 오랫동안 고생하고 있는 사람, 아이의 아토피나 여드름 때문에 고민하는 부모, 반복되는 증상의 원인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은 사람에게 권하고 싶다. 피부과를 미용 시술을 받는 곳으로만 생각했던 사람에게도 피부과 의사가 어떤 순간에 생명을 지키고 환자의 일상을 되찾아주는지 알려주는 책이 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피부는 단순히 몸을 감싸는 표면이 아니라 우리의 건강과 생활, 감정이 함께 기록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에 보이는 증상만 없애려고 하기보다 피부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귀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그 신호를 함께 해독하며 끝까지 답을 찾아주는 의사를 만나는 일도 중요하다.

환자의 피부뿐 아니라 생활과 마음까지 바라보는 두 의사의 기록.

『당신의 마지막 피부과』는 좋은 피부는 환자의 인내심과 의사의 섬세함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임을 알려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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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오늘이 모여 비로소 우리가 되었다
이원진 지음, 장한나 그림 / 좋은땅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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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수많은 오늘이 모여 비로소 우리가 되었다/지친 마음에 싱그러운 온기를 건네는 시집/글 이원진 · 그림 장한나

『수많은 오늘이 모여 비로소 우리가 되었다』는 제목에서부터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시집이다.

지금의 우리는 단 하루 만에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수많은 오늘을 지나며 기뻐하고, 사랑하고, 때로는 아파하고 넘어졌던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지금의 우리가 되었다.

이 책은 그렇게 살아온 우리의 평범한 오늘과 마음을 다정하게 바라본다.




평범한 말 속에서 발견하는 위로

이원진 시인은 거창한 문장보다 평범한 이야기 속에 가장 눈부신 감동과 위로가 숨어 있다고 믿는다고 한다. 살아가다 지친 한 사람에게 삶의 작은 모퉁이에서 발견한 온기를 전하고 싶다는 시인의 마음이 시집 곳곳에 담겨 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의 시들은 어렵거나 무겁게 다가오지 않는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만남과 이별, 외로움과 기다림, 사랑과 위로를 담담하고 편안한 문장으로 풀어낸다.

목차에는 「서로를 비춰 주자」, 「기대도 돼」, 「잘 사는 방법」, 「쉼터」, 「나의 위로법」, 「행복 다음 불행이 아니라 불행 다음 행복이야」, 「소나기 같았어」, 「참 고생 많았다」처럼 제목만 읽어도 마음을 붙잡아 주는 시들이 담겨 있다.

짧은 시 한 편을 읽었을 뿐인데 누군가 곁에서 “괜찮아”, “기대도 돼”, “오늘도 참 고생 많았어”라고 말해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시뿐만 아니라 그림도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이 시집은 시만큼이나 그림도 산뜻하고 따뜻하다.

파란 하늘과 초록빛 풍경, 노란 우산, 보랏빛 꽃밭처럼 밝고 싱그러운 색감의 그림들이 시의 분위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장한나 작가의 그림은 시의 내용을 그대로 설명하기보다 한 편의 시를 읽으며 마음속에 떠오르는 장면을 조용히 보여주는 것 같다. 시를 먼저 읽고 그림을 바라보기도 하고, 그림을 천천히 감상한 뒤 다시 시를 읽어보게 된다.

비가 내리는 골목길에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이나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 해가 저무는 풍경과 잔잔한 꽃밭은 시가 전하는 감정을 더욱 깊게 느끼게 한다.

때로는 많은 말보다 한 장의 그림이 마음을 더 편안하게 해줄 때가 있다. 이 책의 그림이 그렇다. 힘든 마음을 억지로 밝게 만들려 하지 않고, 그저 곁에 조용히 머물며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시가 문장으로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면 그림은 따뜻한 색과 풍경으로 또 다른 위로를 건넨다. 시와 그림이 서로를 비춰주면서 책 전체가 한 권의 따뜻한 그림책처럼 느껴졌다.

글만 읽었을 때보다 마음에 더 오래 남고, 지친 날에는 그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마음에 남은 시, 「우리의 기적」

이 시집에서 나에게 가장 오래 머문 작품은 「우리의 기적」이었다.

이 시는 나와 너는 세상 어디에도 다시 존재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며, 그렇게 단 하나뿐인 두 사람이 서로 만나 ‘우리’가 되는 일을 이야기한다.

혼자일 때는 외롭지만 두 사람이 만나면 둘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말이 생기고, 서로에게만 전할 수 있는 마음과 추억도 만들어진다. 시인은 이토록 유일한 두 존재가 만나는 일을 기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자주 잊고 살아간다. 늘 곁에 있다는 이유로 만남을 당연하게 여기고, 함께했던 수많은 오늘이 얼마나 큰 기적인지 미처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 가운데 서로를 알아보고, 같은 시간을 보내고, 마음을 나누며 ‘우리’가 된다는 것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다.

「우리의 기적」을 읽으며 지금 내 곁에 있는 가족과 친구, 나를 아끼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들과 함께 보낸 평범한 하루가 사실은 아주 특별한 기적이었음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시 옆에 그려진 마주 앉은 두 사람의 그림도 오래 바라보게 되었다. 평범하게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이지만, 어쩌면 그런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며 만나게 되는 가장 소중한 기적일 것이다.


내가 마지막 문장을 완성해보는 시, 「진입금지」

두 번째로 기억에 남은 시는 「진입금지」였다.

이 시가 특별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마지막 문장이 완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밑줄이 그어져 있어 독자가 자신의 마음으로 빈자리를 채울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시인이 모든 문장을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담아 한 편의 시를 직접 완성하게 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진입금지’라는 제목만 보면 누군가 다가오지 못하도록 마음 앞에 선을 그어놓은 모습이 떠오른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문을 닫고, 가까이 오지 말라는 표지를 세워둔 마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 마지막 빈칸에 이렇게 적고 싶었다.


환영합니다.

또는,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겉으로는 진입금지라고 써 붙여놓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누군가가 그 경계를 넘어 다가와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살아가다 보면 상처받지 않기 위해 사람과 거리를 두고 마음의 문을 닫을 때가 있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단단한 벽을 세우지만, 그 안에서는 여전히 나를 이해해줄 사람과 따뜻한 마음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진입금지’라는 차가운 말의 끝을 거절이 아닌 환영과 기다림의 말로 완성하고 싶었다.

독자가 어떤 문장을 적느냐에 따라 시의 마지막 분위기도 달라질 것이다. 누군가는 단호한 이별의 말을 적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을 적을 수도 있다.

시인이 남겨둔 밑줄은 단순한 빈칸이 아니라 독자의 이야기가 들어갈 수 있도록 마련해둔 작은 자리처럼 느껴졌다. 시를 읽는 데서 끝나지 않고 나의 문장으로 시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 참 좋았다.


지치고 힘든 날 펼치고 싶은 시집

이 책은 전체적으로 싱그럽고 풋풋하다. 맑은 날의 파란 하늘과 초록빛 나무처럼 산뜻한 기분을 전해준다.

그렇다고 밝고 예쁜 감정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외로움과 이별, 후회와 슬픔처럼 우리가 살아가며 피하기 어려운 마음들도 솔직하게 담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감정에 오래 머물게 하지 않는다. 소나기가 지나면 다시 맑은 하늘이 나타나듯, 지금의 아픔도 언젠가는 지나갈 것이라고 조용히 이야기해준다.

그래서 기분 좋은 날 읽으면 더욱 싱그럽고, 지치고 힘든 날 읽으면 한층 따뜻하게 느껴지는 시집이다. 한 번에 끝까지 읽기보다 마음이 무거운 날이나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 한 편씩 천천히 꺼내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수많은 오늘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고, 나와 너의 오늘이 모여 비로소 우리가 되었다.

「우리의 기적」을 통해서는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만나 ‘우리’가 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기적인지를 생각했다. 「진입금지」를 통해서는 닫힌 마음속에도 누군가를 환영하고 기다리는 자리가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오늘 하루가 평범하고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그 하루들이 쌓여 언젠가 소중한 추억과 삶이 된다는 것을 이 책은 말해준다.

지금 조금 지쳐 있는 사람, 누군가의 따뜻한 말이 필요한 사람, 가까운 이들의 소중함을 다시 느끼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시집이다.

책장을 덮은 뒤에는 나도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말을 한마디 더 건네고 싶어졌다.

시뿐만 아니라 그림까지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책.

오늘을 함께 살아가는 우리가 서로에게 이미 하나의 기적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조용히 알려주는 시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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