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게 나이 든다는 것
안젤레스 에리엔 지음, 김승환 옮김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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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약 3년 전『소크라테스의 변론』(플라톤 지음, 박종현 역주, 서광사, 2003)을 읽으면서「참 지성인, 소크라테스」라는 글을 작성한 바 있다. 소크라테스의 삶이 조선의 선비의 삶과 많이 닮아 있음에 놀라기도 하고 흥미를 가지기도 하면서 그 관련성을 검토해가면서 소크라테스의 지성인다운 모습을 추적해보는 작업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당돌하다 싶은(?) 작업이었지만, 나에게는 무척 의미있는 작업이었다. 아름다운 삶이 과연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파고 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가 죽는 장면과 퇴계 이황 선생이 생을 마감하는 장면이 묘하게 오버랩되었던 그 기억은 지금도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의 나이가 어떻든 지금 사는 이 시간 뒤로는 모두 후반인 셈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될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 한 가지는 알고 있다. 우리는 인생의 후반을 아름답게 살고 싶다는 것. 아름다운 삶. 그것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이 책은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추구해온 그 의문을 해결하는 작업에 대한 하나의 답이다. 문이라는 소재를 활용하여 아름다운 삶이 과연 무엇인가를 추적해들어가는 독특함을 보이고 있다. 각 문에는 나름의 과제가 주어지고 우리는 끊임없이 도전을 받는다. 그리고 그 도전을 넘어서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들, 그리고 나를 되돌아보며 실천해나가는 것으로 매듭지어진다. 그렇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과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도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는 큰 선물들이 주어질 것이고, 그 선물들 또한 끊임없는 반추와 실천의 과정이 있어야만 온전히 나의 것이 됨을 이 책은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온전히 나의 것이 되어야 할 선물들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여기서 다시 문의 역할에 주목해봐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디를 들어갈 때 어김없이 문을 통과해야 한다. 문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경계, 단절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면과 외부의 접촉이요, 소통과 통합의 장이며, 조화의 세계임을 이 책의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문득 ‘집 안에서 우주를 본다’는 옛 말씀이 생각나 순간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저자는 각 문을 통과해 걸어가는 길을 진정한 나를 향한 돌아감의 긴 여행으로 바라보고 있다. 곧, 사회적 가면을 벗고 참된 나를 찾아가는 여행, 몸의 소중함을 알고 있는 그대로의 몸을 인정하는 여행, 관계 속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을 용서와 이해로 풀어가는 어려운 여행, 창조와 생산과 조력을 쉼없이 하는 여행, 가식과 허위를 깨뜨리고 신뢰와 인품과 지혜를 쌓아가는 여행, 행복과 만족과 평화를 찾아가는 여행, 그리고 궁극에는 모든 것을 초연하고 해탈하는 여행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이러한 참 나를 찾아가는 긴 여행을 동·서양의 고전과 명인들의 명언을 넘나드는 해박한 식견과 탁월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특히 이 거룩하고 아름다운 여행을 발에 비유하여 발에 관한 명언들을 각 문의 끝에 배치한 것은 참으로 놀랍다.
 
바로 그렇다. 아름다운 삶.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 속에서 얻는 행복과 사랑. 그것은 어찌보면 단순할 수도 있지만, 허상의 ‘나’를 버리고 참 ‘나’를 찾아가는 인류의 거룩하고 위대한 여정의 한 디딤돌이기 때문에 세상 그 어느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문득 선비를 떠올렸다. 유학의 경전 가운데『대학』(大學)이라는 책이 있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내용이 바로 여기에 실려 있다. 그런데 수신이 시작이 아니다. 나를 갈고 닦기 위해서는 그 앞의 과정들이 있다. 먼저 세상 사물들의 모든 이치를 지극히 탐구한 뒤에라야 앎이 지극해질 것이고, 그런 뒤에 뜻이 성실해지면 마음이 바로 설 것이며, 마음이 바로 선 뒤에라야 비로소 자신의 몸이 닦여진다 했다.

그렇다. 그런 자신과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과 치열한 탐구, 그리고 나름의 끊임없는 창조가 있은 뒤에라야 나의 중심은 바로 설 것이며, 바로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헛됨을 버리고 참됨을 찾아간다는 것. 그런데 유의할 것은 이것이 모든 것을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삶을 의미있게, 치열하게 살아가는 속에서 참된 나를 찾아가라는 뜻이다. 불교의 유명한 ‘색즉시공’(色卽是空)의 참 뜻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다. 우리 선비들의 삶이 그렇게 그리운 이유도 다 여기에 있음이리라.

물론 이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지금의 나를 온전히 가누기에도 힘든데 참 나를 찾아가는게 무슨 의미가 있나?”, “참 나를 찾아가면 물질적으로 뭐 나오나?” 그렇다. 나 또한 이 책의 문들이 상징하는 깊은 상징, 은유, 비유를 소화할 능력은 아직 없다. 또 이런 이야기를 하는 나조차도 뜬구름 잡기 하는 것이 아닌가도 모른다. 이상을 실현하는 것은 참으로 멀고도 고단한 여정이다. 하지만 인류는 그 멀고도 고단한 여정을 지난 수백만 년 동안 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해나갈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좀 더 아프지 않게, 좀 더 아름답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나가고 있다.

그리고 나는 위의 이야기가 뜬구름 같다고 비웃기도, 또 비관적으로도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인류의 영원한 큰 스승인 퇴계 이황 선생이나 마더 테레사 수녀, 2차대전 당시 수많은 사람들의 육체와 정신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사람 죽이기를 밥먹듯 했던 일본군, 그리고 지금의 ‘나’. 시대상으로, 인간상으로도 너무도 달라보이는 이들 모두 사실은 나름의 삶의 길을 걸어온, 그리고 걷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그 선택의 키는 전적으로 나 자신에게 쥐어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오래 두고 끊임없이 나를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데 중요한 삶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할 것이라 여겨진다.

* 참 고 문 헌 * (이 서평을 쓰는데 약간 활용하였습니다.)

성백효 역주,『현토완역 대학·중용집주』, 전통문화연구회, 1991.
플라톤 지음, 박종현 역주,『(플라톤의 네 대화편)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서광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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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2008-04-08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훌륭해요! ^^

장미의 이름 2008-04-09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emhy311 2008-04-21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로 뽑히신 글 뒤늦게 보고, 늦게나마 축하 합니다.
그리고, 혹시 글 보시면 네이버 쪽지로 연락 주실 수 있으신지요 ?
제가 문의 드리고 싶은 점이 있어서 부탁 드립니다.
북 카페 닉네임이 문고인 이고 네이버는 emhy311 이나 문고인 으로
쪽지 부탁 합니다.
시한은 빠르수록 좋겟지요 ?
그럼 부탁 드리며..

장미의 이름 2008-04-22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격려 감사합니다. 방금 이렇게 보고 네이버 쪽지로 보내드렸습니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 사랑에 대한 설레고 가슴 아픈 이야기
김성원 지음 / 넥서스BOOKS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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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자연은 참 신비하다. 긴 겨울이 언제였나 싶게 벌써 봄이다. 그렇게 포근한 봄을 지나면서 만물은 태어나고, 여름을 거치며 약동하며, 가을에 이뤄져 거두면 또 다시 고요한 겨울이 이어져 그렇게 순환의 길을 걷게 된다. 그렇게 길러진 만물의 신비는 또 어떠할까? 어김없는 생멸의 과정을 거치며, 그것을 고스란히 다음 세대에게 물려준다. 그럼으로써 세상은 영속(永續)한다. 그것은 사랑과 이별의 끊임없는 반복과 순환 속에서 이뤄지는 오묘함이다.

 

사랑과 이별. 그들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서로 만날 수 없는 것임에도 그들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세상 사람들 누군들 이별을 좋아하고 사랑을 싫어할리 있으리요마는 자연의 법칙이, 만물이 걷는 생멸의 길의 법칙이 그러한들 이별이란 없을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여느 드라마의 제목처럼 사랑과 이별에 대처하는 우리 나름의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나는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해 솔직히 잘 모른다. 짝사랑의 경험조차 전혀 없는 나에게 사랑과 이별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자체가 어쩌면 어이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과 이별의 주체가 사람이라면, 사람 또한 만물에, 자연에 속하는 이들이라는 것이라면, 또 실전에 약한 사람이 훈수도 잘 두는 것처럼, 사랑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여러 조언을 해주던 경험을 미뤄본다면 굳이 사랑과 이별을 이야기하지 못할 것도 없다고 본다.

 

책을 쓴 저자의 이력을 잠시 보았다. 라디오 작가.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수많은 사랑과 이별의 사연을 접하며 기뻐하고 슬퍼하며 미워하고 아파했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저자 또한 사랑과 이별의 법칙이 결국 세상이 걷는 법칙과 다르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사랑의 시작, 사랑의 진행과 쇠퇴, 사랑의 죽음과 이별, 그리고 다시 피어오르는 사랑의 싹. 저자가 펼쳐놓고 있는 이야기의 순서가 어쩜 저리도 절묘할까.

 

솔직히 그렇게 쉬운 이야기들은 아니었다. 역사라는 수단으로나마 사랑이라는 것을 접하는 나에게 절절한 감성과 온기가 느껴지는 사랑 이야기가 쉽게 다가올 리 없었다. 공감이 가지 않는 부분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궁극의 법칙은 같다는 것에서 곱씹어봤을 때 많은 공감이 더 많이 갔던 것도 사실이었다.

 

사랑과 이별. 이것이 없었다면 인류의 역사는 참으로 허전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것은 비단 남녀만이 아닌 인류의 영원한 주제이자 과제였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단지 나를 희생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주는 것만으로? 그것은 미생지신과 같은 어리석음일 뿐이다.

 

왜 이런 어리석음을 범할까? 우리는 흔히 나 자신의 마음을 잘 알고 상대의 마음은 잘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틀렸다. 우리는 나 자신의 마음도 모른다. 우리의 눈은 바깥으로 달려 있다. 우리를 볼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결국 나는 나 자신을 가장 모른다. 그렇기에 나를 보려면? 거울이 필요할 것이다. 그럼 거울이 없다면? 결국 상대의 눈, 마음일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나 자신의 마음이 어떤가를 아는 것, 그리고 상대와의 보조를 맞춰나가는 것이 아름다운 사랑의 길이 아닐까? 그 기초는 믿음이다. 맹목적인 믿음이 아닌, 시비가 명확한 믿음.

 

그러나 아직은 모르겠다. 사랑과 이별의 깊이를. 특히 이별. 하지만 이 책의 수많은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사랑과 이별에 대한 많은 생각을 가지며 정리할 수 있게 해준다. 언젠가 나도 농익은 경험을 하게 된다면 더 잘 알 수 있겠지. 감성이 충만한 사랑, 이별 이야기를 함께 하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은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사족] 역사를 공부하면서 느끼는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공부를 시작한다. 그런데 그 사람을 제대로 사랑하기 위해 그들은 차가운 머리로 공부한다. 역설적이지만 그렇다. 그래서 그들이 내뱉는 그 차가운 한 마디는 세상 어떤 사랑에 대한 담론보다도 더 절절하게 다가올 때가 많다. 이 책에 나오는 수많은 이야기가 사실은 역사책에서 보았던 것들이 적지 않다. 다만 역사책 속의 이야기들은 너무 차갑다고 해야 하나.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면서 자신의 약점을 반성할 때 성장한다. 과거를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이 반성할 줄을 안다. (한영우,『다시 찾는 우리역사』, 경세원, 1997, 5쪽)


…… 사랑은 관심에서 잉태되어 느낌으로 발육된다. 하지만 거기에 머물러서는 성장하지 못한다. 알아야 사랑도 깊어진다. 깊은 이해와 인식의 뒷받침이 없이 어설피 알거나 잘못 알고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환상이요 거짓이다. …… (홍순민,『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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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야마 동물원에서 배우는 창조적 디자인 경영
이병욱 지음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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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세계적인 문화도시다.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600년 이상 계속되어온 수도로서의 면모 속에 수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산업화를 경험하는 속에서 서울은 문화와 품격을 잃었다. 지금 서울 사람들은 서울이 얼마나 뛰어나며 아름다운 도시인가를 잘 모른다. 21세기가 들어선 지금에서야 비로소 그 진가를 알기 시작했다. 산업화의 상징이었던 청계천이 50년도 되지 않아 복원된 것은 그 상징이라 하겠다. 그 속에서 발현된 다지인의 힘이란 실로 무한함을 느끼게 한다.

경영에 관심이 없는 나에게 이 책은 무척 낯설게 느껴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매우 낯익기도 하다. 왜 낯이 익을까? 아마도 일상 솟에서 이 디자인이라는 개념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이는 비단 나만의 경우는 아닐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창조된 디자인을 향유하고 구매하는 당사자이다. 그런 우리에게 디자인이 낯익은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리고 그 낯익은 것의 힘은 시간이 흘러갈수록 더 강해질 것이다.

이 책은 야사히야마 동물원의 사례를 통해 디자인 경영이 무엇이고, 왜 중요하며, 어떻게 해나가야 할 것인지를 풍부한 사례를 들어가며 소개하고 있다. 왜 다 스러져가던 동물원이 다시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서고 그 신화(?)가 계속 이어지고 있을까? 이 책은 그 원인을 통해 우리의 디자인 경영의 방향을 모색해보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왜 야사히야마 동물원이 성공했는가를 나름대로 정리해보았다.

첫째, 본질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하지만 매우 중요하다. 동물원은 동물이 없다면 그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다. 놀이기구는 다른 유원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다른 놀이동산에서 얼마든지 스릴 있고 재미있는 놀이기구를 탈 수 있는데 굳이 동물원에 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서울의 경복궁(景福宮)을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경복궁은 본래 백악을 든든한 배경으로 자연과 어우러진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아름답고 장엄한 궁궐이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훼손과 왜곡으로 그 본연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사람들은 더 이상 경복궁을 궁궐로, 하나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기억하지 않았다. 그저 국립중앙박물관(조선총독부는 철거되기 전까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였다.)이 있는 곳, 공원 같은 곳으로 기억될 뿐이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철거 이후 서서히 그 본연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는 경복궁은 비로소 우리의 마음 속에 우리의 궁궐, 우리의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거기에 경복궁 본연의 의미를 살릴 수 있는 궁중 의례 및 행사도 수시로 열리고 있다. 그러한 노력이 더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모으고 있으며, 한결같이 그 아름다움과 찬사를 늘어놓는다. 산업화의 상징인 청계천이 복원된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찾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둘째, 그러한 본연의 모습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노력이다. 디자인을 만드는 주체의 입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아이디어도 주체의 사고방식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끈질긴 노력이 없다면 도로아미타불에 지나지 않는다. 야서히야마 동물원의 직원들은 그 점을 언제나 잊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더라도 자신이 동물원에 소속된, 동물원 본연의 모습을 간직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그 동물원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으며, 그 속에서 발전해나갈 수 있다는 밑거름이 되었다.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과 사랑, 자부심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야사히야마 동물원은 잘 보여주고 있다. 

셋째, 디자인을 만드는 주체의 입장에서 보았다면 이번에는 그 객체, 곧 고객의 입장도 보아야 할 것이다. 과연 고객은 어떤 꿈과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내가 고객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이 책에 든「스타워즈」의 사례는 그것을 너무나 잘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심형래 감독의 노력이 비록 한계가 있다고 해도 중요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최근 한국 영화는 좋은, 아름다운 작품이 많이 선보이고 있다. 그러나 과연 아이들의 꿈, 미래를 담아내는 작품이 얼마나 있을까. 비록 심형래 감독의 작품이 아직 그 점에서는 많은 미숙함이 보인다고 해도, 그 꿈과 미래를 잊지 않고 그 길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관광을 보자. 철저한 고객 중심의 입장이 되어야 한다. 경복궁 관리사무소 직원이 관광 대상이 아니다. 평범한 국내외 관람객들이 바로 그 주체이다. 그들이 불편하다고 느끼면 그 관광사업은 실패한 것이다. 충실한 고객의 목소리를 담는 것, 디자인 경영의 중요한 열쇠가 아닌가 생각한다.

결국 디자인 경영은 그것을 만드는 사람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다양한 참고문헌과 수많은 사례들의 깔끔한 정리도 돋보인다. 아쉽다면 문화, 관광 부분의 사례 소개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어떻게 보면 이 부분이 미래의 디자인 경영의 핵심 산업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저자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그만큼 우리가 다양한 문화 컨텐츠 개발에 소홀했다는 반증도 될 것이다. 

나는 현재 한국역사학교를 꿈꾸며 그에 관한 나름의 디자인을 설계 중인데, 그 과정에서 디자인은 사람의 꿈과 그 꿈에 대한 믿음, 이해의 바탕에서 그 무한한 힘을 발현함을 다시 느끼게 된다. 이 책은 거기에서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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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건 이야기 - 누구에게나 두 번째 기회는 있다
케네스 블랜차드 외 지음, 조천제.김윤희 옮김 / 21세기북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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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도서 : 켄 블랜차드·윌리 암스트롱 옮김, 조천제·김윤희 옮김,『멀리건 이야기』, 21세기 북스, 2007.

 

사람이란 무엇일까?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왜 사람에 울고 웃을까?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늘 갖는, 그러나 제각기 다른 답을 지닌 이 본질적인 물음들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가 오늘의 지구상의 수많은 문명을 만들어낸 원동력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이 믿음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사람 관계라는 것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한다. 더욱이 역사를 공부하며 그 속에서 무수한 상을 지닌 사람들을 만나기에 더욱 민감하게 다가오지 않는가 여겨진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사람 관계란 무엇일까?

 

멀리건. 부끄럽지만 이 책을 알게 되어 처음 알게 된 용어이다. 사람에게 주어지는 또 한 번의 기회. 그렇다. 그 기회 속에 사람 관계를 풀어나가는 마법의 열쇠 하나가 숨겨져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불현듯 홍대용(洪大容)이 지은『의산문답』(醫山問答)을 읽은 기억이 생각났다. 그의 문집『담헌서』에도 실려 있는『의산문답』은 의무여산에서 허자(虛子)와 실옹(實翁)이 나눈 문답을 엮은 것으로 사실상 자문자답이다. 물론 폴이 윌 던과 대화를 나눈 것이라지만 마치 폴이 자문자답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대화 속에서 진정한 깨달음을 얻어가고 있는데, 그 방식이『의산문답』과 정말 비슷하다.

 

솔직히 폴과 같은 인물은 낯설지 않을 만큼 우리 주변에 많다. 그런데 폴은 스스로 자신이 삶을 잘못 살아왔다는 깨달음을 얻어가고 있다. 왜 그랬을까? 성공과 실패라는 기준에 대한 집착. 그런데 여기에는 실로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성공과 실패라는 단어를 쓰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공한 사람’, ‘실패한 사람’이라 부르는 것은 역사 속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나는 성공과 실패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이 진정한 성공으로 가는 길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성공과 실패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물질적인 것일까, 아니면 정신적인 것일까, 그 둘 다일까, 그도 아니면 둘 다 아닐까? 성공과 실패가 나에게만 한정된 것일까, 아니면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주는 것일까? 현재의 시점에만 해당되는 것일까, 아니면 역사 속에서 도도한 흐름으로 이어져 온 것일까? 가벼운 것 같지만 결코 가벼운 대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를 이 책은 우리에게 던져 주고 있다.

 

그 성공과 실패의 본질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바로 사람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 관계라는 것을 꼭 얼굴을 보고 만나서 사귀고 하는 것에 한정를 지을 필요는 없다. 그 사람이 지은 책을 통해서도, 그 사람이 죽은 뒤 남겨진 평가나 행적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으며, 그 속에서 관계도 맺어지는 것이다. 그 관계가 명확하고 제대로 이뤄진 이들을 우리는 특별히 기억하며, 그래서 그들을 대체로 ‘성공한 사람’이라 부른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이다. 왜 이들이 한국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되었을까? 그들은 사람 관계를 매우 명확하고 제대로 해낸 이들이기 때문이다. 사람 관계의 첫 조건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가치들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언젠가 나는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이라고 하여 이런 가치들을 한번 정리해본 적이 있었다. 사람[人], 역사(歷史), 중립과 중용[中], 진리와 진실[眞], 원칙과 정의[義], 관용과 용서와 이해[仁], 가슴[心], 융통성(融通性), 희생(犧牲), 지식과 지혜[知, 智], 믿음[信], 술[酒], 가족(家族)과 친구(親舊), 사랑[愛], 천하(天下). 이 수많은 가치들을 완벽하게 지켜나간다는 것은 사실 어렵다. 그야말로 초인적인 인내와 내면의 깊이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은 이 수많은 가치들을 거의 다 지켜내었다. 그래서 이들은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살아남으며 현재의 우리들과도 계속 좋은 관계를 맺어나가고 있다.

 

이 책의 폴은 바로 그 사람 관계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들의 소중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잊고 있었다. 그리고 너무 먼 길을 돌아와 다시 그것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또 한번의 기회 덕분이었다.

 

그렇다.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기회가 있다. 비록 한번의 어긋남이 있었다 해도 그것은 다시 주어자는 기회 속에 충분히 바로잡을 수 있다. 사람 관계라는 것이 그렇게 칼로 물 베어지듯 싹뚝 잘라지는 것이 아니다. 저 수많은 가치들을 지켜나간다는 진실함, 신실함이 보여진다면 그 어긋남이란 언젠가는 바로잡히게 된다. 사람의 역사가 발전을 거듭해왔던 것은 그 믿음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그 희망과 꿈을 놓지 않은 수많은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긍정의 힘. 참으로 소중하다. 나는 이에 관한 나름의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것을 이른바 120%의 미학, 덤의 미학으로 정리한 바 있었다. 물건을 줄 때 얹어 주는 덤. 사람들은 그 소박한 덤으로 행복을 찾아간다. 내가 100을 공부하고 상대방에게 80을 주느니 차라리 상대방에게 100을 모두 주는 대신 나는 120을 공부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아껴주고 축복해주는 혼자가 됨으로써 그들과 기꺼이 평생의 좋은 친구로 함께 가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삶이 반드시 옳다는 말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결과가 나쁜 방향으로 흐르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나도 실제 이런 삶을 살면서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

 

긍정의 힘을 지켜나가는 데 칭찬은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이다. 나는 칭찬 수백 마디와 야단 한 마디의 무게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입에 쓰디 쓴 약은 처음에는 놀라운 약효를 발휘할 지는 모르나 그것이 면역이 되면 도리어 독으로 작용한다. 그렇다. 야단은 적을수록 좋다. 다만 그 무게감은 천근 만근만큼 무거워야 한다. 그것이 칭찬으로 생길 수 있는 지나친 자만을 물리치는, 진정한 긍정의 힘이 될 것이다.

 

그 진정한 긍정의 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은 개인은 물론 사회 발전의 밑거름이 된다. 그것은 사람 관계 속에 오롯이 내재되어 있다. 사람 관계의 중요함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것을 찾아나가는 폴의 여정, 그것은 그만의 여정이 아닌, 우리 모두의 여정일 것이다.

 

 

(이미지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http://www.kyobo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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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1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13
샬럿 브론테 지음, 서유진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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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인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주어진 시간적, 공간적 상황을 떠나 어김없이 굴곡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지형(地形)의 다양함 같다고나 할까. 그래서 병법으로 유명한 손자(孫子)는 지형을 잘 파악하는 것을 장수가 전쟁을 준비하면서 갖추어야 할 중요한 요소로 이야기하고 있다. ‘나’라는 사람은 어찌보면 나의 육신과 정신을 이끌고 가는 리더인 셈이다. 결국 내가 겪는 인생의 역정을 긍정의 힘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것, 그래서 세상의 발전의 한 밑거름이 되는 것. 그것이 아름다운 나로 살아가는 중요한 방법이 아닌가 한다.『제인 에어』는 그런 나의 생각을 한번 돌이켜보게 해주었다.

 

솔직히 초반은 잘 읽히지 않았다. 원래 나는 어두운 삶 속에 비치는 가족 간 물어뜯는 모습(?)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수한 선비들의 아름다운 삶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배다른 어머니, 또는 자식임에도 전혀 그런 의식을 가지지 않고 생활하고 있음이 보인다. 나 자신 스스로 그런 긍정과 승화의 힘을 믿기에 이런 부분이 나오는 작품이나 극은 아예 접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초반은 껄끄러웠고 빨리 넘어갔다. 하지만 제인 에어가 10살의 나이에 집을 떠나 학교로 들어간 그 이후의 삶은 나를 시종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긍정과 승화의 힘, 시대의 한계와 저항, 편견을 과감히 부수고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는 에어의 모습, 이런 것들이 나를 그토록 매료시킨 건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사람의 삶과 그 속의 수많은 가치들에 관해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씩 적어나갔다. 편견(선입견)이 지니는 무서움은 어느 정도일까? 도대체 무엇이 진정 참이고, 무엇이 진정 거짓인가? 감정과 이성의 조화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허영, 교만, 사치, 이기심, 시기, 교태, 아양이라는 것들 속에서 인간은 얼마나 천박해질 수 있는가? 교양과 천박함의 기준은 무엇일까? …….

 

나는 이런 생각을 부족함없이 할 수 있을 만큼 어렵지 않게, 재미있게 읽어나갔다. 역시 번역의 힘이란 무섭다. 우리 고전은 한학자들의 수준 높은 국역이 이뤄지지만 일반인들이 대하기에는 어렵다. 다른 외국 고전은 일본어투가 너무 많고 외국어가 지니는 묘미를 살리지 못해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번역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주는 의미있는 것이라 하겠다. 깔끔한 번역이란 이런 것을 말함이겠다.

 

물론 소설을 읽으며 내 나름의 생각도 있었다. 작가는 제인 에어나 로체스터를 어떤 생각으로 다루었을지는 몰라도, 나는 그들의 삶에 대해 무조건 긍정적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들의 삶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이유는 비록 이들이 소설 속 인물일지라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 현실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제인 에어는 시대를 아름답게 살아나가는 한 여성임에 틀림없어도 자신만의 편견에 갇혀 사는 어리석음도 보여주었다. 로체스터도 형식이나 가진 것에 대한 자유로움이 있고 진실된 모습도 있지만, 곳곳에 쓰라릴 만한 위선과 자만이 보인다. 그렇게밖에 볼 수 없는 이유는 이러하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가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그 나름의 소명이 있다. 하지만 제인 에어나 로체스터의 경우 그들 자신의 세계관 속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다. 제인 에어에게 비친 잉그램 양이나 리드 부인, 로체스터에게 비친 아델라가 그런 경우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인 잉그램 양, 리드 부인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더 말하지 않겠다. 그런 의미에서 제인의 어릴 적 친구인 헬렌이 주는 가르침이 새삼 크게 느껴졌다. 갇혀 살지 않기를, 조화로운 삶을 살기를, 긍정과 승화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헬렌은 어린 나이임에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소설의 전반에 흐르는 제인의 사랑에 관한 것도 그녀다운 삶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쳐야 될 듯싶다. 결말로 나아가는 전개는 다르더라도 어떻게 끝날 것인가는 뻔히 예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결말을 알면서도 극이나 소설을 본다. 나도 그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그만큼 강한 흡입력을 지닌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다.

 

세상이 발전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시대에 대한 저항도 있겠지만, 시대를 긍정하는 속에서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과감하게 자신을 다듬고 개척해나가는 것이다. 소설 속 제인의 18세 이후의 인생 역정이 더욱 빛나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그녀 또한 그녀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고, 어린 시절 헬렌에게서 보였던 긍정과 승화, 그 속에서 나오는 재창조의 위대함을 잘 이해해나갔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한 가지 더 생각해본 것은 우리 모두가 생각의 외연을 넓혀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생각나는 여러 가지를 정리해보았다. 허상의 파괴, 진정한 종교의 의미, 불교의 해탈, 일제 강점기 당시의 우리의 시대상, 그 속에서의 우리 시민들의 삶과 희망, 참 선비의 모습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그런 것들과 이 소설 속을 이른바 ‘크로스 오버’해본다면 보다 다양한 생각이 나올 수 있을 것이며, 그에 따라 다양한 관점의 서평도 나올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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