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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파는 남자 - KI신서 916
페르난도 트리아스 데 베스 지음, 권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 얼리 리뷰어로 선정되어 미리 원고를 읽고 올리는 글입니다. **
자유 시장 경제 체제를 딱히 옹호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아닌데 이 공기와도 같은 흐름 속에 발을 맞춰 흘러가다 보면 어딘가 어색하고 어긋나는 틈새를 체험적으로 발견하게 된다.
'소비'가 절대적인 우위를 점유하는 현대 생산 경제 시스템에서는 소비가 곧 미덕이요, 자유의 표현이며 행복(?)의 정도를 확연히 드러내는 표징이자 수단이다.
은숟가락을 입에 물로 태어나지 않은 이상 일반 서민으로서 자력으로 인생을 설계하고 피와 땀이 어린 고된 노동의 대가로 성취(따지고 보면 초라한 초상일진대) 과정을 거쳐 평생의 역작인 것 마냥 도취 아닌 도취의 목표물에 도달하면 숨이 차다 못해 다 한 지경에 이른다.
누구를 탓하랴. 원래 모두(아! 여기서 '모두'란 단지 일반적인 대다수의 사람들) 이렇게 살다 가는 걸. 특별히 혼자만 억울하다고 푸념을 늘어놓을 필요까지 없잖아? 나름대로 꽤 이런 부분에서 만큼은 평등한 세상이다. 감사해야 할 일일까?
더욱이, 뭔가 한참을 투덜대다 방향을 잃기 시작하면 비판의 대상과 내용과 의미마저 미로 속에 갇혀 갈팡질팡 꼬이고 만다. 그러니 넋두리나 비판 따위는 잠시 뒤로 미루고 좀 더 구체적인 삶의 궤적을 더듬어 가 보도록 하자.
여기 상징적인 인생을 온전히 드러낸 한 남자가 있다.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의 불편을 조금이라도 덜고자 간단하게 표현할 것은 간단하게 이름 짓자. 어떤 남자란 의미의 TC가 있다. TC 는 어릴 적부터 꿈이 붉은 머리 개미 즉 적두머리 개미의 생태를 연구하는 것. 꿈이란 대개 이루기 위해 존재하지만 이루지 못해 마음을 지배하는 법이다. 훗날 개미 사육장을 만들어 개미 왕국을 건설한 다음 연구에 몰두하리라 작정하며 아버지 명에 따라 회계사가 된다. 결혼을 하고 아내 MTC와 생활할 집을 찾아 시외의 작은 주차장이 딸린 100평방미터, 사실은 60평방미터의 작은 아파트를 얻고 두 아들 넷이서 평범하게 산다. 직업은 다국적 기업인 인터내셔날 비즈니스 난센스(IBN) 회계부에서 주로 상대하는 업체들에 지불해야할 청구서를 숨기는 일을 한다. 그래야 청구서를 다시 받아 지불 기한을 늘릴 수 있으니까. TC는 자신의 모든 시간을 바쳐 열심히 일한다. 어느 날 자신의 인생 대차대조표를 작성해 본다. TC가 가진 것. 60평방미터 아파트, 중고차, 가구, 은행잔고 3100$, 아내 몰래 침대 밑에 숨겨둔 450$, 자동차 한 대가 주차할 공간. 빚진 것은 아파트 대출금 상환 기한 35년. 한마디로 자신의 남은 인생이 저당 잡혀 있는 셈이다. 여기서 TC는 시간(T)이 돈($)이라는 사실을 새삼 파악하고 남은 인생 어디에도 적두개미를 연구할 T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계획한 것이 IBN을 그만 두고 직접 사업을 하기로 하는데 그것은 T를 파는 사업. 소변 검사 용기 플라스크에 정확히 5분 분량의 T를 담아 파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모두 T를 필요로 하니까. 필요에 의한 무엇이든 우리는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또 우리 체제의 특성이니까....
그리 두껍지 않은 이 소설은 살짝 비튼 현실적 상황이 더욱 무게가 실린 진지함으로 몰입하게 한다. 위에서 점시 언급한 T나 $의 표현은 소설 그대로를 가져온 것이다. 그러니까 '시간은 돈이다'란 표현을 'T는 $이다'로 고쳐 표현하겠다고 언급한다. 이게 무슨 수학 공식인가 싶다. 언어의 작은 약속을 새로 작성해 가며 그에 따라오라는 것이 마치 읽는 사람의 편의를 봐 주는 양 하지만 처음에는 아마도 짧고 단축된 내용만을 밝히는 요즘 독자들의 행태와 취향에 대해 비꼬는 것을 전제로 한 소설인가보다 했는데 사실은 단어와 문장을 넘어 인생 전체를 축약하고 비틀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간만에 진지하고 깊이 있게 풍자한 이야기를읽으며 T, 아니 시간이란 의미와 가치를 인생과 현실 전체에 비교 조망하며 다시 한번 되새겨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