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의 아이
김성중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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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소설을 읽은 후 저는 『화성의 아이』(2024)가 상당히 문학적인 신화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적인 언어들과 흩날리는 듯한 공간과 감각의 변칙성이 이질적이라기보다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소설은 기독교적 화소를 종종 사용했습니다. 아기 예수 이야기와 가시관 쓴 성자의 조각상이라든지 동방박사에 관한 설명 등이 그렇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신화라면, 다시 말해 문학의 몸체를 빌려온 잠정적 미래라면 대체할 수 없는 이야기로 가득 찬 이 소설을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이후 저의 머릿속에는 영사기의 잡음들로 소란스러웠습니다. 인간과 닮았으나 인간이 아닌 새로운 실험동물과 그를 호위하는 두 존재인 구형 로봇과 유령 개의 이미지 등이 무성 영화처럼 출력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사람도 무엇도 아닌 ‘마야’의 성장과 그녀가 잉태되었음을 알리는 짧은 장면을 특히 기억하고 싶습니다. 성모 마리아가 가브리엘에게 예수의 잉태를 선언 받은 모양처럼 화성에서의 수태고지는 아주 편안하지만 중요하게 느껴졌으니까요.

“구두점을 찍지 않은 문장이 밤의 우주선 안에 떠다닌다.”

p.121

소설은 공간과 연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문장이 그릇이며 독자인 우리는 그것들을 읽는다기보다 다만 느끼면 됩니다. “우주에 공평한 건 빛이 아니라 어둠이니까.”(p.67) 눈을 감고 신기루를 찾듯이 말이죠.

혹자는 이 소설을 두고 심란한 마음을 숨길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무한히 이동하며 자신의 역사를 눈덩이처럼 불리는 캐릭터들에게 이입해서일 수도 있겠고, 그것이 아니라면 불가역적이며 동시에 눈에 띄게 소설에 불과한 물리 체계 속 공간의 접합이 어색하게 느껴져서일 수도 있겠습니다. 한마디로 조금은 정신없고 많은 공간과 인물이 불편하게 다가올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인데요.

하지만 언제나 예상을 벗어나기에 상상은 의미를 품는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테라포밍-화성’에의 이유를 작가는 매우 분명한 언어로 거듭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죠. 비인간들과 함께 회복하는 미래, 이들 사회의 당위성을 말입니다. 간결하게 소설의 갈래를 설명하자면 아포칼립스 판타지에 SF가 혼합된 따뜻한 소설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작가가 우주에 펼쳐놓은 이야기들은 단언컨대 간단할 수 없습니다.

“나는 작은 별들을 파괴하면서 추진력을 얻어 조금씩 이동했다.

모든 것은 내가 우주 먼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맞서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p.210

저의 얄팍한 독서는 소설을 ‘불화하는 인간의 성찰’로 일축하려 듭니다. 멸망에 가까워진 지구 문명이 소설의 중요한 설정인데 지구를 파괴하며 혐오와 파괴가 시간의 흐름처럼 자연스러워진 세계에의 시적 반추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소설은 어느 하나 미운 캐릭터 없이 어느 한 지점, ‘창백한 푸른 점’을 향해 뻗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점을 통과하여 ‘여기’에 당도하려는 움직임이거나 생의 태동으로 말입니다.

소설을 읽다 보면 우리가 공간이라 믿는 개념어를 의심하게 됩니다. 끝과 시작이라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세계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무성생식을 일삼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입자가 분리되고 합쳐지는 장면을 묘사하며 작가는 독자들에게 ‘존재하는 것’이란 무엇일지 생각하게 됩니다. 점과 텍스트와 페이지와 땅과 하늘과 지구와 우주와 다시 하나의 점으로. 우리는 모두 입자를 바꿔 가며 자신만의 ‘여기’에서 살아 숨 쉬는 존재들이 아닐까요?

끝없이 둘러 오고 돌아오고 살아오는 분들에게 김성중의 『화성의 아이』(2024) 추천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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