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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닿았던 모든 순간
무라야마 유카 지음, 양윤옥 옮김 / 놀 / 2024년 8월
평점 :
1999년 출간된
『파도가 닿았던 모든 순간』(2024)은
일본을 대표하는 청춘 베스트셀러 작가
무라야마 유카(村山由佳)의 장편소설이다
제6회 소설스바루 신인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작가는
데뷔작 『천사의 알』(1993) 등
'청춘 연애소설계의 혜성'으로 불린다
2023년 현지에서 복간된
『파도가 닿았던 모든 순간』(2023)은
성장기의 두 청소년들이 겪는 단절과 외로움
혹은 소통의 부재 따위를
작가 특유의 섬세한 문장으로 묘사한 소설로
일본 현지에서
'영원한 청춘 소설'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소설은
싹싹한 모범생의 피질을 둘러쌌지만 조금은 대담한 청소년
'에리'
실없어 보이지만 사려 깊고 약간은 비겁한 청소년
'미쓰히데'
두 청소년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청춘 로맨스 소설이다
'에리'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혼란을 겪고 있는 인물로
성 정체성의 혼란으로 인해
겉으로는 모범생인 척
말 잘 듣는 막내 딸인 척
그런 '척'으로 인해 위태로워진 소녀이다
'미쓰히데'는서핑을 사랑하는
전형적인 쿨남(?)이지만
복잡한 가정사
특히 아버지의 병증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서핑이든 무엇이든
어떤 것에도 솔직해지지 못한 채
권태롭고 비겁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소년이다
둘은 다소 불온하게 만난다
"위태롭고 불안해서 더 아름다웠던 청춘의 비망록"
뒷 표지에 쓰인 문장이 소설을 설명하고 있다
'에리'와 '미쓰히데'는 자신의 불안과 외로움을
서로에 대한 갈망에 의존한다
정황만 놓고 보면 아주 불온하고
비상식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 둘의 주위에는
둘을 있는 그대로 마주할
제대로 된 어른이 없었기 때문에
두 인물의 비행(이라고 표현해도 될까?)을
당황스럽다고 느끼면서도 동시에
독자는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미쓰히데'의 어머니 캐릭터가 기억에 남았다
남편이 지긋지긋해서
어린 '미쓰히데'와 그의 누나를 두고
집을 나갔다는 흔한 설정을 가진 인물인데
죽음을 맞이해야 할 운명에 놓인
전 남편에게 존엄사를 추천하고
마지막까지 (나름대로...) 자신의 삶을 사는 듯한
그런 종류의 자유분방함이 좋았던 것 같다
사실 소설에 등장하는 대부분 인물이
정상은 아니다
'전형적'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얄팍한 서술이고
'통제가 불가한' 인물들이었다고 말하는 게
그나마 옳을 것 같다
특히 남자 주인공 '미쓰히데'가 그렇다
자기연민으로 둘러싼 그는
자신을 매우 비겁한 존재로 인식하면서도
그러한 자신만의 혼란을
'에리'를 통한 강렬한 이끌림으로 해소한다
이것은 여자 주인공 '에리'의 묘사 역시 비슷하게 느껴졌다
간혹 감정을 이해할 수 없는 서술들이 많았으나
좋았던 부분을 부정할 순 없다
이해할 수 없었던 만큼 좋았던 장면이 있었는데
가령
'에리'가 '미쓰히데'의 병든 아버지에게 드릴 하귤을
구해 '미쓰히데'에게 전화를 건 장면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아이러니하고 절묘한 상황에서
'에리'의 전화를 받은 '미쓰히데'
그에게선 폭발하는 자기연민이 있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장면이 주는 강렬한 이미지가
나에게는 충격이자 느낌이 되었다
한편
띠지에 '다자이 오사무' 관련 언급이 있었는데
아마도 '미쓰히데'의 하숙방에서 벌어지는
'에리'와 '미쓰히데'의 관계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소설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하숙방이 문제가 아니라
인물들의 정동이나 그들 간의 감정적 유대가
더욱 중요한 소설임을 느낄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소설에서 데카당스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많은 사람이 기억해 대명사처럼 작용하는
'남성의 방'과 '관계'와 '권태' 때문일 것 같다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지만...
그런가 하면
나는 '에리'라는 캐릭터가 조금은 아쉬웠다
'에리'는 어린 시절 그루밍 폭력 피해자였고
조금 크고 나서도 달리 달라지지 않은 상황을 겪는다
가정 환경과 캐릭터 본연의 혼란은 물론이고
여자 주인공에게 고난과 역경 설정이 참 많았다
그러나 성장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소설 속 여자 주인공 '에리'가
남자 주인공 '미쓰히데'의 성장으로의 길목
정도의 역할을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첫사랑의 종료(미유키)와
우정의 탄생(미쓰히데)이
이 소설에서 '에리'가 겪는 처음과 끝이다
'솔직하지 못함'
이것이 두 인물의 갖아 큰 결함이었다면
'미쓰히데'의 경우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해
내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이 기대와 함께 진행됐다면
'에리'는 '미쓰히데'에 의존하는 것 외에
무엇이 변화한 인물인지
크게 알기 힘들었던 것 같다
가족 이야기를 더 해주어야 하지 않았을까?
'에리'가 겪는 내외적 불안과 혼란 혹은 결함에 관해
'에리' 스스로 사유하는 장면이 나는 궁금했다
'에리' 본인이 생각하는
'성애적 관점'은 과연 무엇이었을지
나는 궁금했는데…
서사가 더 부여되었으면 좋겠는데…
조금은 아쉬운 마무리였다
하지만
좋았던 문장들도 많았다
작가가 머릿속에서 발견한
독특한 장면들
그것을 묘사하는 섬세한 문장들이 좋았다
어떤 문장들은
마치 지나가다 본
눈을 뗄 수 없어
훔쳐 본 사물이나 인물의 장면처럼
순식간이면서도
아름다웠다
400여 페이지가 넘는 해외소설
일본 소설은 오랜만에 읽었는데
빠른 속도로 읽어 내려간 소설이었다
권태롭고
연약한 존재들의
불온한 화합
소설을 다 읽고도
아직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뭔가 소설을 한마디로 축약할 순 없지만
이런 분위기의 소설을 좋아한다면
하룻밤만에 완독할 수 있을 만큼
어렵지 않은 소설이다
다산북스(놀)
무라야마 유카 『파도가 닿았던 모든 순간』(2024)
서평단 리뷰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는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미소 짓더니 내 입가의 멍 자국을 톡 쳤다. - P308
모조리 평면뿐인 세계에서 오직 에리만 입체적인 몸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 P153
소파 옆을 지나갈 때, 존이 눈을 감은 어머니의 관자놀이를 자꾸 핥는다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는 또 몰래 울고 있었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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