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처 - 개정판 청소년평전 6
황영옥 지음, 노희성 그림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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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첫 시험을 무사히 끝내고 마음의 여유가 생긴 요즘 더욱 책을 읽어줬음 하는 나의 바람이 통했는지 우리 중딩이가 지난 주 천천히 읽어내려간 세계위인전집 청소년평전. 인물에 대한 포인트를 너무 잘 나타낸 부제 '아프리카의 성자'가 무척 인상적이다. 목사의 맏아들로 태어나 사람을 생각하고 봉사를 평생 업으로 삼았던 슈바이처. 신학자이자 음악가이며 선교사이자 의사였던 슈바이처의 일대기는 처음이 아니지만 청소년평전 속 그의 인류애가 가득한 업적은 다시 읽어보아도 위대했다.

슈바이처 유년시절 일화 하나가 유명한데 어린 슈바이처는 골목대장 친구와의 싸움에서 이겼다. 거들먹거리던 친구를 이겨서 자랑스러운 마음은 친구가 한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나도 너처럼 일주일에 두 번씩 고깃국을 먹었더라면 절대로 너한테 지지 않았을 거다.' 이 일은 슈바이처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 놓을만큼 일생에 크나큰 교훈이 되었다. 인류에 대한 사랑, 작은 생명들에 대한 존중, 그의 마음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서른 살까지는 학문과 예술을 위해 살고, 이후부터는 인류에 직접 봉사하는 삶을 살리라.' 신학자이자 전도 유망한 파이프오르간 연주자로 이름을 날렸던 슈바이처는 자신의 결심을 그대로 실행했다. 마음을 먹은대로 실행에 옮기기까진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을 텐데... 자신의 신념대로 살기위해 일생동안 최선을 다했던 슈바이처. 그거 하나만으로도 우리 중딩이에게 충분히 귀감이 될 터인데 그의 '인류애'는 다시 봐도 감동이었다.


슈바이처가 7년간의 의과 공부를 시작하려 할때 주위에선 말도 안된다고 그를 만류했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그것은 그가 이제까지 이루었던 명예와 업적을 다 내려 놓는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보통의 우리라면 감히 시도 할 수 없는 일을 슈바이처는 결국 해내고야 말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파이프오르간 연주자로 유명해져 연주 여행을 다니다가 만난 세기의 건축가 가우디와의 에피소드는 책을 읽는 우리 중딩이에게 꽤나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더 대단한 것은 의학 공부 하나에만 몰입해도 힘들텐데 슈바이처는 이제껏 자신이 일구웠던 분야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 점이다. 목표를 정확히 정하고 그 길로 나아가기 위해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결국 해낸 것이다. 이것은 천재의 남다른 능력이라 보단 한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엿볼 수 있어 좀 더 우리에게 와 닿았다고나 할까. 그렇게 슈바이처는 본인이 목표한 서른일곱에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


1912년 신학 교수 직과 교회 목사 직을 내놓은 슈바이처는 다음해 아프리카에 첫 발을 내딛었다. 아프리카는 사실 지금 우리에게도 미지의 땅이 아닌가. 그를 이끌었던 랑바레네는 도대체 어디쯤인지 세계지도를 한번 살펴보았다. 아프리카 중서부에 위치한 가봉의 열대우림 속에 위치한 그 곳.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의 수많은 원주민의 생명을 구하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물자도 통역도 원활하지 않았고 닭장을 이용해 진료실을 만들만큼 랑바레네의 상황은 무척 열악했다. 하지만 슈바이처에겐 그 모든 어려움을 뛰어넘을만큼 본인만의 확고한 신념이 있어서 가능했으리라.

슈바이처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주술사라는 뜻으로 '오강가'로 불리웠다. 그 당시 흑인들은 낯설고 생소한 의사가 병을 고쳐주는 좋은 사람이지만 동시에 병을 일으키는 힘을 가진 위험한 존재라고도 생각한 것이다. 매일 열여섯 시간 이상씩 일했고, 처음 1년 동안 5000명 이상의 환자를 치료한 슈바이처. 슈바이처에 대한 원주민들의 믿음과 존경이 더욱 깊어지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슈바이처가 그렇게 아프리카의 수많은 원주민을 보살피고 있을 때 유럽에선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전쟁에 여파는 슈바이처에게까지 미처 포로가 되어 수용소 수감을 위해 유럽으로 가게됐다. 아프리카에서 남은 생을 봉사하겠다는 그를 다시 유럽으로 가게 만든 게 전쟁이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닌가. 휴전이 되자 휴전이 될 동안 슈바이처는 틈나는데로 지필작업을 하여 저서들을 출간했고 연주나 강연을 통해 자금을 마련했다. 삼등칸을 타고 다닐만큼 그는 자신을 위해 돈을 한푼도 쓰지 않으며 이렇게 검소한 생활을 했던 것은 모두 아프리카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제1, 2차 세계 대전으로 인류가 윤리적 빈곤기를 맞이하고 있던 시기에 슈바이처는 윤리 회복과 문화의 재건에 무척 노력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슈바이처가 강조했던 '생명에의 외경'은 봉사하는 삶만큼이나 지금 우리가 꼭 본받아야 할 점이 아닌가 싶다. 세계는 슈바이처의 삶과 사상에 깊은 공감을 표하며 노벨 평화상을 헌정했다. 슈바이처는 1965년 자신이 평생을 바쳐 이룩해 놓은 랑바레네의 병실에서 딸이 연주하는 바흐의 파이프오르간 곡을 들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삶의 마지막마저 정말 그다운 마무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나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네. 불쌍한 사람들을 섬기는 사업에 60여년 간 헌신 할 수 있었고 오늘 아흔 살의 늙은 몸을 이끄는 이순간까지 그 일을 계속 할 수 있으니 말일세.'


슈바이처는 파란만장하고 어떻게 보면 고단했을 법한 자신의 삶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축복 받았다고 하니 '아프리카의 성자' '랑바레네의 등불'이라는 수식어가 너무도 당연하다는 느껴졌다. 그리고 그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되새겨 보는 시간도 가져보는 게 좋겠다며 우리 중딩이는 청소년평전 슈바이처를 읽은 소감을 밝혔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우리 지역 청소년봉사단 활동을 하고 있는 우리 중딩이. 슈바이처에 비하면 정말 소박한 봉사지만 마음이 어지러운 질풍노도의 시기에 2년째 참여해 주니 솔직히 좀 대견하게 여기고 있다. 슈바이처처럼 어떠한 신념을 갖고 일생을 쏟아부운 위대한 희생적인 봉사가 아니더라고 그에게서 '인류애'를 본받고 조금이나마 실천하는 그런 삶을 살아줬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우리 중학생이 매주 감명깊게 읽고 있는 세계위인전집 자음과모음 청소년평전 이번에도 여러가지를 느끼게 해주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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