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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을 상실한 경제학
로버트 하일브로너 외 지음, 박만섭 옮김 / 필맥 / 2007년 3월
평점 :
『세속의 철학자들』 이 근대경제학(당시에는 정치경제학)의 성립부터 케인즈의 일생까지를 다루었다면, 『비전을 상실한 경제학』은 케인즈 이후 거시경제학계의 흐름을 케인즈주의 종합의 탄생과 쇠락, 그 이후에 ‘대안’이라는 이름으로 전개된 몇 가지 거시경제학파들의 이론과 그 한계를 소개하며 20세기 거시경제사상사의 변화를 조망하고 있다. 책이 다루는 이전 내용까지 포함해서 필자가 매우 간략하게 거시경제학의 발전 과정을 서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고전학파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을 연구했던 자들은 미시경제학(microeconomics)과 거시경제학(macroeconomics)의 구분을 따로 짓지 않았다. 고전학파 정치경제학의 중요한 관심사는 경제 체제의 재생산(순환을 통한 국민경제 단위의 경제 규모의 유지)와 단순한 재생산을 넘어선 확대재생산(경제성장), 그리고 생산된 부의 분배 과정이었다. 이들이 미시와 거시 경제학을 굳이 나누지 않은 이유는, 스미스부터 리카도, 맑스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고전파 정치경제학자들은 노동가치론이라는 큰 가치론적 합의 아래에 오늘날 ‘미시’ 혹은 ‘거시’라고 불릴만한 제 영역들을 이원화시키지 않고 포괄적으로 연구했기 때문이다.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이 명목상 처음 구별된 것은 케인즈에 의해서였다. 케인즈는 신고전학파의 한계주의 혁명 이후 오늘날까지 미시경제학의 기본적인 이론 틀로 이해되는 일반균형 이론에 입각한 분석 방식, 그리고 기존에 고전학파가 신봉하던 셰의 법칙(셰의 법칙이 대수적으로 왈라스에 의해서 일반균형 이론에도 적용되었다)에 입각한 거시경제 모델이 현실의 거시경제적 현상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 함을 지적하고 『일반이론』을 완성함으로써 거시경제학의 역사를 열었다.
케인즈 이후 그의 사상은 주류경제학계에서 여러 가지 모델링 과정을 거쳐서 흡수되었고 맨큐 이전에 가장 많이 학습되던 경제학원론 책의 저자인 폴 새뮤얼슨은 케인즈의 거시경제학과 신고전학파의 미시경제학, 솔로우의 경제성장모형을 종합해서 신고전학파-케인즈주의 종합을 탄생시켰다. ‘불황의 경제학’으로 탄생했던 케인즈의 경제학은 ‘자본주의의 황금기’라고 불리던 19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말기까지 ‘케인즈주의적 합의’를 불러오며 주류거시경제학의 큰 흐름으로 군림했다. 하지만 70년대 초반 케인즈주의적 모델로 설명하기 힘든 –혹은 힘들다고 믿어진- 스태그플레이션의 관찰과 그 이후 경기 침체가 가속화되면서 케인즈주의적 합의는 무너지기 시작했고, 이른바 ‘루카스비판’이라고 불리는 케인즈주의 거시경제학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 아래에 전개된 새고전학파 거시경제학과 화폐경기변동, 실물경기변동 이론 등의 흐름은 학계에서 거시경제학의 흐름을 혁명적으로 바꾸어놓았다.
하지만 새고전학파의 거시경제학 모델과 이 모델의 정책적 함의를 전면에 내세운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들은 세계 경제에서 그 효력을 제대로 입증하지 못 했고, 2008년 세계적 경제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정책 처방과 이를 뒷받침하는 이론 일체에 또 한 번의 파산선고를 내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은 아직까지 부재한 상황이다.
사실상 새고전학파 거시경제학은 80년대 이후 루카스비판에 대한 ‘케인즈주의적 해법’을 들고 나온 새케인즈학파들에 의해 학계에서 밀려났다. 현재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맨큐의 경제학을 쓴 그레고리 맨큐 역시 새케인즈학파로의 중심 이동에 앞장 섰던 거시경제학자이다. 그리고 루카스비판으로 시작된 ‘미시적 기초’에 대한 합의와 경제주체들이 최적선택을 하는 도중에 고려되어야 할 시장의 불완전성, 불확실성 등을 고려하는 이론적 가정에 입각한 ‘새 케인즈주의 종합’이 어느 정도 가시화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 새케인즈학파의 거시경제학이 기존에 등장했던 수많은 이론들보다 실천적인 측면에서 ‘훨씬 더 나은’ 이론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오히려 새케인즈학파의 이론에 대한 비판은 자신들이 대립각을 세우던 실물경기변동학파등은 물론이고 ‘케인즈의 적자’를 내세우는 포스트케인지언(후기 케인지언) 학자들 혹은 다른 비주류 경제학자들 측에서도 제기되는 상황이다.
이렇듯 단순하지 않은 거시경제학설사의 발전을 저자는 ‘고전적 상황’ 이라는 키워드와 케인즈주의적 합의의 탄생-붕괴-대안들의 등장이라는 흐름으로 잘 정리해주고 있다. 현대거시경제학의 흐름을 개괄하기에 저자의 설명은 결코 쉽지 않지만, 맥락을 이해하며 차근차근 읽어본다면 필요 이상으로 어렵지 않게 서술하려고 저자가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의 표현대로 합의에 입각한 고전적 상황을 기대할 수 없는 현대 거시경제학계의 흐름 속에서 독자들은 일종의 절망 혹은 무기력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지금으로써는 딱히 ‘해답’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거시경제학이 주류(mainstream)경제학계 내에서 수용되고 변화해 온 과정을 심도 있게 연구해야만 앞으로 어떤 경제 사상사적 흐름이 대안으로 등장할 수 있을지에 대한 큰 밑그림을 그리기 수월할 것이다. 때문에 이 책의 우울한 거시경제학설사의 발전 과정은 단지 무기력함이나 우울함만이 아니라 현실에 실천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거시경제학 이론에 대한 새로운 고민의 출발점으로써 받아들여져야 한다.
전반적으로 괜찮은 이 책의 한 가지 결점이라면 번역이 썩 잘 읽히는 문체로 되어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오역의 문제라기보다는, 저자의 복잡한 사고 전개 과정을 영어식 문장 그대로 옮긴 번역 스타일의 문제이다. 이 아쉬운 점 한 가지만 빼면, 『세속의 철학자들』을 읽어봤던 누구에게라도 한 번 쯤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