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런 벽지 - 샬럿 퍼킨스 길먼 단편선 에디션F 4
샬럿 퍼킨스 길먼 지음, 임현정 옮김 / 궁리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여성 해방을 위해 평생을 바친 개혁가이자 작가로서 버지니아 울프, 케이트 쇼팽 등과 함께 페미니즘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미국 코넷티컷 출신 샬럿 퍼킨스 길먼의 단편집은 신선하고 읽는 재미가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이자 첫 번째 작품인 누런벽지는 심리소설을 읽는 것처럼 난해했다. 산후 우울증을 앓았던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어서 그런지 현실과 주인공인 나의 심리적 현실이 공존하고 있다. 누런 벽지는 우울증을 앓는 주인공을 처지를 대변하는 듯하다. 그리고 남성 우위의 당시 분위기 속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아 나서는 여성들이 처한 입장이기도 했다.

'내가 말했다. "당신과 제니가 막았지만 결국 난 나왔어요. 내가 벽지를 거의 따 뜯어냈으니 이제 나를 다시 들여보낼 수 없을걸요!"'

* 전혀 다른 문제로 바뀔 때

가장 흥미롭게 문제의 정곡을 찌르는 작품이다. 세 명의 신사에게 실제 사례를 들어주면서 솔직한 의견을 말해달라는 힐다의 말에 신사들은 이구 동성으로 여성을 비난한다.

"그 여성이 잘못했다는 이 신사들의 의견에 동조할 수밖에 없군요. 그 여성은 혹독한 비판을 면할 수 없어요." 백작이 차분하면서도 장중하게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었다.

힐다 워드는 몇 분 동안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렇다면 클라크 씨는요?"

"물론 내 의견도 같아요. 여자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녀는 이기적인 철면피예요!"

힐다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자, 여러분, 모두가 솔직해길 바라요. 사실 제가 이야기를 할 때 한 가지 실수를 저질렀어요. 사소한 실수일 뿐이에요. 사실들은 모두 그대로인데 성별이 뒤바뀌었거든요."

힐다가 이야기를 들은 남성들은 갑자기 입장을 바꾸기 시작한다. "그렇군. 완벽한 올가미였군!"

"그렇다면 평가도 분명히 똑같아아죠. 그 남자가 틀림없이 범죄자예요!"

"미안하오만 당신에게 작별을 고해야겠소."

허를 찌르는 반전이지만, 사실이 분명하다면 평가도 똑같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임에도 남성들은 급히 자리를 피하기 시작한다. 100년 전 작가의 통찰이 놀라울 뿐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100년이 지난 현재도 그러한 상황을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 멸종된 천사

한때 이 세상에는 충돌하거나 대립하는 인생의 모든 요소들을 '척척 해결해주는' 천사들 한 부류가 살았었다. 이 빛나는 영혼의 소유자에게 요구되는 가혹하면서 모멸적인 육체노동의 양은 놀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가장 먼저, 엄격하게 지켜야 할 의무 중 하나는 그녀가 입은 천사 같은 옷을 티끌 하나 없이 청결하게 유지하는 일이었다. 천사들이 하는 일이 주로 먼지를 닦는 일인데 이들에게 그런 옷을 입도록 하다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인 것 같지만 그들은 받아들였다. 천사는 천사였고 그런 일은 바로 천사의 일이었다.

읽는 내내 부끄러움에 낯이 뜨거워지고 있다. 하루 종일 가사노동에 시달리거나, 아니면 맞벌이로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집에서는 천사처럼 온갖 집안일을 도맡아야 하는 여성의 역할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싶다. 지금도 여전히 여성들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을 받아들이는 천사들이다.

* 세 번의 추수감사절

가장 짜릿한 내용의 작품이다. 남편을 잃고 혼자 살아가는 모리슨 부인은 자녀들의 함께 살자는 제안도 거절하고 남편과 살던 집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그 집은 어린 시절 모리슨 부인을 연모하던 버츠 씨에게 담보로 잡혀있고, 버츠 씨는 집을 지키려면 자신이 구애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 막무가내이며 집요하고 답답할 정도로 다정한 버츠 씨는 부인에게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알겠지만 대출은 추숙감사절로부터 2년이 되면 만기야."

"그래요. 잊지 않고 있어요."

피터 버츠와 결혼이라니! 절대 그럴 수 없어! 모리슨 부인은 여전히 남편을 사랑했다. 신이 허락한다면 저 세상에서 그를 다시 만날 것이다. 그때 남편에게 쉰 살에 피터 버츠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모리슨 부인은 세 번째 추수감사절에 대출금을 갚을 수 있을까?

* 동업관계

"친구들도 있고 , 옷가지들도 있잖소? 그래도 하루를 보내는 데 부족해?"

"그래요. 내게 친구도 있고, 옷가지들도 있어요.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그렇지만 당신에겐 그것들이 일이 아니에요. 당신에게는 당신 일이 있죠. 하지만 내 일은 사라져버렸다구요!"

--- 성별을 바꾸어서 첫 번째 질문을 부인이 남편에게 했다면 남편은 뭐라고 답했을까? 작가의 문제의식이 날카롭다. 남성과 여성은 성별이 다르고 역할이 다른 뿐, 다른 성별이 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100년 전 작품임에도 지난 시절의 이야기처럼 읽히지 않는다.

#궁리 #누런벽지 #샬럿퍼킨스길먼 #페미니즘소설 #서평단리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