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구 아저씨
김은주 지음 / 팩토리나인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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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김은주 작가의 장편소설 <구구 아저씨>는 재미있다. 구구아저씨와 프린스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은 고민가득한 17세 소녀와 나이 지긋한 부모 세대에게 힘들이지 않고 삶의 지혜를 들려주고 있다.

* 화려한 비상과 날개 없는 추락

중학생 때 전국 대회에서 은메달을 차지한 유망주 주다연은 한 해만 반짝하는 선수는 되지 않겠다는 당찬 포부를 품고 한 달에 한 켤레꼴로 운동화를 소모하면서 달리기에 몰두한다. 그런데 스카우터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치러진 전국 체전 예선전에서 100미터 결승선을 눈앞에 두고 고꾸라지면서 발목 부상을 당한다.

부상을 당하고 우연히 화장실 변기에서 들었던 선배들의 이야기.

"재수 없어. 1학년이면 1학년답게 할 것이지. 맞아. 입만 열면 세계기록이 어쩌고 저쩌고. 그동안 좋았는데. 걔하고 같이 달리는 거 짜증 나."

"이번에는 오른쪽 발목이 부러지면 좋겠다."

다연이가 부상이 완벽하게 낫고도 다시 달릴 수 없게 된 건 그날부터였다.

힘겨운 재활을 마치고 다시 달리기를 시작하려 했지만, 번번이 왼쪽 발목 통증으로 달리기를 할 수 없다. 병원에서는 정상이라고 하는데 왜 그럴까? 급기야 찾아간 정신과 의사는, "들어야 하는 건 나 같은 의사나 어른들의 말이 아니라 네 마음의 소리야. 분명 달리고 싶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 어떤 길을 택하더라도 네 마음에 비췄을 때 행복하면 돼."

교과서 어디에도 잘나가던 사람이 갑자기 바닥을 쳤을 때 삶을 극복하는 방법이나 예시 같은 건 적혀 있지 않았다. 다들 위기를 극복하고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는데,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는지는 왜 안 가르쳐 주는 걸까.

* 괴짜 구구아저씨

다연이 한강에서 컵라면과 핫바를 먹고 있을 때, "핫바 한 입만"하는 소리가 들렸다. 근처에는 비둘기 한 마리뿐이다. 다연과 구구는 서로를 발견했다. "나 진짜 미쳤나 봐."

"인간들은 우릴 싫어하지만, 우린 인간들과 수준 높은 대화가 가능한 엄연한 서울 시민이야.(2009년 6월, 비둘기는 서울의 유해야생동물로 지정됨.) 물론 그걸 알아듣는 바로 너 같은 운 좋은 인간 한정이지만." 다연이가 부상당한 후 달릴 수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구구 아저씨의 조언.

"그러면 달리지 않는 지금, 마음은 좀 편하겠군. 어쨌거나 지지 않아도 되니까.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 덕에 더 이상 상처받지 않아도 되는 것과 비슷해."

"메달을 따지 못하고 좋은 대학에 못 가면... 그래서 특별한 사람이 되지 못하면 불행할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근데 내가 인간들을 오랫동안 살펴보니까, 인간들은 어떻게든 싫은 이유를 만들어내는 족속들이더라고. 아무리 특별한 삶을 사는 인간도 특별히 더 행복할 거라고 아무도 장담할 수 없어. 그러니까 넌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 달리기와 감자 칩

아직 달릴 수가 없지만 달리기 말고 다른 건 하고 싶지 않다는 다연에게 엄마가 말한다. "감자 칩이 그렇잖아. 한 번 봉지를 뜯으면 그만 먹을 수가 없잖아. 중간쯤 먹다가 아차, 다 먹으면 안 되겠네 싶어서 끈으로 묶어놔도 금새 다시 먹게 되잖아. 너한테 달리기는 그런 거 아냐? 너만 넘어지는 거 아냐. 다들 그래."

* 지하철에서 만난 맹인 천문학자

지하철에서 만난 맹인이 된 천문학자는 다연의 사연을 듣고 보이지 않는 눈으로 소녀를 응시했다. "힘든 일이 생기면 우주여행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보세요. 우주여행을 하면 지독한 후유증이 있으니 그걸 극복하는 중이라고 생각하면 좀 나아질 겁니다."

* 밀항선에서 구원의 손길을 내민 안젤리카 아줌마

"상대방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어. 어디서든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될 거야. 넌 아직 어리니 앞으로 더 많이 만나겠지. 그들은 묻지. 왜 내가 상대방의 일을 내 일처럼 생각해야 하냐고. 그들은 몰라. 언젠가는 그게 자기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 홍콩에서 만난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 위영

"보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크든 작든 누구나 남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 그러니까 '보통'이라는 건 없지. 가족의 형태는 많아. 아버지가 없는 집, 어머니가 없는 집, 이이가 없는 집, 나처럼 혼자인 집."

* 마술사를 따라간 프린스

"달릴 때만 네가 존재하는 게 아니니까. 달리든 못 달리든, 너라는 사람의 가치는 변함없어. 나는 이런 사람이야., 이렇게 살아야 해, 하고 고정해두면 위기가 닥쳤을 때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어. 스스로 가둬둔 셈이니까. 사실 이건 내 이야기이기도 해. 또 내 마술사 주인의이야기이기도 하고.

* 주다연의 달리기

좋아하는 감정에는 여러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멈출 수 없다. 감자 칩 같은 달리기를.

--- <구구 아저씨>라는 제목과 함께 내용을 읽으면서 황당한 설정이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런데 진도를 나갈수록 '이건 뭐지?' 아니 구구 아저씨가 사람보다 속이 깊네 하는 생각을 숨길 수가 없다. 인간에게 오랫동안 새우깡 부스러기 등을 주워먹다 보면 어느새 인간의 속마음까지도 들여다보이나 보다. 심지어 프린스는 이런 의미심장한 멘트를 날리기도 한다.

"난 서울이 싫어."

"하지만 제일 짜증 나는 건 서울을 떠날 수 없다는 거야."

이제 길거리에서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모이를 주워먹으면서 사람을 피하지도 않는 비둘기를 잘 살펴봐야겠다. 구구 아저씨를 만나면 또 다른 삶의 지혜를 물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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