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 48개국 108명의 시인이 쓴 팬데믹 시대의 연시
이오아나 모퍼고 엮음, 요시카와 나기 외 옮김 / 안온북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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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국에 사는 루마니아 출신 소설가이자 문화인류학자 이오나나 모퍼고의 멋진 생각에서 출발한 48개국 108명의 시인들이 코로나 상황에서의 고립과 격리에 대해 느끼고 생각한 것을 연가(連歌, a renga poem) 처럼 한 편의 시로 만들었다. 원제목은 <AIRBORNE PARTICLES>, 일본어판은 <달빛이 고래등을 씻을 때>이다. 이 특별한 시집은 한국과 일본에서 가장 먼저 나왔는데, 48개국에서 출판된다면 48개의 제목으로 출판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네 고독을 너무 쉽게 놓지 말라 더 깊이 베어라

(하피즈, 14세기 페르시아 시인)

서두에 놓인 페르시아 시성 하피즈의 시에 대해서, 터키 시인 괵체누르 체레베이오루는 이렇게 답한다.

1. 설령 당신의 시를 이해해주는 이가 새들밖에 없을지라도

당신의 턱에서 떨어지는 것은 피가 아니라 포도주

바깥에서는 새들이 지저귀고 있다.

세계는 지금 우리 것이다.

격리 중에도 당신은 언어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하피즈, 힘내세요, 세계는 없어도 언어가 있으니

설령 당신의 시를 이해해주는 이가 새들밖에 없을지라도

루마니아 시인 도이나 이오아니드의 시를 읽으면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36. 마스크에 웃음을 붙였다

하늘이 회색이니 오늘은 비가 오겠다. 비를 즐기자, 꽃피는 인동 덤불처럼. 하늘로 뻗은 구불구불한 가지가 기도를 올리고 있다. 곧 오순절이 온다. 공포와 고독을 떨쳐버리자. 유배는 이제 질색이다. 신선한 공기. 기분 좋은 아침 산책. 내 발도 마음도 행복하다. 내 마스크는 빙그레 웃고 있다. 그래, 내가 마스크에 웃음을 붙였다. 스쳐 지나가는 당신을 위해.

미국 시인 크레이그 추리의 시에서는 희망이 보인다.

82. 바지에 대리 헝겊 크기의 푸른 하늘만 보여도

있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시계다. 시작도 없다...... 이 시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시작되었다.

끝도 없다...... 이 시는 그날까지 쭉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될 것이다......

오그라라 수족('미국의 원주민'}출신 친구가, 사람은 죽지 않는다고 한다.

그 사람을 아는 사람들이 다 죽을 때까지는.

"바지에 댈 헝겊 크기의 푸른 하늘만 보여도 그날은 좋은 일이 있어."

돌아가신 어머니가 날 볼 때마다 말한다. 고조모가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오은 시인은 혼자 있을 때 꿈이 함께 있을 때는 희망이 된다고 노래한다.

107. 희망은 고독사하지 않는다

혼자 있을 때 꿈이었던 것이

함께 있을 때 희망이 되었다

꿈은 만남을 이루고

희망은 고독사하지 않는다

희망찬 꿈과 꿈같은 희망

108편의 번뇌와 희망이 교차되는 시의 마무리는 17세기 독일의 신비주의

종교시인 안겔루스 실레시우스 차지다.

벗이여, 네가 누구든지 간에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어떤 빛으로부터 다른 빛으로

넘쳐흘러야 한다.

이 작품은 영어로 통일된 작품을 한글로 번역했는데, 영한대역으로 편집되어 있어서 원문과 비교하면서 읽을 수도 있다. 또 다른 재미는 108편의 연시는 별도의 제목이 없는데, 내용을 읽고 소제목을 붙여 보니 작품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108편의 연시(連詩)는 마치 108편의 연시(戀詩)처럼 코로나의 마지막 고비를 넘어가고 있는 전 세계인들에게 위로를 선사한다.

스쳐 지나가는 우리를 위해 마스크에 웃음을 붙인 시인은,

바지에 댈 헝겊 크기의 푸른 하늘만 보여도 그날은 좋은 일이 있다고 말한다.

비가 오면 비를 즐기자.

비가 그치고 나면 분명히 바지에 댈 헝겊 크기보다

더 크고 푸른 하늘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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