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신영복 옥중서간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199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처절한 현실 속에서도 절대로 잊지 않는 인간애에 경탄하며 읽은 책이다.

-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여름 직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도씨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초판 서문 중에서, 계수님께 보낸 편지 중)

- 옥뜰에 서 있는 눈사람.
연탄조각으로 가슴에 박은 글귀가 섬뜩합니다.
"나는 걷고 싶다."
있으면서도 걷지 못하는 우리들의 다리를 깨닫게 하는
그 글귀는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 이마를 때립니다.
(초판 서문 중에서, 계수님께 쓴 글)

- 겨울의 싸늘한 냉기 속에서 나는 나의 숨결로 나를 데우며 봄을 기다린다.
(나의 숨결로 나를 데우며, 21)

- Das beste sollte das liebste sein.
가장 선한 것은 무릇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랑은 경작되는 것, 22)

- 불행은 대개 행복보다 오래 계속된다는 점에서 고통스러울 뿐이다. 행복도 불행만큼 오래 계속된다면 그것 역시 고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고독한 풍화, 24)

- 인간의 적응력, 그것은 행복의 요람인 동시에 용기의 무덤이다. (단상 메모, 24)

- 그래서 장날이 오면 돈이 없어도 그리 무겁지 않은 마음으로 장을 ‘보러‘ 갈 수가 있는 것이다. 새옷들을 꺼내 입고 고무신까지 걸레로 잘 닦아서 아침 일찍 길들을 나선다. 그래서는 고작 물이 진 생선 몇 마리를 들고 돌아오지만, 저마다 제법 푸짐한 견문들을 안고 돌아오는 것이다. (초목 같은 사람들, 25)
- 농촌 사람들은 흡사 초목 같다. 어려서는 푸성귀를 솎아내듯 약한 놈들을 솎아버리고 늙어서는 수목처럼 모든 질환의 고통으로부터 감각의 문을 닫아 버리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초목 같은 사람들, 26)

- 나는 어린이들의 세계에 들어가는 방법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중요한 것은 ‘첫 대화‘를 무사히 마치는 일이다. 대화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은 서로의 거리를 때에 따라서는 몇 년씩이나 당겨주는 것이다. (청구회 추억, 31)
-"이번 토요일 오후 다섯 시, 장충체육관 앞에서 만나자." (청구회 추억, 36)

- 더 많은 사람, 더 고된 생활은 마치 더 넓은 토지에 더 깊은 뿌리로 서 있는 나무와 같다고 할 것이다. 그 자리에 땅을 파고 묻혀 죽고 싶을 정도의 침통한 슬픔에 함몰되어 있더라도, 참으로 신비로운 것은 그처럼 침통한 슬픔이 지극히 사소한 기쁨에 의하여 위로된다는 사실이다. (니토 위에 쓰는 글, 47)
-진정한 기쁨은 대부분이 사람들과의 관계로부터 오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것이 만약 물物에서 오는 것이라면 작은 기쁨에 대한 믿음을 갖기가 어렵겠지만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믿어도 좋다. 수많은 사람을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 (니토 위에 쓰는 글, 49)

- 이 시간이 하루의 가장 행복한 시간으로 생각되고 있다. 무엇보다 이불 속에 발뻗고 편안히 누웠기 때문이며 고달픈 하루가 지나갔다는 이른바 ‘세월‘을 보낸 느낌 때문이라 생각된다. (54)
- 과거를 회상하는 일은 미래를 창백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59)
- 고독은 고독 그것만으로도 가까스로 한 짐일 뿐 무엇을 창조할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이 고독을 깨뜨리지 않고는 이룰 수 있는 것은 없으리라, 우렁찬 저 햇빛 찬란한 합창을 향하여 문 열고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리라 믿고 있습니다. (60)
- 잎새보다는 가지를, 조락보다는 성장을 보는 눈, 그러한 눈의 명징이 귀한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72)
- 동장군과의 일전에 대비하여 두꺼운 솜옷으로 무장한 이곳의 솜장군(?)들에게 이 봄처럼 다정한 겨울은 도리어 서운한 느낌마저 없지 않습니다. (78)

- 미美 자는 양羊 대大의 회의로서 양이 크다는 뜻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큼직한 양을 보고 느낀 감정을 그렇게 나타낸 것이다. 그 고기를 먹고 그 털을 입는 양은 당시의 물질적 생활의 기본이었으며, 양이 커서 생활이 풍족해질 때의 그 푼푼한 마음이 곳 미였고 아름다움이었다. 이처럼 모든 미는 생활의 표현이며 구체적 현실의 정서적 정돈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 바깥에서 미를 찾을 수는 없다. (86)
- 다만 ‘여전한‘ 생활 속에 ‘여전한‘ 내용이 담기면 담긴 채 굳을까 걱정입니다. 고인 물, 정돈된 물, 그러나 썩기 쉬운 물, 명경같이 맑은 물, 얼굴이 보이는 물, 그러나 작은 돌에도 깨어지는 물입니다. (97)
- ‘아름다움‘이란 바깥 형식에 의해서라기보다 속 내용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규정되는 법임을 확인하는 심정입니다...좋은 글씨를 남기기 위해서는 결국 좋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평범한 상식이 마음 흐뭇합니다. (147)

- 봄은 내의와 달라서 옆사람도 따뜻이 품어줍니다. 저희들이 봄을 기다리는 까닭은 죄송하지 않고 따뜻할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148)
- ...우리 시대의 아픔을 일찍 깨닫게 해주는 지혜로운 곳에 사는 행복감을 감사하며, ‘세상의 슬픔에 자기의 슬픔 하나를 더 보태기‘ 보다는 자기의 슬픔을 타인들의 수많은 비참함의 한 조각으로 생각하는 겸허함을 배우려 합니다. (164)
- 갇힌 사람들이 또 무엇을 가둔다는 것이 필시 마음 아픈 일일 터인데도, 역시 ‘키운다‘는 기쁨은 그 아픔을 갚고도 남는가 봅니다. (205)

- 여섯째는, (자기의 주장을 편의상 ‘그것‘이라고 한다면) 우선 ‘그것‘과의 반대물을 대비하고, 전체 속에서의 ‘그것‘의 위치를 밝힘으로써 그것의 객관적 의의를 규정하며, 과거, 현재, 미래에 걸친 시계열상의 변화, 발전의 형태를 제시하는 등의 방법인데 이것은 한마디로 다른 것들과의 관계와 상호연관 속에서 ‘그것‘을 동태적으로 규정하는 방법입니다. ... 이 여섯번째의 방법이 난삽한 논리와 경직된 개념으로 표현되지 않고 생활 주변의 이상적인 사례와 서민적인 언어로 나타나는 소위 예술적 형상화가 이루어진 상태를 가히 최고의 형태로 치고 싶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자신의 오진을 스스로 깨닫도록 은밀히 도와주고 끈기 있게 기다려주는 유연함과 후덕함을 갖추는 일입니다. (217)

- 언어란 미리 정해진 약속이고 공기여서 제 마음대로 뜻을 담아 쓸 수가 없지만 같은 그릇도 어떤 집에서는 밥그릇으로 쓰이고 어떤 집에서는 국그릇으로 사용되듯 사람에 따라 차이가 나게 마련입니다. 성장과정과 경험세계가 판이한 사람들이 서로 만날 때 맨 먼저 부딪치는 곤란의 하나가 이 언어의 차이입니다. (236)
- 벽의 기능은 우선 그 속의 것을 한정하는 데 있습니다. 시야를 한정하고 수족을 한정하고 사고를 한정합니다. 한정한다는 것은 작아지게 하는 것입니다. 넓이는 좁아지고 길이는 짧아져서 공간이든 시간이든 사람이든 결국 한 개의 점으로 수렴케 하여 지극히 단편적이고 충동적이고 비논리적인 편향을 띠게 합니다. (238)

- 그리고 우리는 과거 쪽에 마음을 너무 많이 할애함으로써 현재의 갈등과 쟁투가 그 전진적 몸부림을 멈추고 거꾸로 과거에로 도피해버리는 예를 많이 봅니다. 과거에로의 도피는 한마디로 패배이며, ‘패배가 주는 약간의 안식‘에 귀의하여 과거에의 예종, 숙명론적 굴레를 스스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274)
- 수만 잠 묻히고 묻힌 이 땅에 필시 빛나는 꽃 피어나리라 믿습니다. (281)

- 돌이켜 생각해보면 귀휴 기간 동안에 내가 힘부쳐 했던 아픔과 갈증은 나 자신의 조급하고 밭은 생각 때문이란 반성을 갖게 됩니다. ‘사랑하기보다는 사랑받으려 하고 이해하기보다는 이해받으려 하는‘ ‘마음의 가난‘에 연유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남에게 자기를 설명하고자 하는 충동은 한마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의 결여를 반증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어차피 나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로 귀착되는 것입니다. (296)
- 그 사람의 삶의 조건에 대하여는 무지하면서 그 사람의 사상에 관여하려는 것은 무용하고 무리하고 무모한 것입니다. 더욱이 그 사람의 삶의 조건은 그대로 둔 채 그 사람의 생각만을 다른 것으로 대치하려고 하는 여하한 시도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폭력입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는 삶과 사상의 일체성을 끊어버림으로써 그의 정신세계를 이질화하고 결국 그 사람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97)

- 그러나 이러한 과학적 사고보다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은 바로 대상과 필자의 ‘관계‘라 생각합니다. 대상과 필자가 어떠한 관계로 연결되는가에 따라서 얼마만큼의 깊이 있는 인식이, 또 어떠한 측면이 파악되는가가 결정됩니다. 이를테면 대상을 바라보기만 하는 관계, 즉 구경하는 관계 그것은 한마디로 ‘관계 없음‘입니다. 구경이란 말 대신 ‘관조‘라는 좀더 운치 있는 어휘로 대치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는 과존만으로 시작되고 관조만으로서 완결되는 인식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311)
-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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