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 아래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
헤르만 헤세 지음, 김이섭 옮김 / 민음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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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처음부터 우리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 여름, 가을… 계절이 돌고 돌아오듯이 위가 아래가 되고 아래가 다시 위가 되면서 바퀴가 돈다. 그러나 바퀴는 앞으로 나아가면서 자국을 남긴다. 순환적이면서도 직선적이다. 수레바퀴는 그렇게 계속 빙글빙글 돌면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쭉쭉 나아갔다. 우리는 언젠가 지나간 ‘한스 기벤라트’라는 바퀴의 흔적을 더듬어 가는 길을 시작했다. 아니다, 단지 흔적의 뒤를 밟아 가는 것이 아니다. 책장을 새로 펼치는 순간 한스의 바퀴, 아니면 한스를 깔아뭉갤 바퀴는 다시, 아니 처음인 것처럼, 사실 처음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가엾은 한스! 처음에 우리는 탄식한다. 바퀴는 진창에 처박혀 쓰러져 버렸다. 결국 그렇게… 


 말라 비틀어져버린, 거의 타 버린 새싹이 떠올랐다. 처음 초록색 줄기와 잎을 삐죽이 내밀었을 때, 싹은 여리긴 했지만 전도유망해 보였다. 우리 모두는 금방 자라 튼실한 가지를 이루고, 열매를 맺을 꿈이 싹 안에 모두 담겨 있는 것처럼 굴었다. 빛과 물을 아끼지 않았다. 몇 마디 상냥한 말-훈수-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싹은 조금 자라 파르르 떨더니, 건강한 잎을 펼치지 못했다. 단지 조금 늦는 것이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기형적으로 조그마한 잎을 단 채, 줄기는 꽤 오랜 시간 동안 푸른색이었다. 거의 줄기만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도 일단 ‘완전히 죽어버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몰랐다고, 우리는 변명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그 작은 잎마저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새싹을 다른 곳으로 옮겨 담아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제서야 우리는 알게 되었다. 그의 뿌리는 지상에 내어 놓은 그 가냘픈 줄기의 반만큼도 되지 못했다. 그에게 그 흙은 독이었다. 숨쉬지 못하고, 뻗어 나가지도 못하고- 슬쩍 들어올리니 그냥 툭 하고 바로 쓰러져 버린 싹을 보며 우리는 탄식했다. 결국 이렇게… 


 우리는 한스의 세상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한스 기벤라트의 세상 중에서 전적으로 사악한 것이 있었던가. 오로지 악의로 똘똘 뭉친 혐오, 이유 없는 증오, 타인의 고통에서 희열을 느끼는 자가 있었던가. 헤세의 세상은 이만하면 꽤 따뜻한 것이 아닌가. 빗나가고, 어그러지긴 했지만 그래도 사랑이었는데! 그러나 이내 생각을 바꾼다. 때로는 사랑이 증오보다 사람을 더 망쳐버리는 법이다. 이런 세상에서 완전히 비틀려 버린 영혼을 눈앞에 두고 그래도 넌 우리보단 낫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얼마나 잔인한 일이며, 지독한 자기 비하인가. 그만두자.

 

 소설의 결말을 보고 우리는 슬퍼한다. 순수하고 재능 있던 소년의 죽음이 비참하고 허무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내 깨닫는 것. 우리가 한스이지 않은가? 그리고 하일너이기도 하고, 기벤라트 씨이기도 하고, 목사이기도, 플라이크 아저씨이기도 하다. 희생자와 가해자, 구도자와 방관자가 모두 우리 안에 있지 않은가? 우리가 각각의 인물의 행동을 이해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다른 곳에서 온 자들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동정과 연민은 방향을 잃는다. 어디로 나와서 어디로 들어갈 수 있는 거지? 한스의 세상과 우리의 세상이 묘하게 뒤섞이면서 갈팡질팡한다. 수레바퀴 뒤를 잘 따라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새 우리는 수레바퀴 위에 올라 타 있었고 바퀴살이 되었고 아래에 깔리기도 하고 바퀴를 넘어지게 하는 돌멩이가 되기도 했다. 이를 어쩐다.


 처음에 우리는 ‘나’와 ‘그들’을 분리해서 바라보았다. 그들이 어떻게 삶을 춤추는지 그저 지켜만 볼 생각이었다. 외부자로서 마음껏 평가하고, 재단하고, 비유하고, 멋대로 상념하고자 했다. 그리곤 조금 궁금해져서 그들 뒤를 살금살금 따라갔다. 그들의 세상과 나의 세상을 조심스럽게 연결해 보았다. 섞으려고 보니 애초에 그 세계는 둘이 아니었다. 구분이 사라지고, 결국 남는 것은 하나뿐임을 깨닫는다.  


 이런! 우리는 처음부터 ‘우리’였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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