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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오 크뢰거 / 트리스탄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
토마스 만 지음, 안삼환 외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평점 :
시시한 이야기?
딸깍 딸깍. 몇 번이고 썼다가, 지웠다가 한 글이 다시 죽죽 지워진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며 잠시 방임하였다가, 망설이며 다시 손을 뻗는다. 도대체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반쯤 지워진 활자들을
다시 한 번 뒤져 본다.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반짝이는
햇살과, 한가로움과, 뭐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사건과, 배경에 대한 이야기를 슬금슬금 꺼내려고 시도해 보기도 했구나. 작가에
대한 정보를 몇 번 뒤적여 본 것이 전부이면서, 작가를 바탕으로 작품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기도 했던
것 같다. 내 이야기, 그래, 내 이야기를 하려고도 했었다. 문학-나, 글-나-자격? 나름대로 진지한 고민들, 자기고백. 그러나 정제되지 않은 나를 내보이기 싫다는 마음에- 아니, 사실은 그렇게 흐트러진 마음을 그대로 긍정하고 싶은 마음에- 나를
정리하는 것을 포기한다. 남은 것은 없다. 남을 것을 없애
버린다.
그럼
도대체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훌륭한 요약, 멋들어진
작품 해석은 누군가 더 재능 있는 이가 기꺼이 해 줄 것이라고, 위안 삼는다. 무언가 감동적인 이야기, 재치있고,
어쩌면 약간의 교훈까지 있는, 삶이 담긴 이야기들이 우리를 기쁘게 해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좋다. 그렇다면, 나는 다만, 그런 사이에서 조용히 숨쉬고 있을 이야기나 하면 그만이다.
그래, ‘토니오 크뢰거’라는 사람을 만났다. 처절하고 비극적인 전쟁, 인간의 어리석음과 비참을 읽고, 작품의 크기만큼 커다란 불행을 겪었을 작가에게 연민을 느낀 지 이레째 되는 날이었다. 그리고 파시즘의 해변, 기만하는 언어의 공연장에서 빠져나온 지 이틀이
채 지나지 않은 날이기도 했다. 딱히 그를 만날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나를 기다린 것도 아니었고, 나도 우연히 그의 자리를 방문하게
되었을 뿐이다. 첫만남은 이렇게 시시했다.
그와
보낸 시간 모두가 시시했던 것은 아니다. 많은 생각들, 가슴을
찌르는 장면들, 나는 토니오였다가, 잉에였다가, 리자베타였다가, 다시 나로 돌아오곤 했다. 예술과 시민성과 문학과 위치와 절망과 지향과 예민함과 사랑- 이야깃거리는
충분히 넘실거리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미루어 놓기로 하자. 누군가가
대신 <처리>해 주기를 기다리자. 그래서 나는 시시한 이야기나 하려고 한다. 나조차도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꿈을
잡아 본 적이 있는가? 어떤 아이는, 잡고 싶었던 꿈이 있었다. 너무 행복한 꿈이어서, 깨어났다는 것에 눈물을 흘리고 싶었다. 아름다운 꿈들이란 이내 무의식의 저편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된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던 아이는 꿈을 의식의 세계에 꽁꽁 동여매어 붙잡아 두고 싶었다. ‘잊어버리지 않으면’ 그것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아이는 꿈을 말하려고
했다. 말을 하면 할수록 꿈의 분위기는 사라져 갔다. 아이는
글을 쓰려고 했다. 글을 쓰면 쓸수록 꿈은 도형처럼 변해갔다. 아이는
그림을 그리려고 했다. 그림을 그리면 그릴수록 꿈은 색을 잃어갔다. 너덜너덜해지고
괴물 같이 변해버린 무엇에서 희미한 꿈의 조각이나마 찾으려고 애쓰던 아이는 결국 자신이 꿈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꿈이 있던 자리는 텅 비어 버렸다. 가만히, 가만히 놔두었으면 다시 찾아올 수도 있었는데- 아이는 섧게 울었다. 더 이상 그것을 다시 만나는 기대 속에서 잠들 수 없다는 것이 서러웠다.
저쪽
세계의 것을 이쪽 세계로 억지로 끌어 오면, 그것은 훼손되고 만다. 그리고
결국 가치도 의미도 힘도 잃게 된다. 글이나 말, 그러니까
<언어>는 서로 다른 두 세계를 너무나- 잘 연결하는 것이어서 약하고 서투른 것들이 쉽게 부서지도록 했다. 아이는
그래서 가장 소중한 것은 가슴 속에만 담아두곤 했다. 가슴 속에 있는 것들은 언뜻 사라져 버린 것처럼
느껴지지만, 예상치 못한 순간에 불쑥 떠올라 아이를 기쁘게 했다. 빨리
버리고 싶은, 두렵고 슬픈 것들은 하나하나 꾹꾹 눌러 적어 두었다. 그러면
커다란 그림자는 사라지고 단지 조그만 활자와 이해만 남을 뿐이었다.
토니오
크뢰거라는, 검은 눈의 사람도 이런 이야기를 했다. 예술가는
폭발적인 감상을 <처리하여> 버려 별 것 아닌
것으로 만드는 냉혈한이라고 한다. 언어가 가진 마법은 마치 사람으로 하여금 텅 빈 가슴을 가지게 하고, 언어를 다루는 사람은 마치 기계장치처럼 돌아가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런데
나는 의심한다. 글쎄, 진심일까? 언어를 가지고 노는, 그리고 그것에 엄-청-나-게 큰 의미를 부여하여
애지중지하는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 할 수는 없지 않을까. 그래, 사실
그는 이런 말을 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문학은 저주라는 둥, 예민함으로부터
온갖 괴로움이 나오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결론적으로 스스로를 긍정하고 밝은 것에 대한 변치 않는 사랑도 확인하고,
그리고 그것을 기쁘게 글로 남기면서- 그는 혼자 해피엔딩을 맞이하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투정부리듯 한 이야기로부터 나온 어느 아이의 꿈 이야기 따위는 무척 시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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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 이후에, 누군가는 시시하지 않다고 이야기해주셨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