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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데이아, 또는 악녀를 위한 변명 ㅣ 환상문학전집 23
크리스타 볼프 지음, 김재영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9월
평점 :
안녕하세요? 라는 인사말, 으레 하는 인사말인데도
차마 건넬 수가 없네요.
......라고 해요.
메데이아. 처음에는 어머니께, 그 다음에는 동생에게 이야기를 했었지요. 모두가 시선의 방향을 당신에게 고정시키고, 단지 당신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당신 홀로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걸 수 있었지요. 하지만
결국, 당신이 스스로 몇 번이나 말했듯이,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지셨군요. 마지막에 가까워서는 결국 당신도 메데이아의 이야기를 하게 되셨습니다그려.
아, 가엾은 여인이여…
괜찮아요. 괴롭다고, 비참하게 버려지고, 갈기갈기
찢겨서 너덜거리는 마음을 안고 울어도 좋아요.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세상을 향해 저주를 퍼부어도 괜찮아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발을 구르며 울부짖어도 괜찮아요. 당신이 나쁜가요? 아니에요. 그리고, 당신이 나쁘다고 해도 괜찮아요.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뒤집히고, 거짓이 진실을 삼켜 버리고, 가장 밝게 빛나는 것은 가장 텅 비어
있는 세상인걸요. 마지막까지 아름답게 ‘순교’하지 않았다고 해서 당신을 욕 할 수는 없는걸요. 이리 와 보세요. 당신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다고 누구도 감히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필요하다면
기대서 울어도 돼요.
미안해요. 많이 부족하죠. 가장 좋은 사람이란 건 참 슬픈 일인 것 같아요. 당신이 가장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누구나 당신에게서 가장 적절한 위안과 기쁨을 찾을 수 있었죠. 그럼 당신은 어떻게 되나요? 당신은 어디에 가서 좋음을 구하나요? 아아. 당신은 좋은 사람이어서 형편없는 지푸라기에서도 가장 밝은
빛을 내도록 할 수 있었지만, 당신 내면의 불씨가 꺼져 버렸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누가 당신을 위로할 수 있나요.
고마워요. 당신의 직관, 자유로움, 당당함, 인간과 자연과 신들을 아우르는 애정은 참으로 사랑스러웠어요. 가장
적절한 순간에 꼭 맞는 말과 행동을 당신은 할 수 있었지요. 글라우케 공주를 보듬어주고, 더 나은 쪽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길러 주려고 애썼지요. 거짓말과
가식으로 겹겹이 포장한 사람에게 똑똑하게 말했지요. 그들에게 곧장 다가섰어요. 당신은 그들을 있는 그대로 보아 주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지요.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져 당신을 미워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봐 주어서 고마워요. 아무리 가난한 마음이라도, 그것을 내보이는 것을 부끄러워 할 것이
아니라, 보아 주는 사람이 있음을 축복해야 하는데.
있잖아요, 세상은 당신이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희생당하고 왜곡된 현명한 여인”이라고 말해요. 그리고 그것이 올바른 평가라고, 이제서야 제자리를 찾았다고 말해요. 그런데요, 아직 우리가 제자리를 찾을 수 있는 세상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먼지를
걷어 내고, 주름지고 접힌 것들을 탁탁 펴서 깨끗하게 다시 말릴 수 있는-세상이-된 걸까요? 당신과
같은 여인의 모습으로부터, 부조리를 파악하고, 충분히 반성하는-것이 가능하기나 한 세상일까요? 아아, 사건의 전말은 이렇게 된 것이었더랍니다. 여러분 모두 알겠죠? 이러면 안 되는 거예요. 네- 당연하죠. 옛날 사람들은 차암!
아니에요. 이렇게 되지 않겠죠. 메데이아, 여기는
아직도 똑같아요. 당신은 참 많은 질문을 했지요. 그렇지요? 당신이 사람들에게 던지곤 했던 질문들을, 여기 사람들은 여전히 불편하게
생각해요. 아니, 어떤 사람들은 당신이 전적으로 맞다고도
생각해요. 어떤 사람들은 ‘너무 지나치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해요. 여긴 코린토스와도, 코르키스와도 달라요.
사실은요, 사람이 죽은 이야기를 하려고 했어요. 죄를 부인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하려고도 했어요. 여긴 다르지만, 여기에도 있어요. 이피노에? 마이도스? 페레스? 욕심 때문에 희생당한 어린 사람-들이 여기에도 있어요. 문제의 책임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사람들, 화풀이, 침묵하는 사람들. 여기에도 있어요.
맞아요. 여기에도, 여전히, 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은 커다란 비극이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하고 있어요. 이 말이 위안이 될 지 모르겠네요. 눈이 멀고, 귀가 먹고, 마음이 닫혀서 걸핏하면 증오를 쏟아내거나, 이리저리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어요. 눈을 크게 뜨고, 놀란 마음을 갖는 것. 거기서부터 시작해보려고 해요. 뭘 보아도 무덤덤한 건조한 마음을 걷어내고, 마냥 반짝반짝한 세상만
보아 온 어린아이의 마음도 넘어서, 함께 보고, 놀라고, 이야기하고, 다른 세계로 손 내밀 줄 알게 되는 것. 아주 작지만, 어려운 일이잖아요.
누군가는 그걸로는 부족하다고 이야기하겠지만, 이게 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에요. 손 잡고, 한 발짝이라도 더 나아갈 것이라고, 계속 나아갈 것이라고 약속할게요.
메데이아. 결국 당신은 또 좋은 사람 역할이 되었네요. 고작 이런 이야기 뿐이라
미안해요. 우는 사람 곁에서 함께 우는 사람이 되어 주는 것. 그리고
우리가 울지 않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는 것.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위로였나 봐요. 어쩌면 그것마저- 저를 향한 위로였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아픈 사람에게 가서 나도 아프다고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힘껏 안아주고 나서 함께 손 잡고 일어서는 것, 같이 해 줘요.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