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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의 조 - 제2회 박지리문학상 수상작
송섬 지음 / 사계절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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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가 지나는 골목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처럼 하루하루의 단편을 해시태그(#)를 붙여 기록해 놓은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롤랑 바르트가 느꼈던 정념을 매일 기록한 것이라면, 후자는 '나'가 처음 겪었던 아버지가 죽었을 때부터 스물 네 살이 되어 그의 동거인인 조와 고양이 설리가 죽고 그 죽음을 어떤 형태로든 애도하는 데 이른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또, 전자는 어머니의 죽음에 매우 고통스러워하는 흔적이 역력한데 (개인적으로 롤랑 바르트가 끝내 애도에 이르렀다고 보기 어려웠지만) 후자는 도망쳤다가 멈췄다가 흐른다. 그렇게 애도해나간다.

햇빛이 잘 들지 않고, 계단 세 개 덕분에 '나'가 살아가는 반지하라는 공간은 외부에서 숨겨져 있다. 그런 곳에서 '나'는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고 열의 없이 운영되는 허름한 술집에서 책을 읽으며 맥주를 마신다. 그곳의 사장인 조와도 점차 가까워져 자연스럽게 동거하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함께 있기 위해 특별히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저 같은 공간에서, 어느 날 문득 등장한 아저씨, 어쩌면 '나'의 아버지의 유령일지도 모르는 존재와 무해하게 살아갈 뿐이다.

두 사람은 숨겨진 공간에서 또 다른 공간을 발견한다. 발코니와도 같은 골목을 말이다. '남겨진 골목'은 창문을 닫으면 사라지는 곳으로 "아무도 그곳에서 우리의 창문을 노크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으면서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곳. 오직 고양이 두 마리와 여자와 남자만을 위해 존재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장소." (114쪽)다. 

그런 장소에서 아저씨가 불현듯 사라지고, 고양이 설리가 죽는다. 그리고 조가 죽는다. 그러면서 '나'는 현관문에서 목을 매달았던 아버지의 기억을 반추한다.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은 정리되지 못한 채 '나'에게 매달려 있고, 그런 상태를 '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유년기로부터 너무 빨리 도망쳤어. 사람 모양 구멍을 남기고 탈출하는 것처럼."

126쪽



'나'는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도망쳤으나 '죽음'은 또다시 '나'를 찾아온다. 어느 새,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진 아저씨의 유령처럼 이번에는 고양이 설리가 죽는다. '나'는 설리를 냉장고에 넣는다. 상실감을 얼려 슬픔을 유예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니, 슬퍼할 방법을 알게 될 때까지 시간을 멈춰 놓으려고 하는 것처럼. 

그리고 조는 금요일에 집을 나서 그 어떤 폐쇠회로에도 찍히지 않다가 일요일 새벽 전철 선로를 따라 걷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남긴다. 서른이 되는 것을 기요틴에 비유하던 그는 '나'의 추측대로 '남겨진 골목'을 지나 기찻길로 향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창문을 열어젖힐까 두려워하면서도 창문을 열어주기를 바라면서."(213~214쪽)

날짜가 바뀌면 절기도 따라서 바뀌고, 달력이 넘어가는데 '나'는 그런 시간의 연속성을 달력에 적힌 절기가 하지니까 여름을 지나는 중이군, 하는 식으로 의식해서 느끼려고 하는, 그렇지 않고서는 시간이 흐른다는 걸 감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비춰진다. 죽음이 앗아간 것을 시간이 회복시켜줄 것이라는 기대가 언제나 충족되지 않는다. 그건 '나'에게도 마찬가지여서 '나'는 오히려 시간이 자신을 어딘론가 데려다주지 않으며 이동하는 것은 자신이고, "이동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미아가 되지 않는 것"(212쪽)임을 깨닫는다. 

죽음은 대상과 자신이 함께했던 시간이 단절됨을 의미한다. 어느 한쪽의 시간이 일방적으로 끝났으나 남겨진 자의 시간은 그렇지 않다. 이 간극이 만들어낸 시간 차는 삶을 살아가는 길 또한 막아버린다. '나'는 도망쳤으나 도망치지 못했고, 멈췄으나 끝내 설리를 묻어주고, 골목이라는 남겨진 장소에서 조를 기다린다.

길을 잃어버려 미아가 되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건 멈춤이다. 길이 엇갈리지 않게, 멈춰 서 있는 날 그가 찾을 수 있게. 숨겨진 반지하에 있던 숨겨진 골목은 달력상에 존재하는 절기라는 절대적인 시간으로부터 '나'를 숨겨줄 것이다. 그럼으로써 조가 얼마든지 골목에 머물 수 있도록, 그런 그를 기다리는 동안 '나'가 마음껏 슬퍼하고 때로는 울 수 있도록, 그리하여 계절이 지나가듯 애도가 지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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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간을 배달하기 위하여
박애진 외 지음 / 사계절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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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출판사 사계절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사계절 출판사의 이번 신작, 『당신의 간을 배달하기 위하여』는 5명의 작가가 누구나 한 번쯤은 읽어 봤을 법한 옛날 이야기들을 SF로 재탄생시킨 단편집이다. 순서대로 '심청전' '별주부전' '해님 달님' '장화와 홍련' '흥부와 놀부'를 각색하였다. 그 내용은 이미 알고 있기에 고전에 SF라는 장르의 특성이 녹아 들었을 때 친숙한 이야기의 세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그리하여 새롭게 달라진 풍경을 보여 줄지 기대하게 한다.



대사로 이야기가 급전개되면서 뒷심을 잃거나, 성차별을 강화시킬 위험성이 있거나, 그 당시의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새롭게 풀어내지 못한 아쉬움이 있는 단편도 있었지만, 표제작이기도 한 임태운 작가의 「당신의 간을 배달하기 위하여 - 코닐리오의 간」은 그 기대를 완벽하게 충족시켜 주는 작품이라고 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용왕을 구하기 위해 토끼의 간을 구하러 육지로 올라간 거북이가 결국은 토끼의 꾀에 속아 결국 간을 손에 넣지 못하는 이야기를 SF의 흐름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섞었기 때문이다.



용'왕'은 '용궁주'라는 성별중립적인 단어로 등장하고, 거북이는 전투형 안드로이드 T-30973 코드명 '타르타루가', 토끼는 용궁주의 신체 부품인 클론 '코닐리오'로 각색되었다. 타르타루가는 고전의 이야기대로 용궁주의 명령을 받아 코닐리오의 간을 구하러 육지로 올라온다. 코닐리오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던 소녀로, 타르타루가에게 자신의 버킷리스트를 이뤄달라고 제안한다.



코닐리오와 타르타루가의 여정에는 인간중심 사고를 허무는 장면을 다수 발견할 수 있다. 인간 외에 다른 존재에게는 영혼이 없는가, 어째서 인간만이 영혼의 유무를 판별하는가, 다른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서 있는 '영생'은 값진가, 서로를 착취하지 않는 자유의 방식은 어떤 것인가...



그 장면들이 던진 질문은 "설계와 조립으로 만들어진 존재"(118면)에게 파장을 일으키고, 그 여진은 우리에게 전달된다. '설계와 조립'은 정밀함을 요하는 작업일 것이다. 그러나 그 정밀함이 누군가를 짓밟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이 작품은 계속해서 한 가지 질문을 밀어붙인다. 그런 식의 정밀함은 거짓과 기만이 가득한 세계에서 득을 보는 이들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의미대로 살아갈 수 있는 느슨함이라고 말한다.



SF는 우리가 발붙이고 살아가는 현실 세계를 적극적으로 전복시키는 장르다. 그럼으로써 현실 세계의 부조리를 명확히 드러내고, 현실에서 억압된 존재들을 해방시키고, 그 자유를 공유하게 한다. 고전 또한 현실 세계의 모순을 짚고 풍자한다. 고전과 SF는 바로 그 지점에서 만난다.



코닐리오는 타루타루가가 자신을 찾아오기 전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던 '언니'들과 만났었다. 용궁주의 생명 코드를 해킹할 계획에 참여했고, 해킹 프로그램의 시동 열쇠를 건네받아 마침내 "영생을 구가하고 있는 한 여인의 육체를 '해킹'"(138면)하는 데 성공한다. 따라서 용궁주의 말만 따를 수 있는 타루타루가는 자신이 계속해서 지켜 왔던 그 용궁주가 아니라, 그 몸을 해킹한 코닐리오의 명령에 따르게 된다.



부패한 권력이 몰락하는 데서 오는 쾌감, 새로운 정의가 그 힘을 올바르게 쓸 것이라는 환희는(코닐리오가 육지에서 벌인 범죄로 쫓기게 될 용궁주의 고생은 덤이다), 희생 외에 선택지가 없었던 이들도 함께 웃을 수 있도록 세계가 재편성될 것이라는 기대로 이어진다.




"육지에서 난 어딜 가도 죄수였지만, 이제 이 바닷속에서 난 어딜 가도 '왕'이야."(143면)




'인간'이 지배하던 바다는 이제 각 존재가 왕이 되는 세계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오늘은 어떠한가? 코닐리오의 '언니'들이 그러했듯, 현실 속의 '언니'들도 싸워서 참정권과 교육권 등을 후세대가 누릴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여전히 싸우고 있다. 디지털 성폭력에 노출되지 않도록, 데이트 폭력을 겪지 않을 수 있도록, 여성의 몸이 불법화되지 않도록, 그러니까 안전하게 오롯이 한 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이 세상의 균열을 목격하고 그에 굴하지 않고 저항하는 오늘의 누적이 만들어갈 내일을 꿈꾸게 하는 것. 그것이 고전과 SF가 다시 쓴 오늘의 의미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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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나와 아레스 - 제17회 '마해송 문학상' 수상작 문지아이들 166
신현 지음, 조원희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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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작은 창문 하나 닫히면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사람을 흔히 경주마에 비유하곤 한다. 말은 눈가리개를 한 채 정해진 경주로를 따라 달리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이기겠다는 결의"(95쪽)는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경쟁에서 뒤쳐지는 순간 낙오된다고 채찍질을 해대면서 돌파구는 하나뿐이라고 눈을 가리면 '승부 근성'은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테나와 아레스』는 기수가 꿈인 새나와 경주마의 교감을 통해 속도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건네며 새로운 트랙을 함께 찾아 나선다.



이 작품은 경주 상황을 알리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실감나게 경기를 묘사한다. 승마장과 마방, 초원,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는 마필 관리사와 장세사 등이 등장하면서 이야기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말 한 마리가 경주마가 되려면 말을 키울 공간과 말을 돌보고 가꿀 인력도 필요하다. 그렇기에 낭비란 있을 수 없다. 경주마가 되지 못하는 말에게 귀한 자원을 투자할 이유가 없으니, 그 말의 말로는 정해져 있다. 바로 도축이다.

경주마는 혈통에 따라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경주마로서 최상위급 혈통에 희귀한 흰색 말인 아테나는 억 단위에 팔린다. 혈통도 그저그렇고, 흔하디 흔한 갈색 말인 아레스는 팔리지 않았고 '헐값'에라도 내놓을 수 있는 도축장에 팔린다. 아테나와 아레스가 망아지였을 때부터 지켜본 새나의 눈에는 두 마리 모두 경주마로서 손색이 없는데도 말이다.

엄마 아빠 모두 기수이고, 어려서부터 말과 함께 자란 새나는 아빠처럼 최고의 기수가 되기를 꿈꾼다. 달리기 위해 태어난 말과 함께 호흡을 맞추는 일은 새나에게 당연한 일이다. 경주마가 되고 싶지 않은 아레스가 '처분'되지 않도록 새나는 아레스를 훈련시킨다. 그러면서 새나는 알게 된다. 아테나와 아레스도 경주마가 되고 싶었을까?

특별한 이유 없이 말 무리가 바람을 가르며 드넓은 목장을 달리는 모습은 장관이다. 엄마의 사고 이후 말이 싫어진 새나의 쌍둥이 언니 루나가 무심결에 그 장면을 보고 멋있다고 할 만큼. 기수는 말을 빠르게 몰아 돈을 벌고, 관중은 경주를 보며 희열을 느끼며 우승을 점쳐 본다.

그러나 그곳의 열정과 흥분은 또 한 번 사람들의 눈을 가린다. 다른 선수의 길을 방해하지 않는 '페어플레이상'은 우승 트로피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 없고, 기수가 다치고 심지어 경주마가 죽어도 슬퍼할 시간은 없다. 재빨리 수습해서 다음 경기에 차질이 없게 해야 한다.

아테나는 그렇게 죽는다. 훈련에 반항하지 않고 따르던 그 아이가 벽으로 돌진했다. 폭발적인 힘으로, 말 그대로 '죽기 살기로' 달린 후 충분히 휴식을 취했어야 했는데 아테나는 그러질 못했다. 마주가 계속해서 경기에 내보냈다. 아테나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 아이들은 어떠한가. '좋은 성적을 받아 SKY 정도는 거뜬히 합격해 대기업에 입사하여 좋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는' 성공한 삶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기를 강요당하고 있지 않은가. 매해 수능이 끝나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아이들이 나온다. 그래도 입시 경쟁은 멈추지 않는다. 단 한 번의 실수가 치명적인 실패로 이어질 것이라는 불안과 강박이 땔깜이 되어 경쟁에 불을 떼기 때문이다. '천천히 해도 돼' 라고 말해 주는 너그러운 세계는 정녕 경쟁에서 도망친 자의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단 말인가.

이 작품은 냉소에 지지 않는다. 경주마가(된 우리가) 쓰고 있던 눈가리개를 벗기고 경주로가 아닌 다른 곳에 다그닥다그닥 말발굽 소리를 울린다. 맹목적이었을지언정 다 많은 사람과 뛰었던 길 위에서 내려오는 건 어색하고 두렵다. 남들과 똑같은 길을 달린다고 해서 모두에게 평등한 성공이 돌아온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래서 나에게 맞는 길을 가겠다는데, 나만 이상해진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한다.

말과 함께 전속력으로 달리는 그 순간이 좋아서 기수가 된 엄마는 부상을 당해 더는 기수로 활약할 수 없게 된다. 엄마에게는 사망 선고와도 같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다른 길을 찾았다.

엄마가 다른 길을 간다는 것은 상상해 본 적도 없다. 새나가 태어날 때부터 엄마는 기수였고, 새나 마음속에서는 아직도 기수다.

"재활 승마를 공부해 보려고.

의미 있는 일인 것 같아. 한 번 해 보고 싶어."

192쪽

해 볼 수 있는 데까지 해 본 후 포기하는 것. 자포자기가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거기까지 가 본 자신에게 긍지를 갖는 것이다. 자긍심은 새로운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돼 줄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안다. 작은 창문 하나 닫히면 더 큰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이것이 눈가리개를 내려놓으면 걸을 수 있는 새로운 길이다.

『아레스와 아테나』는 '실패를 딛고 일어선' 극복의 서사를 택하지 않고, '포기 또한 하나의 방법이며 그랬을 때 열리는 가능성의 이야기'로 끝맺었다. 엄마는 새나에게 또 다른 롤모델이 되어 준다. 새나는 길이 나무 줄기처럼 위로 솟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뭇가지처럼 여러 갈래로 뻗어 있음을 배우고, 자신만의 선택을 해 나갈 것이다. 독자인 우리가 위로와 감동을 받는 것도 끝을 위한 끝이 아니라, 시작을 위한 끝을 보여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하기 나름인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는 실수하고 실패할 것이다. 그러니 '바닷가에 너울너울 퍼지는 웃음소리'에 우리의 실패를 흘려 보내자. 다음 트랙을 향해 가뿐히 걷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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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 - 병원 밖의 환자들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양창모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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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인간은 오래도록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그림으로 대표되어 왔다. 건강하고도 강인한 남성, 그것도 백인 이성애자 남성의 몸으로 말이다. 그리고 도래한 코로나 시대, 인간은 전염병을 옮기는 컨테이너에 비유된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호흡을 통해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전파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잊어버리고 있던 무언가를 떠올리게 된다. 인간은 호흡기 하나로도 무방비해질 수 있다는 사실. 이는 우리 모두가 실은 취약함을 지니고 있다는 공통점을 상기시킨다.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살다』(메이 옮김, 2012, 봄날의책)는 자신의 투병 생활을 솔직하면서도 통찰력 있게 써 내려간 에세이로, 질환과 질병을 구분하고 질병을 앓는 혹은 질병을 경험하는 몸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질환이란 의학 지식을 기반으로한 몸의 증상을 말하는 것이고, "질병은 질환을 앓으면서 살아가는 경험이다.(위의 책, 33쪽. 쪽수는 리디북스 기준임.)"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를 쓴 양창모 선생님이 진솔한 문장으로 엮어낸 이야기 또한 질환으로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그래서 이 세상에 잘 전해지지 않던 질병을 경험하는 사람의 맥락과 조건이다. 부제이기도 한 '병원 박의 환자들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이란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이 에세이가 값진 이유는 병원의 문턱을 넘을 수 없는 환자들의 삶의 조건을 그의 눈을 통해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환경에서 느낀 저자의 부끄러움이 우리 사회의 결핍과 무지와 겹쳐지면서 고스란히 우리 모두의 것이 된다는 데 있다.

현대사회는 괴리사회다. 결정하는 사람은 경험하는 사람의 고통으로부터 안전하게 괴리되어 있다. 결정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사람은 대부분 전문가나 관료들이다. 검사를 받는 동안 고령의 환자가 받을 삶의 충격에 대해 의사는 무지하다.

41쪽

자본주의는 지구 행성의 어떤 것이든 사유화하고, 소비할 수 있는 재화로 변화시켜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이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하도록 우리를 현혹시킨다. 의료계의 형편도 그리 다르지 않다. 노년기의 인간이 집 안의 문지방을 넘고, 산을 넘어서 병실에 발을 디디기까지의 과정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환자의 질병을 앓는 경험은 의사가 들여다보는 모니터에 적혀 있지 않으므로 진료실 안에서 제대로 응시되는 법이 없다.

저자는 한 의사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구조의 탓만 하지도 않는다. 의사로서 극도의 효율을 추구하게 하는 시스템에 일말의 기여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테니까. 그는 길이 없다고 느끼게 하는 막막함에서도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들이 막혔던 길을 뚫어내고, 취약한 몸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에 파장을 일으킨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살 거냐고. 한 장의 벽돌이 되기를 마다하고 파도에 깎이고 옆 존재와 부딪히고 깨지면서도 자신만의 모양과 색깔로 해변에 있는 작은 돌멩이 하나로 남겠느냐고.

121쪽

결국은 돈으로 귀결되는 문제, 아니 돈 문제로 결론 짓게 하는 자본주의 앞에서 그 대답 말고 다른 답을 내놓으려고 왕진을 다녔을 그의 세월은 이렇게 책 속 문장 곳곳에 남아 있다. 그리고 한 사람으로부터 출발하는 공동체에 대해 말한다.

올해로 7주기를 맞은 세월호 참사는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 주지 않는다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국가에게는 안전망이 없으니 개인이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메세지가 전국의 안방에 보도됐다. 그로부터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도서출판나무연필, 2018) 7장 '결국 자기를 빼곤 누구든 혐오한다 - 고통을 대결하는 콜로세움이 되어버린 공론장의 모습'에서 저자인 엄기호는 고통을 전시하게 하여 경쟁을 부추기는 공론장에서 인간에 대한 혐오를 본다. '이제는 지겹다'는 말 다음으로 낄낄거림이 온 것이다. 공론장은 마치 동물원처럼 발가벗겨져 울고 있는 사람들을 비웃는 곳으로 변질되었으므로.

그러나 양창모는 왕진을 오고 가며 만나 왔던 환자들과 그 곁을 지키던 협동조합이나 시민사회를 보면서 공동체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그는 여성의 돌봄 노동에 의존해 지탱된 복지 국가의 민낯에 눈을 돌리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돌봄의 주체도 국가보다는 개인이나 이웃과 마을로 설계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국가는 헌신적인 한 사람의 부재를 결코 대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국가는 공동체의 모습이 사라지는 곳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216~217쪽

"간병받는 사람의 존엄성이 훼손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인이나 가족의 '간병하지 않을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간병을 거부할 자유, 간병받을 자유와 같은 말(217쪽)"이라고 덧붙이면서. 이 자유가 보장되면 우리는 죄책감 없이 간병이 필요한 사람의 곁에서 물러날 수 있다. 그리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그 사람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공동체에 대한 믿음의 뿌리는 한 사람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럼으로써 의료 접근성을 고통받는 사람을 중심으로 두고 재설계할 것을 요청하는데 의사의 왕진을 제도화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과 맞닿는다. 한 사람으로부터 출발하기에 그의 몸에서 벌어진 고유의 경험을 신뢰한다. "그의 경험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의학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그것에 기초하여 진료실에 들어서는 순간 걸러지고야마는 환자 이전/후의 일상을 이웃-마을(공동체)-제도-정치로 확장한다.

이는 세계를 수선하고 꿰매는 '사이보그'의 상상력과도 맥이 통한다. (김초엽x김원영, 『사이보그가 되다』, 사계절, 2021) '사이보그'는 기술이 매끄럽게 우리의 몸을 강화시켜줄 것이라는 상징으로 흔히 쓰이지만 이 책이 말하는 사이보그는 다르다. 두 저자는 장애를 보조해 주는 기술이 장애를 종식시켜 줄 것이라고 낙관하지 않고, 실제로 기술과 함께 살아가는 몸을 지닌 장애인으로서의 목소리로 기술과 장애의 교차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럼으로써 그 이야기는 취약한 몸을 지닌 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서사가 된다.

'정상'의 테두리 안에 있을 때는 감지할 수 없는 기술과 장애의 불협화음이 병원에 갈 수 없는 삶의 조건에 놓여 있는 노인의 앓는 소리와 비슷하게 들리는 이유는 두 이야기 모두 인간의 조건으로 취약함을 상정하기 때문일 테다. 우리는 취약하기에 다른 누군가에게 기댄다. 보호자의 손을 타는 것부터 시작해서, 학교와 학원과 직장과 여러 시설과 사람들의 손을 탄다. 그러나 인간의 취약함이 혐오의 대상이 되면 그 특성은 배제해야 하거나 소독해 버려야 하는 것으로 전락한다.

우리의 몸은 누군가의 보호를 받고 있으므로 보존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을 의료진이 있기에 마스크를 쓰더라도 일상이 유지되는 것처럼 말이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손이 우리의 취약함을 잠시 가려 주고 있다는 걸 잊어버리면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두 손바닥으로 가릴 수 없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질 것이다.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도망가지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부터 해 보자. 예를 들자면 아파트 공동 현관 앞에 발판 두기. 5살만 되어도 공동 현관 비밀번호를 외우고, 키배드를 눌러 집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공동 현관에 달린 키배드는 어린이의 키보다 높이 있다. 까치발을 들어도 닿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다. 발판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어린이는 비밀번호를 알아도 혼자서는 집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낭패감이나 무력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 예시는 의료 행위는 아니다. 그러나 한 사람으로부터 출발한 이웃이라는 점에서 저자가 꿈꾸는 마을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불편에 공감하는 것, 그리고 그 불편을 불행과 곧장 연결시키지 않는 것. 이 모든 것이 지금-여기에도 가능하다고 믿는다.

새로운 세상이란 장소가 아니라 행동이다. 새로운 세상은 우리가 도착하는 곳에 있지 않다. 과정 자체가 이미 새로운 세상이다. 마을이란 유토피아는 우리가 도달하는 곳이 아니다.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만들어내려고 행동하는 순간에만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다. 마을은 그런 모습으로만 있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29쪽

의사와 환자의 경계가 모호한 마을, 그렇기에 누군가를 위해 움직이는 것을 서슴치 않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은 당장 나의 아픔을 사소하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고, 내가 죽어갈 때에는 병든 나의 몸에 마지막까지 예의를 다해 줄 것임을 믿는다. 그리고 내가 받을 수 있는 마중과 배웅이 한 사람의 예외없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인간다움의 여백이 넓어지는 세상이 올 것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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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크 나비 반올림 50
김혜정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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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한 여섯가지 이야기가 묶여 있다. 이 단편집은 죽음, 그 안에 벌어진 상처와 고독을 향해 헤엄쳐간다. 그리고 익사하지 않게 수면 위로 튀어올라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네가 살아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함께 웃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게 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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