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도망쳤으나 '죽음'은 또다시 '나'를 찾아온다. 어느 새,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진 아저씨의 유령처럼 이번에는 고양이 설리가 죽는다. '나'는 설리를 냉장고에 넣는다. 상실감을 얼려 슬픔을 유예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니, 슬퍼할 방법을 알게 될 때까지 시간을 멈춰 놓으려고 하는 것처럼.
그리고 조는 금요일에 집을 나서 그 어떤 폐쇠회로에도 찍히지 않다가 일요일 새벽 전철 선로를 따라 걷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남긴다. 서른이 되는 것을 기요틴에 비유하던 그는 '나'의 추측대로 '남겨진 골목'을 지나 기찻길로 향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창문을 열어젖힐까 두려워하면서도 창문을 열어주기를 바라면서."(213~214쪽)
날짜가 바뀌면 절기도 따라서 바뀌고, 달력이 넘어가는데 '나'는 그런 시간의 연속성을 달력에 적힌 절기가 하지니까 여름을 지나는 중이군, 하는 식으로 의식해서 느끼려고 하는, 그렇지 않고서는 시간이 흐른다는 걸 감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비춰진다. 죽음이 앗아간 것을 시간이 회복시켜줄 것이라는 기대가 언제나 충족되지 않는다. 그건 '나'에게도 마찬가지여서 '나'는 오히려 시간이 자신을 어딘론가 데려다주지 않으며 이동하는 것은 자신이고, "이동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미아가 되지 않는 것"(212쪽)임을 깨닫는다.
죽음은 대상과 자신이 함께했던 시간이 단절됨을 의미한다. 어느 한쪽의 시간이 일방적으로 끝났으나 남겨진 자의 시간은 그렇지 않다. 이 간극이 만들어낸 시간 차는 삶을 살아가는 길 또한 막아버린다. '나'는 도망쳤으나 도망치지 못했고, 멈췄으나 끝내 설리를 묻어주고, 골목이라는 남겨진 장소에서 조를 기다린다.
길을 잃어버려 미아가 되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건 멈춤이다. 길이 엇갈리지 않게, 멈춰 서 있는 날 그가 찾을 수 있게. 숨겨진 반지하에 있던 숨겨진 골목은 달력상에 존재하는 절기라는 절대적인 시간으로부터 '나'를 숨겨줄 것이다. 그럼으로써 조가 얼마든지 골목에 머물 수 있도록, 그런 그를 기다리는 동안 '나'가 마음껏 슬퍼하고 때로는 울 수 있도록, 그리하여 계절이 지나가듯 애도가 지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