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받는 사람의 존엄성이 훼손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인이나 가족의 '간병하지 않을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간병을 거부할 자유, 간병받을 자유와 같은 말(217쪽)"이라고 덧붙이면서. 이 자유가 보장되면 우리는 죄책감 없이 간병이 필요한 사람의 곁에서 물러날 수 있다. 그리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그 사람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공동체에 대한 믿음의 뿌리는 한 사람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럼으로써 의료 접근성을 고통받는 사람을 중심으로 두고 재설계할 것을 요청하는데 의사의 왕진을 제도화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과 맞닿는다. 한 사람으로부터 출발하기에 그의 몸에서 벌어진 고유의 경험을 신뢰한다. "그의 경험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의학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그것에 기초하여 진료실에 들어서는 순간 걸러지고야마는 환자 이전/후의 일상을 이웃-마을(공동체)-제도-정치로 확장한다.
이는 세계를 수선하고 꿰매는 '사이보그'의 상상력과도 맥이 통한다. (김초엽x김원영, 『사이보그가 되다』, 사계절, 2021) '사이보그'는 기술이 매끄럽게 우리의 몸을 강화시켜줄 것이라는 상징으로 흔히 쓰이지만 이 책이 말하는 사이보그는 다르다. 두 저자는 장애를 보조해 주는 기술이 장애를 종식시켜 줄 것이라고 낙관하지 않고, 실제로 기술과 함께 살아가는 몸을 지닌 장애인으로서의 목소리로 기술과 장애의 교차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럼으로써 그 이야기는 취약한 몸을 지닌 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서사가 된다.
'정상'의 테두리 안에 있을 때는 감지할 수 없는 기술과 장애의 불협화음이 병원에 갈 수 없는 삶의 조건에 놓여 있는 노인의 앓는 소리와 비슷하게 들리는 이유는 두 이야기 모두 인간의 조건으로 취약함을 상정하기 때문일 테다. 우리는 취약하기에 다른 누군가에게 기댄다. 보호자의 손을 타는 것부터 시작해서, 학교와 학원과 직장과 여러 시설과 사람들의 손을 탄다. 그러나 인간의 취약함이 혐오의 대상이 되면 그 특성은 배제해야 하거나 소독해 버려야 하는 것으로 전락한다.
우리의 몸은 누군가의 보호를 받고 있으므로 보존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을 의료진이 있기에 마스크를 쓰더라도 일상이 유지되는 것처럼 말이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손이 우리의 취약함을 잠시 가려 주고 있다는 걸 잊어버리면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두 손바닥으로 가릴 수 없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질 것이다.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도망가지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부터 해 보자. 예를 들자면 아파트 공동 현관 앞에 발판 두기. 5살만 되어도 공동 현관 비밀번호를 외우고, 키배드를 눌러 집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공동 현관에 달린 키배드는 어린이의 키보다 높이 있다. 까치발을 들어도 닿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다. 발판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어린이는 비밀번호를 알아도 혼자서는 집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낭패감이나 무력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 예시는 의료 행위는 아니다. 그러나 한 사람으로부터 출발한 이웃이라는 점에서 저자가 꿈꾸는 마을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불편에 공감하는 것, 그리고 그 불편을 불행과 곧장 연결시키지 않는 것. 이 모든 것이 지금-여기에도 가능하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