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 - 병원 밖의 환자들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양창모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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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인간은 오래도록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그림으로 대표되어 왔다. 건강하고도 강인한 남성, 그것도 백인 이성애자 남성의 몸으로 말이다. 그리고 도래한 코로나 시대, 인간은 전염병을 옮기는 컨테이너에 비유된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호흡을 통해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전파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잊어버리고 있던 무언가를 떠올리게 된다. 인간은 호흡기 하나로도 무방비해질 수 있다는 사실. 이는 우리 모두가 실은 취약함을 지니고 있다는 공통점을 상기시킨다.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살다』(메이 옮김, 2012, 봄날의책)는 자신의 투병 생활을 솔직하면서도 통찰력 있게 써 내려간 에세이로, 질환과 질병을 구분하고 질병을 앓는 혹은 질병을 경험하는 몸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질환이란 의학 지식을 기반으로한 몸의 증상을 말하는 것이고, "질병은 질환을 앓으면서 살아가는 경험이다.(위의 책, 33쪽. 쪽수는 리디북스 기준임.)"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를 쓴 양창모 선생님이 진솔한 문장으로 엮어낸 이야기 또한 질환으로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그래서 이 세상에 잘 전해지지 않던 질병을 경험하는 사람의 맥락과 조건이다. 부제이기도 한 '병원 박의 환자들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이란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이 에세이가 값진 이유는 병원의 문턱을 넘을 수 없는 환자들의 삶의 조건을 그의 눈을 통해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환경에서 느낀 저자의 부끄러움이 우리 사회의 결핍과 무지와 겹쳐지면서 고스란히 우리 모두의 것이 된다는 데 있다.

현대사회는 괴리사회다. 결정하는 사람은 경험하는 사람의 고통으로부터 안전하게 괴리되어 있다. 결정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사람은 대부분 전문가나 관료들이다. 검사를 받는 동안 고령의 환자가 받을 삶의 충격에 대해 의사는 무지하다.

41쪽

자본주의는 지구 행성의 어떤 것이든 사유화하고, 소비할 수 있는 재화로 변화시켜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이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하도록 우리를 현혹시킨다. 의료계의 형편도 그리 다르지 않다. 노년기의 인간이 집 안의 문지방을 넘고, 산을 넘어서 병실에 발을 디디기까지의 과정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환자의 질병을 앓는 경험은 의사가 들여다보는 모니터에 적혀 있지 않으므로 진료실 안에서 제대로 응시되는 법이 없다.

저자는 한 의사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구조의 탓만 하지도 않는다. 의사로서 극도의 효율을 추구하게 하는 시스템에 일말의 기여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테니까. 그는 길이 없다고 느끼게 하는 막막함에서도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들이 막혔던 길을 뚫어내고, 취약한 몸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에 파장을 일으킨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살 거냐고. 한 장의 벽돌이 되기를 마다하고 파도에 깎이고 옆 존재와 부딪히고 깨지면서도 자신만의 모양과 색깔로 해변에 있는 작은 돌멩이 하나로 남겠느냐고.

121쪽

결국은 돈으로 귀결되는 문제, 아니 돈 문제로 결론 짓게 하는 자본주의 앞에서 그 대답 말고 다른 답을 내놓으려고 왕진을 다녔을 그의 세월은 이렇게 책 속 문장 곳곳에 남아 있다. 그리고 한 사람으로부터 출발하는 공동체에 대해 말한다.

올해로 7주기를 맞은 세월호 참사는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 주지 않는다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국가에게는 안전망이 없으니 개인이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메세지가 전국의 안방에 보도됐다. 그로부터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도서출판나무연필, 2018) 7장 '결국 자기를 빼곤 누구든 혐오한다 - 고통을 대결하는 콜로세움이 되어버린 공론장의 모습'에서 저자인 엄기호는 고통을 전시하게 하여 경쟁을 부추기는 공론장에서 인간에 대한 혐오를 본다. '이제는 지겹다'는 말 다음으로 낄낄거림이 온 것이다. 공론장은 마치 동물원처럼 발가벗겨져 울고 있는 사람들을 비웃는 곳으로 변질되었으므로.

그러나 양창모는 왕진을 오고 가며 만나 왔던 환자들과 그 곁을 지키던 협동조합이나 시민사회를 보면서 공동체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그는 여성의 돌봄 노동에 의존해 지탱된 복지 국가의 민낯에 눈을 돌리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돌봄의 주체도 국가보다는 개인이나 이웃과 마을로 설계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국가는 헌신적인 한 사람의 부재를 결코 대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국가는 공동체의 모습이 사라지는 곳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216~217쪽

"간병받는 사람의 존엄성이 훼손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인이나 가족의 '간병하지 않을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간병을 거부할 자유, 간병받을 자유와 같은 말(217쪽)"이라고 덧붙이면서. 이 자유가 보장되면 우리는 죄책감 없이 간병이 필요한 사람의 곁에서 물러날 수 있다. 그리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그 사람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공동체에 대한 믿음의 뿌리는 한 사람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럼으로써 의료 접근성을 고통받는 사람을 중심으로 두고 재설계할 것을 요청하는데 의사의 왕진을 제도화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과 맞닿는다. 한 사람으로부터 출발하기에 그의 몸에서 벌어진 고유의 경험을 신뢰한다. "그의 경험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의학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그것에 기초하여 진료실에 들어서는 순간 걸러지고야마는 환자 이전/후의 일상을 이웃-마을(공동체)-제도-정치로 확장한다.

이는 세계를 수선하고 꿰매는 '사이보그'의 상상력과도 맥이 통한다. (김초엽x김원영, 『사이보그가 되다』, 사계절, 2021) '사이보그'는 기술이 매끄럽게 우리의 몸을 강화시켜줄 것이라는 상징으로 흔히 쓰이지만 이 책이 말하는 사이보그는 다르다. 두 저자는 장애를 보조해 주는 기술이 장애를 종식시켜 줄 것이라고 낙관하지 않고, 실제로 기술과 함께 살아가는 몸을 지닌 장애인으로서의 목소리로 기술과 장애의 교차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럼으로써 그 이야기는 취약한 몸을 지닌 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서사가 된다.

'정상'의 테두리 안에 있을 때는 감지할 수 없는 기술과 장애의 불협화음이 병원에 갈 수 없는 삶의 조건에 놓여 있는 노인의 앓는 소리와 비슷하게 들리는 이유는 두 이야기 모두 인간의 조건으로 취약함을 상정하기 때문일 테다. 우리는 취약하기에 다른 누군가에게 기댄다. 보호자의 손을 타는 것부터 시작해서, 학교와 학원과 직장과 여러 시설과 사람들의 손을 탄다. 그러나 인간의 취약함이 혐오의 대상이 되면 그 특성은 배제해야 하거나 소독해 버려야 하는 것으로 전락한다.

우리의 몸은 누군가의 보호를 받고 있으므로 보존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을 의료진이 있기에 마스크를 쓰더라도 일상이 유지되는 것처럼 말이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손이 우리의 취약함을 잠시 가려 주고 있다는 걸 잊어버리면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두 손바닥으로 가릴 수 없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질 것이다.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도망가지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부터 해 보자. 예를 들자면 아파트 공동 현관 앞에 발판 두기. 5살만 되어도 공동 현관 비밀번호를 외우고, 키배드를 눌러 집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공동 현관에 달린 키배드는 어린이의 키보다 높이 있다. 까치발을 들어도 닿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다. 발판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어린이는 비밀번호를 알아도 혼자서는 집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낭패감이나 무력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 예시는 의료 행위는 아니다. 그러나 한 사람으로부터 출발한 이웃이라는 점에서 저자가 꿈꾸는 마을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불편에 공감하는 것, 그리고 그 불편을 불행과 곧장 연결시키지 않는 것. 이 모든 것이 지금-여기에도 가능하다고 믿는다.

새로운 세상이란 장소가 아니라 행동이다. 새로운 세상은 우리가 도착하는 곳에 있지 않다. 과정 자체가 이미 새로운 세상이다. 마을이란 유토피아는 우리가 도달하는 곳이 아니다.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만들어내려고 행동하는 순간에만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다. 마을은 그런 모습으로만 있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29쪽

의사와 환자의 경계가 모호한 마을, 그렇기에 누군가를 위해 움직이는 것을 서슴치 않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은 당장 나의 아픔을 사소하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고, 내가 죽어갈 때에는 병든 나의 몸에 마지막까지 예의를 다해 줄 것임을 믿는다. 그리고 내가 받을 수 있는 마중과 배웅이 한 사람의 예외없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인간다움의 여백이 넓어지는 세상이 올 것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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