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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번역의 역사
래리 스톤 지음, 홍병룡 옮김 / 포이에마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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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신앙적인 것을 떠나서도 진실로 인류의 뿌리이다. 공부하면 할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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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왜곡의 역사 - 성서비평학자 바트 어만이 추적한
바트 D. 에르만 지음, 강주헌 옮김 / 청림출판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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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린시절 교회를 다닐 때, 이런 책들은 절대로 읽지 말라는 어른들과 형누나들의 무언의 압박속에 있었다는 기억이 난다. 그러나 결국 나의 그 무한한 의문들과 질문들과 호기심은 교회밖으로 뛰쳐나가게 했고 온갖 세상 모든 학문들을 접하고 완전히 내 몸에 스며들게 하였다. 그렇게 오랜세월 철저한 무신론자로, 유물론자로, 구조주의자 포스트모던의 괴물이라고 스스로 자처하고 살다가, 그들조차 아무런 해답을 가지지 않은 공허한 외침이라는 것을 깨달고 결국 다시 기독교에 귀의했던 것을 기억한다.

 

 이후 신학을 본격적으로 접하고 나선, 정말로 이렇게 성경이나 예수 비판 혹은 역사적 예수를 언급하며 온갖 별의별 자신만의 상(象)을 만들어내는 이런 현대 기독교 비판 책들의 주제들은, 이미 오래전 심지어 몇백년전에 이미 온갖 치열한 신학적 논쟁으로서 이미 끝난 문제였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신학은 너무나 방대하여 일반사람들이 접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기에 이런 책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 수 밖에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또한 대중을 오도하게도 혹은 선동하게도 하는 것도 물론이다)

 

 나 같아도 내가 무신론자라면 이러한 '예수는 없었다', '예수는 똥을 쌌다', '사실 예수는 신화다', '예수는 마리아와 결혼했다', '예수는 짜집기이다' 등등과 같은 주제로 수 많은 책을 낼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완전한 증명을 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말 같다 붙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것들이 세간에 자극적이고 충격을 주기에 책도 이슈화시키기 그만큼 쉬우며 대중이 나의 책을 소비하게 하는 것도 매우 쉽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케팅의 일환으로서) 사실 이 책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인 나조차도) 이런 책들이 더욱더 많이 발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실제로 기독교가 진리가 아니라면 믿을 필요가 없다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기독교신앙과 신학은 공부하면 할 수록 그 깊이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요즘 나는 신이 진실로 '너네들이 이 성경이라는 신의 계시가 진리인지 아닌지 따져 볼 만큼 따져보라!'라고 던져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정녕 성경이 진리라면 어떠한 철학과 사상적 매스에도 꿋꿋히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살아남았기에 현재도 믿는 것이다. 이슬람은 그것이 두려워 철저히 코란을 번역도 금지하고 감시하고 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이런 책이 이슈가 되는 걸 한편으로 굉장히 즐거워한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예수는 신화다', 오교수의 '예수는 없다' 혹은 러셀의 모든 책들, 그리고 고전으로는 해석학의 슐라이어마허와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같은 위대한 책들을 기독교인들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히려 기독교를 맹렬하게 비판하는 모든 사상과 철학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내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니체인 것이다) 차라리 기독교가 믿기 어려울정도로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면 아예 무신론으로 돌아서는게 낫다고 생각한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맹목적으로 믿는 것은 신의 뜻에도 별로 합당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쩡쩡하게 믿는 사람들이 왜 믿어야 하는 지도 모른채 현재 교회를 망쳐놓고 있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또한 반대로 이번엔 무신론을 맹목적으로 믿고 싶어하는 모든 불신자들에게도 제발 (그들 스스로도 전혀 중립적이지 않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책이 나오면 마치 자신이 비판하는 기독교인처럼 맹목적으로 아무 필터링도 없이 믿어버린다. 얼마나 아이러니 한가? 즉, 자신들도 똑같이 자기가 믿고 싶어하는 것을 믿으려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가능한한 중립적이고 객관적이고 오로지 진리를 추구하는 진실성에 입각하여 뭐든지 바라보기를 바랄 뿐이다. 이 책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이 책의 주요 논점을 천천히 살펴보며 비평적 관점에서 포스팅할 예정이다.

 

 오늘은 피곤해서 이만~ㅋ 

http://blog.naver.com/917ph/22020737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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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돌을 옮겼는가? - 그리스도의 최후 일주일 추적
프랭크 모리슨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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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이 세월에 묻히지 말고 재발간되야만 하는 보석같은 책이다.

읽으면서 정말로 시간 가는 줄을 모를 정도였다^^ㅋ

 

어떻게 예수에 관한 책이 지금 현재 시중에 판매되는 스릴러노벨보다 더 재미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아직 이 책을 안 읽어본 분들에게는 적극 추천한다. 간략하게 책을 소개하자면, 무신론 저널리스트인 저자가 신약성서의 모든 신화적 요소를 걷어내고 실제 기록된 사실만을 가지고 재구성하여 예수의 허구성을 주장하려다가 그만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된 저자의 연구기록이다.

 

 저널리스트답게 철저히 기자정신으로 하나하나 실마리를 추적하는 것이 마치 탐정소설이나 추리소설 혹은 스릴러를 방불케 한다. 내용이 탁월하고 치밀한 건 물론이고 일단은 재미가 있다. 저자 스스로도 이 책은 사실 예수의 부활의 허구로 결말이 났었어야 한다고 하는 것처럼 오히려 신약성서와 공관복음을 참으로 공정하고 진실되게 비교분석하고 파고 들어간다면 예수의 부활이 참일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그리스도교의 기원과 기독교의 역사를 현재 최대한 중립적인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작업과 초대교회의 신앙이 과연 참인지를 연구하는 나에게 이 책은 상당히 신선하였고, 과연 얼마든지 성서자체만으로 그것을 옹호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이것이 기독교를 믿지 않는 독자에게는 완전히 그들을 설득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예수의 부활이 얼마나 개연성 있고 증명할 순 없지만 합리적인지'까지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처럼 실제 진실을 보기위해 예수가 허구라는 주장을 하는 책들과 반대로 같이 함께 읽기에 매우 유익한 책이다. 균형잡힌 사고와 관점을 키우기에는 매우 적합한 책이라고 생각된다.

 

 

 6장. 역사적 수수께끼

 

 ... 팔레스타인 같은 작은 나라에서 뿜어 나온 용암이 로마 세계 전체를 뒤덮기 위해서는 그 중심의 화산이 지극히 뜨거운 불덩어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사건을 대하면서, 물리적 측면의 인과 관계만으 문제 삼으면서 심리적 측면의 원인을 간과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이 현상은 세계의 역사를 가장 크게 움직인 사건이기 때문에, 도대체 어떤 큰 힘이 이런 일을 일으켰는지를 알아야 그 원인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우리가 이런 역동적인 힘의 근원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원료는 겨우 도마와 같은 습관적 회의주의자, 베드로와 같은 연약하기까지 한 어부, 요한과 같은 부드러운 공상가, 실용주의적인 마태, 안드레나 나다나엘과 같은 뱃사람, 불가피하게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는 여인들 그리고 고작해야 세 명의 다른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p. 127)

 

 나는 기독교를 배태시킨 역사적인 핵심 인물들을 무시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심각하게 생각해 볼 때, 지도자의 수모와 죽음 그리고 십자가의 충격 앞에서 휘청거리던 여러 종류의 평범한 사람들이 형성한 작은 집단 속에서 그런 추진력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더욱이 그 위기 앞에서 그 집단이 와해되어 버린 사실을 생각하면 할수록, 그 집단이 재결합하여서 그런 결과를 일으킬 수 있는 뜨거운 구심점을 형성할 수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역사의 명백한 증거는 그런 일이 일어났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단순하고도 평범한 사람들을 변화시켜서, 지금까지 우리가 연구해 왔던 풍비 박살난 예수님의 무리와는 다른 강력한 집단이 되게 한 어떤 사건이 그들의 삶 속에 들어 왔다.

 그 경험이 도대체 무엇일까ㅡ심리적인 것이든, 물리적인 것이든, 혹은 두 가지 모두이든, 아니면 우리의 직접적 지식의 영역을 벗어나는 어떤 초월적인 것이었든ㅡ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연구하고 있는 문제의 요점이다. (p. 128)

 

 우리는 상황을 재구성해 보던 초기 단계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갔다는 견해를 거부했는데, 그것의 근거는 그 견해가 제자들의 도덕적 품성과 독특한 마음 자세에 모순이 된다는 것이었다. 만약 우리가 제자들을 하나의 완전한 환상의 영향 하에서 예외 없이 획일적인 정신을 갖게 된 사람들로 본다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이 야기된다. 수수한 어부인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 성격상 의심이 많은 도마, 지나치게 예민하지 않으면서도 그 다름대로의 맛이 있는 세리 마태, 지극히 점잖으면서도 머리 회전이 조금 늦은 빌립 등의 사람들을 놓고 볼 때, 이들 모두는 절대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집합적 환상에 빠져서 돌아다닐 사람들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앞에 펼쳐진 상황은 절대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집합적 환상이 아니라면 불가능하다. 결국 이 사람들이 굽히지 않고 당한 그 폭력과 박해는, 마음속으로는 의심을 품고 마지 못해서 추종하는 사람들에게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신앙은 무조건적이어야 했으며 그 상황들을 극복할 수 있는 강력함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더욱이 그 신앙이 조만간에 확산되기 위해서는, 설득력 있는 논리와 이미 확증된 증거에 의하여 사람들의 독자적인 정신 속으로 파고들어가야만 했다. (p. 139)

 

 여기서 이 현상의 독특한 점은, 그 신앙이 우리가 추적할 수 있는 예수님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퍼져 나갔을 뿐만 아니라 소수의 사람들이 당시의 가장 유능한 변론가들과 투쟁하면서 그 당시 가장 탁월하고 고도로 조직된 비밀 단체가 고안해 낸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을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들어왔으며, 그 이후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용기를 가지고 유대의 가장 예리한 지식의 중심지로 가지고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겼다. 이 갈릴리 시골뜨기들의 주장은 그로부터 20년 내에 유대인의 교회를 분열시켰으며, 가이사랴에서 드로아에 이르는 지중해 동부 연안의 모든 도시에 그들의 자취를 남겼다. 그리고 이 신앙은 50년이 채 못되어서 로마 제국의 평화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자기의 감정에 따라 믿는 어떤 사람들의 열심과 풍문으로 들은 것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전부 이야기한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 앞에는 이런 큰 신비가 남는다. 그것은 왜 승리했을까? (p.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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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박영선 목사 설교선집 3
박영선 지음, 조주석 엮음 / 복있는사람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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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교회란 나의 죄성을 깨닫고 훈련받는 최고의 공간이다"

 

 

(밑줄 친 구절들)

 

 

1. 교회에서 울리는 합창이 처음부터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온갖 사연을 지닌 채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이 처음부터 제대로 된 합창을 할 리가 없겠지요. 의욕만 앞서기도 하고, 각자의 이해관계나 마음속 상처들이 서로를 긁어대어 괜히 더 시끄러워지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조용히나 있을 것을, 굳이 왜 모여서 소음을 내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그분의 몸이며,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입니다. 우리의 느낌과 판단이 어떻든, 하나님의 선한 뜻대로 아름다운 합창은 울려 나올 것입니다. - 저자 서문

 

 

2. 교회는 아무 말썽이 없고 무슨 일이든지 잘하며 부끄러움이 없고 자랑할 것이 많은 곳일 것이라고 상상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교회란 늘 수군수군하고 빈정거리며, 삐죽거리고 경쟁을 하고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구요? 모두가 "나는 떳떳하게 살 것이다, 이만하면 괜찮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와서 주의 일을 하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돈을 내놓으며 봉사하지만 실상은 생색내는 것을 조아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곳이 교회일 것입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알고 있다가 교회에서 제일 말썽을 부리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는 놀라는 곳이 교회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회가 완벽한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나라를 멋있게 이루어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착각과 환 상 속에 사로잡힌 신자들이 모여서 "아 바로 내가 사마리아 여인이구나, 바로 내가 죄인 중에 괴수구나, 나야말로 만삭되지 못하여 난 사람이구나" 하면서 자탄과 절망 속에서 가슴 아파하는 회개의 기도가 일어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 p. 32

 

 

3. 신자란 하나님을 위하여 뭔가 그럴 듯한 일을 하고 하나님이 못하시는 일을 도와 드려서 그 일을 완성시키는 보조원이 아닙니다. 신자란 다만 인간이 얼마나 희망 없는 족속이며, 죄로 말미암아 얼마나 처참한 자리에 있고, 냄새나는 죄인인가를 영적으로 깊이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이외에 자랑할 것이 없고, 자랑으로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에 불과하다고 여기고, 그 깊이와 아픔을 남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신자입니다. - p. 33

 

 

4. 저는 오늘날 한국교회에 점점 관중만 늘어 가는 현실이 걱정스럽습니다. 교회에는 오지만, 예베드리고 설교 듣고 헌금이나 하고 도망가는 풍토가 만연되는 것이 걱정입니다. 또한 오늘날처럼 신자가 많고, 오늘날처럼 목사가 많았던 적도 없었습니다. 여기저기에 교회가 서고, 한 건물 안에도 몇 개의 교회가 공존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점점 대형화됩니다. 왜 점점 대형화가 되는 것일까요? 교회 안에 들어가 깊이 참여하는 것은 싫고 뒤에 앉아서 몰래 구경꾼이 되고 싶기 떄문입니다. ...... 그러나 신자는 이런 식의 구경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실패해 보아야 합니다. 울어봐야 합니다. "내가 이정도 밖에는 되지 않는구나"하며 자기의 밑바닥을 바라보며 아파해야 합니다. 그리고 왜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한지 절실히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야 주를 닮아가는 첫 걸음을 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 p. 34, 35

 

 

5. ......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이 그가 가는 길이나, 주변 상황이 만사형통하는 축복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 잘 믿으면 건강하고, 예수 잘 믿으면 복을 받으며, 예수를 믿으면 뭐든지 잘된다는 식의 생각은 사실 기독교적이 아닙니다. - p. 66

 

=  기복신앙, 힘의 종교, 능력주의, 성과주의, 은사주의 (이 모든 것들은 기독교신앙에서 '부'지 '주'가 아니다)

 

 

기독교는 사랑을 위해 죽어가는 종교, 희생/헌신하는 종교, 자식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지듯이,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조건없는 사랑을 주신것처럼, 밀알이 되는 종교, 아버지의 마음, 상한 심령을 가지는 것

 

his unconditional loveㅡ.

 

 

6. 우리는 가난한 자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억눌린 자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의롭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의 인기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를 억누르고 고통스럽게 한 자를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주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 p. 6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은 자신의 이웃도 사랑할 것이니"

"가난하고 소외된 약자에게 행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이라"

 

 

7. 기독교는 아무리 교인 수가 늘어난다 해도 세력이나 힘으로 세상 앞에서 진리를 증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핍박당하는 것으로 증명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힘으로 증명하려다 망한 중세를 기억하십시요 - p. 61, 62

 

=  힘이 아니라 성품으로, 그리스도의 향기, 빛과 소금으로서의 그리스도인

 

 

8. 사실 성경에는 전도하라는 이야기가 마태복음 마지막 장과 사도행전 첫 장, 그리고 디모데전서에 한 번씩 나옵니다. 그 외에는 없습니다. 물론 간접적으로 더 있을 수는 있습니다. 중요한 건 서신서를 보면 전부 교회론, 성화론에 관한 것이지 전도에 관한 것은 거의 없습니다. - p. 41

 

 

9. 우리는 자꾸 큰일을 하려고 합니다. 위대한 일을 하려고 하고 남이 못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성경은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 매일 허락된 일상생활, 여러분의 가정을 지키고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생활 속에서 수많은 작은 일을 겪으면서 성숙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 p. 47, 51

 

 

10. 좋은 교회는 교회안에 말썽이 없는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이 모인 곳이므로 당연히 말썽이 생깁니다. 중요한 것은, 그 문제를 어떻게 견디어 내느냐에서 교회의 건강이 판가름 납니다. - p. 109

 

 

11. 세상은 실패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남이니까) 세상은 두번의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일흔 번씩 일곱 번 기회를 주는 곳임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나의 생각)

 

 

교회는 언제나 문제가 있는 곳이다. 병원에 환자만 모이듯, 당연히 문제있는 사람들만 모이니 항상 일이 끊이질 않는다. 그러니 이제 그만 비판하여라. 그렇게 비판하는 너는 도대체 교회를 위해 얼마나 헌신하고 노력이라도 해보았는가? 모두가 교회로부터 멀찍이 떨어져서 손가락질 하기바쁘다. 누구도 직접 그 공동체에 들어가서 아픔을 나누려하거나 헌신하려,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 아무도 문제와 씨름하려하지 않으려 하고, 십자가를 지려하지 않고 그냥 주일예베만 내 편한대로 훌쩍 드리고 가기 일쑤다. 왜? 귀찮아지니까.

 

 

말만하는 믿음은 결코 올바른 믿음이아니다. 말은 되도록 줄이고 도리어 묵묵히 행동해라.

우직하게 내 자리를 지키는 것, 내 포지션을 유지하는 것, 내 자리에서 나의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것이 성숙의 길이며 주님이 내게 원하신 (평생 추구해야할) '성화의 길'이다.

 

* 교회 : 가족 공동체, 한 몸, 하나됨, 내 몸과 같은, 결혼이 두 영혼의 하나됨이라면 교회는 공동체적 하나됨이다.

함께하는 것,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 함께 떡을 떼고 마시며 일하는 것, 하나님이 꿈꾸는 바로 그 이상적인 공동체

 

* 교회의 4 실천요소 : 말씀, 교육, 교제, 활동 // 하지만 그 모든것들보다 가장 중요한것이 바로 말씀중심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기초가 되지 못하면 그 기타 모든 잡스러운 것들은 꽹과리에 불과하게 변질될 뿐이다.

본질을 잊으면 안된다. 교회는 말씀을 가르쳐야하고, 그것을 날마다 강해하고 전해야한다. 그것이 첫째다.

 

 

정말 위대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며 세상에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그렇게 조용히 사라진, 죽어간, 이름도 남기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들이 진정 위대한 사람들이다.

 

- 예언자들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짐)

- 세례요한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 예수님 (십자가에 매달리심)

 

유명해졌다는 것은ㅡ, "너는 이미 상을 받았느니라"

 

http://blog.naver.com/917ph/140211588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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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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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한번쯤 포스팅하고 싶었던 책이다.

http://blog.naver.com/917ph/220171141710 

 

< 피로사회 >

 

 

- 자본주의는 분명히 절대적가치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자기자신은 여기에서 교묘히 제외시킨다. 즉, 들뢰즈가 말했던 바로 탈영토화 이후 재영토화를 말한다. 자본주의와 포스트모던은 모든것을 해체시켜버렸다. 그리고 그 모든것들을 자기 자신들로 대체시키도록 보이지 않게 강요했다. 지금 세계는 모든 사람들, 문화들을 존중해주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보이지 않는 기준이 있다. 누가 아프리카의 가나와 미국을 사실상 동등하게 보겠는가? 뭐든지 인정되는 것 같지만 그 안에 Nudge가 있다. 잘생긴사람, 부자, 가진자, WASP 등 이 안에서도 주류가 엄연히 존재한다. (코드화, 영토화) 우리는 이들을 숭배하게끔 세뇌받는다. 그래서 비주류, minority, 배제된자들, 가난한자들, 장애인, 노인들조차도 모두가 다 '잘생겨지고'(상징적의미) 싶어하게 된다.

 

- 우리가 언제 가장 행복했었는지 떠올려보라, 지금 시대는 갈수록 파편화된, 찢겨진, 개인, 부품화, 도구, 소외 그로인한 외로움, 우울증, 무력감 등등 이미 교과서에도 이것들이 자본주의의 문제점이라고 몇십년도 더 전부터 기록되왔었다.

 

- 자유를 위해 공동체, 사회, 절대적인것, 보편적인것을 대가로 치룬 결과

- 지루함, 답답함, 권태, 쳇바퀴, 정해져있는, 주어진 문화, 보이지 않는 강요,

  의지할곳이 없이 내던져짐(극단적자유)

 

p32.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Attention)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주의(Hyperrattention)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 오히려 현대 자본주의의 심각한 개인화에 따른 (골방주의, 방콕, 칩거 등) 절대고독 등에 직면한 많은 사람들이 사색을 한다. 그러나 역시 공적인 자리에서 보여지는 것은 활동적 삶으로 제한된다. 공적인 분야에서 연애(섹스), 스포츠, 드라마 이외의 것을 주제로 담론을 가지려 한다면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현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즐기라고 허용된 것만 많은 것을 즐길 수 없도록 보이지 않는 압력을 가한다. 물질적 풍요로 사람들의 눈과 코와 귀를 막는다. 마치 힌두교에서 말하는 마야(Maya, 사물의 본질을 볼수 없게 흐리도록 하는 모든 물질적인 것들의 총체)와 같은 형태를 띈다. 현대사회는 인간을 동물로써 사육한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점차 느긋하게 완성되어 가고 있는것이다.

 

p.41. 근대는 신과 피안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믿음까지도 상실하는데, 이러한 상황은 인간 삶을 극단적인 허무속에 빠뜨린다. 유사 이래 삶이 오늘날처럼 덧없었던 적은 없었다. 그 어디에도 지속과 불변을 약속하는 것은 없다. 이러한 존재의 결핍 앞에서 초조와 불안이 생겨난다. (도무지 참을 수 없다, 이 존재의 가벼움을)

 

p 43.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

 

p 50. 공포가 특정한 대상에 관한 것이라면 불안은 존재 자체의 문제이다.

 

- 생각할 수 있는 힘의 상실은 곧 자유의 상실을 의미한다.

 

p 72.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에덴의 시간, 노장사상)

 

p 91. 우울증 환자는 무형적이다. 그는 성격없는 인간이다. (기계부품, 도구) 어떤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고 어떤 역할이나 기능도 수행할 수 있는 유연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무형성 내지 유연성은 높은 경제적 효율을 가능하게 한다. (인간의 기능성만 뽑아서 사용하는, 빠르게 적응하기 위해서, 정글)

- 모든것 일 수도 있지만,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것, 사람의 인격자체가 배제되는 상황

 

"그 사람이 누구냐는 하등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건 그가 일을 잘하냐 못하냐이다. 심지어는 인간관계도 이젠 일을 '잘하냐 못하냐'에 속하게 되버렸다. 아무리 화가나도 기능성을 위해 누구와도 잘 지내야한다"

 

p 96. 우울증은 모든 유대를 끊어버린다.

 

p 97. '주도적이야 한다는 요구'의 끝없는 반복에 지쳐 있는 것이다.

 

p 103. 자본주의가 일정한 생산수준에 이르면, 자기 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된다. (이것이 거의 자본주의의 최종 완성의 단계이다, 자가착취) 이상자아에 비하면 현실의 자아는 온통 자책할 거리밖에 없는 낙오자(loser, 패배자)로 나타난다. (이는 동시에 조급증을 유발한다-지금 나의 현 상태)

 

p 128. 그러나 우울증의 배후에 놓인 성과사회의 압력은 단순한 외적 강제가 아니라 유혹의 형태를 취하며, 오직 인간 자신의 욕망을 매개로 해서만 관철된다. 따라서 성과사회의 압력은 끝없는 성공을 향한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개개인의 반성과 자각을 통해서만 물리칠 수 있다.

 

-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허상, 완벽히 자유로운 자는 혼자다. 도구이자, 부품이다. 그러기위해서라도 민주주의는 필요했다.

 

- 개인은 평등하지 않게 태어난다.

- 개인은 완벽한 자유에 따른 완벽한 책임을 등에 이고 살아야한다. 평생토록! (자유로부터의 도피)

- 사람은 결국엔 누가 이끌어 줬으면 한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 사람들이 서로를 도구 이상으로 느끼지 못하게 됨

 

"사색할 수 없게 만드는게 무엇인가? 그게 바로 1984의 세뇌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이 시대의 패러다임, 시스템, 매트릭스에 관하여, 外 자본주의가 무너질 수 없는 이유 >

 

 

 어째 이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게 없는거 같다. 고대 노예시대부터 산업혁명이 발발한 자본주의 태동기, 그리고 지금 정보화와 포스트모던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지금까지 역시 비참한 인생들은 늘 그렇게 존재해왔다. 그들에게 대체 프롤레탈리아 혁명이니 노동자를 위함이니 따위가 무슨 소용이었나? 그들은 관심조차 없었다. 다만 힘을 가지지 못한 지식인들이 체제에 대항하기 위해 명분을 이용했을뿐...(물론 진실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것이다)

 

 나는 느낀다. 이제 조만간 보이지 않는 광풍이 불어올것이다. 너무 모든것이 미쳐돌아가고 있다. 나 조차 간신히 과거를 되새기며 현재를 종합하고 있는데, 너무 빠르다. 지금이 바로 패러다임의 전환기이다. 정규분포의 끝자락, 혼돈과 무질서가 지배하는, 마치 자본주의 태동기의 폭발적인 생산성으로 인한 극적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지금 현대의 정보화물결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는 모든 사람들처럼... 현대판 춘추전국시대... 모든것이 재편되는 시대... 군웅이 할거 하는 시대다. 누가 패권을 잡을지는 모르나, 한가지 확실한것은 그 모든 피해는 약자들이 지게 되어있다는점이다. 지금 모든 나라가 돈을 정말 말도 안되게 풀고있다. 왜 돈을 푸냐면 일차적으로는 경기부양이겠지만 이차적으로는 상대나라를 조지기 위해 푸는것이다. 돈을 풀면 상대나라는 가만히 앉아서 가치를 뜯기게 되니까 말이다. 지금 이시대는 칼로써 하는 전쟁이 아니다. 돈으로써 화폐로서 하는 보이지 않는 지적인 두뇌전쟁이다. 금리와 환율조작으로 상대에게 어퍼컷을 날리는 시대다. 그러니 서민들만 치솟는 물가에 보이지 않는 착취를 당하는 구조가 현 자본주의인것이다.

 

 사실 자본주의는 절대 없어질수는 없다. 왜냐면 이것은 인간본성과 너무나 밀접하게 맞물려있기 때문이고(힘의논리가 이렇게 교묘하고도 적나라하게 드러난적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자본주의 산업이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한쪽이 무너지면 전체가 무너진다. 마치 기계처럼!(부품하나가 작동을 멈추게 하는것처럼, 미국의 금융위기가 유럽의 재정위기를 촉발하고 또 이것이 다른위기를 촉발시키겠지...지금 땜빵식으로 돈을 막대하게 풀지만 오히려 이럴수록 상처는 곪을 뿐이다. 위기를 초래하게 했으면 그 대가를 치뤄야 한다. 이 유동성 장세는 오히려 장기 불황을 유발할 뿐이다. 그리고 항상 구조조정을 단행하면 그 희생양이 되는건 일반 백성들이지 언제나... 위기를 일으킨놈들은 지들이 일으켜놓고 세금으로 복구하면서... 뭐 나라가 망한다느니 뭐니하는 선전성문구를 남발하면서)

 

 마지막으로 이미 우리가 자본주의에 찌들어있다. 거의 우리 모든 세대가 자본주의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이 모든것들이 너무나 익숙하다. 우리는 자본주의 체계가 금본위제가 폐지된 시점부터 이미 사기라는걸 모른다. 돈의 본질을 모른다. 진짜 누가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정말 딱 들어맞는말,

 

'이 세상의 모든것은 구라위에 존재한다'

 

 파스칼도 왕권의 신성함이 거짓위에 존재한다고 했다. 마치 왕도 똥을 싼다는것처럼 우스꽝스럽다는걸 백성이 깨닫지 못하도록 하는것이 권력의 핵심이니 말이다... (사실 이걸 아는 백성도 있지만 프롬의 '자유로부터도피'처럼 백성이나 군중이나 대중은 누군가가 스스로를 학대하길 바란다. 참으로 오묘한 본능이다. 아마도 이건 누군가를 숭배하려는 인간의 본능이 비뚤게 나간것일게다...하나님을 숭배하는것에서 어긋난 본능...)

 

 

어쨎든 이 모든것들을 다시 되돌리고 옛날로 돌아가자고 혼자서 외칠수 있는가? 누가 당신말을 듣겠는가?

그리고 설령 듣는다하더라도 그게 가능하겠는가?

 

되돌릴순 없다. 자본주의가 멈춘다면 세계는 돌아갈수가 없다.

 

이것은 피할수 없다. 그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이 매트릭스를 이길수 있는 진리의 빨간약은 대체 무엇일까?

예수님이 말하는 보이지 않는 사랑의 논리일까? 거래가 아닌, 비즈니스가 아닌, 보드리야르의 선물의 논리인가?

내가 죽고 남이 사는, 한알의 밀알이 아무 대가없이 떨어져죽어서 열매를 맺는것인가? 희생의 논리인가?

 

 우리는 반드시 욕망해야만 한다. 그래야 자본주의가 돌아간다. 반드시 욕망을 자극해야 수요가 발생하고 그래야 돈을 쓰고 경제가 돌아간다. 이미 오래전부터 욕망을 긍정하는 들뢰즈의 철학이 이것을 예고했었다. 우리는 대체 이제 무엇을 더 욕망해야 하는가? 이제 새로움자체도 지겹다. 새로움에 대한 강박관념, 창조성에 대한 집착도 토할것 같다. 이 미친 자본주의는 대체 어디까지 성장해야 이 광기를 멈출것인가?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점점 더 삶은 비참해진다. 우리나라도 모든게 부숴지고 있다. 해체되고 있다. 가족이 교회가 학교가 모든 곳에 힘의논리가 없는 곳이 없다. 사람들은 이제 자기 자신까지 붕괴시키면서 성장하려한다. 자신의 인간성이나 부모자식까지 제물로 삼아서... 이건 마치 파우스트와 같은 악마의 계약이 아닌가? 힘을 얻기위한 악마의 계약...

 

 피로사회처럼 이제 스스로착취 자가착취하는 시대까지 왔다. 성공신화, 긍정적인것까지 예술, 철학, 심지어 인문학까지 상품화 되었다. 이제 더 상품화 할것이 남긴 한것일까? 상품화 할게 없으니 당연히 청년 실업자가 늘고 선진국 경제가 침체되는게 구조적으로 피할수 없음이 분명하다. 유럽을 봐도 벌써 극우가 모습을 점차 드러내고 있다. 모든 사회가 불만에 차있다. 선진사회 청년들 대부분이 자기는 부모세대보다 미래가 암울할것으로 스스로를 점치고 있다. 자살률과 저출산율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는것의 결과다.

 

 상품화 할것이 없다면 자본주의는 무너진다. 따라서 이제 거의 끝자락까지 왔지만 조금더 지속될것이다. 아직 중국내륙과 아랍권 그리고 아프리카와 같이 개발안된곳이 있으니... 그러나 그곳들마저 모두 개발이 된다면 이제는 정말 주님이 오실 차례신가?

 

 

 

< 21C의 시대정신 : Capitalism, Technology, Mass Media >

 

 

 

"자본은 생산성을 부추기고, 기술력은 미디어를 타고 더 큰 파급력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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