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
칼릴 지브란 지음, 류시화 옮김 / 무소의뿔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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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하나의 우주아래 60억 인구가 살고 있지만, 각자의 눈에 비친 우주는 하나하나 특별하다. 하나의 음악을 듣고 다른 추억을 떠올리며, 하나의 문학을 읽더라도 다른 영감을 피워낸다. 그래서 인간을 또 하나의 우주, '소우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대상을 인식하는 각자의, 소우주의 독자적 반응은 흔히 반사적으로 일어난다. 관성과 습관이라고 부르는 반복적 패턴이 그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고정적인 것은 아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기도 하고, 취향과 선호가 달라지기도 하며, 나아가 삶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달라지기도 한다. 그러한 변화는 흔히 외적 사건에 의해서 촉발되지만 궁극적으로 변화에 마침표를 찍는 것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자기 자신만이 매조지을 수 있는 일이다.
Between stimulus and response there is a space. In that space is our power to choose our response. In our response lies our growth and our freedom.
-Viktor E. Frankl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는 자신이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힘이 있다.
그리고 우리의 반응에 우리의 성장과 행복이 달려있다.
-빅터 프랭클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빈 공간이 있으며, 그 공간에 우리의 자유와 힘이 있고, 그 반응에 우리의 성장과 행복이 달려있다'는 빅터 프랭클의 말. 앞서의 모든 이야기를 단단하게 함축하는 구절이 아닐까.
우리들 각자의 우주는 유일하다. 감각에서 인식으로 이어지는 우리 우주의 빈 공간에는, 우리의 자유와 힘이 존재하며, 거기에 우리의 성장과 행복이 달려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우주에 책임이 있다. 어린 왕자가 자신의 장미를 돌보듯, 우리는 우리의 우주를 돌봐야 한다.

여기 한 시인이 있다. 칼릴 지브란은 예수의 출생지와 인접한, 자연에 둘러싸인 레바논 북쪽 마을에서 태어났다. 시와 그림만을 생각하며 자라나던 소년은 열두살이 되던 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다. 가족들의 헌신과 지원아래 학업을 이어가지만 사랑하는 여동생, 어머니, 형이 연이어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칼릴 지브란은 그 절망감을 예술로 극복해 나갔다. 바로 그림과 문학이다. 당대의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해나갔고 화가와 문학가로 인정받았다.

이 책 '예언자'는 그런 저자의 대표작이다. 예민하고 순수한 '칼릴 지브란'의 영혼에 비친 세계를 작 중 등장인물인 '예언자', '알무스타파'의 입을 빌려 노래한다. 이야기는 섬에 배가 다다르고, 예언자가 떠나갈 채비를 하며 시작된다. 섬의 주민들은 그에게 마지막으로 진리를 남겨주기를 부탁하고, 이에 예언자가 자신의 깨달음을 풀어내며 이야기가 이어진다. 사랑, 결혼, 아이들, 일, 기쁨과 슬픔 등 모두의 일상과 함께하는 존재들을 하나하나 짚어본다. 그리고 자신만의 해석과 시적 언어로 지혜를 풀어낸다. 흔히 습관적으로, 일상적으로 바라보고 흘려보내는 우리 곁 존재들의 의미와 가치를 수면위로 띄워낸다. 독자들의 마음에 물음표를 건넨다. 지금껏 여러분이 바라본 세계는 어땠냐고. 그것으로 충분하냐고.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영혼에 비춰질 세계는, 어떻게 빛날 수 있겠냐고.

24 <사랑에 관하여>
사랑은 저 자신밖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으며, 저 자신밖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사랑은 소유하지 않으며 소유당하지도 않는다.
사랑은 사랑으로 충분하므로.

26 <결혼에 대하여>
그러나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41 <일에 대하여>
그러나 나는 말한다. 열망이 없는 인생은 어둠이고,
지식이 없는 열망은 맹목이며,
일하지 않는 지식은 헛된 것이고,
사랑이 없는 일은 무의미하다.
(...)
그대가 만일 사랑으로 일할 수 없고 싫은 마음으로 일할 수밖에 없거든, 차라리 일을 떠나 사원 문 앞에 앉아, 기쁨으로 일하는 이들에게 구걸을 하는 것이 낫다.
왜냐하면 만일 무관심 속에서 빵을 굽는다면, 그대는 인간의 배고픔을 반밖에 채우지 못하는 맛없는 빵을 구울 것이므로.
또한 적의를 품고 포도 열매를 밟는다면, 그대의 적의가 그 포도주 속에서 독을 뿜을 것이므로.

86 <우정에 관하여>
시간을 죽이기 위해 친구를 찾는다면 무엇이 친구인가?
언제나 시간을 살리기 위해 그를 찾으라.

105 <쾌락에 관하여>
그대의 육체는 그대 영혼의 현악기이다.
그것으로 감미로운 음악을 울릴 것인지, 혹은 혼란스런 음을 낼 것인지는 그대에게 달린 일.

일부분씩만을 인용했지만, 단문을 넘어 문단으로, 문단을 넘어 글 전체의 흐름을 함께함으로써 그 울림이 더욱 크게 공명하는 글들이었다. 한 동안 반사적으로 살아온 나에게, 보이는 것만을 보고 습관적으로 반응하던 나에게, '깨어남'의 의지를 충만하게 했다. 무엇을 감각할 것인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어떤 감정을 느낄 것인가. 궁극적으로, 내 앞의 존재와 어떻게 감응할 것인가. 나의 소중한 우주를 돌보기 위해서 나는,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할 것인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생각나기도 헸다. 칼릴 지브란의 문장이 가진 매력도 충분했지만, 한편으로 니체와 헤르만 헤세의 글이 떠오르기도 했다. 아마도 이 두 사람의 글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책 '예언자' 역시 한결 반갑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간을 살리기 위해서 사람을 만나고 책을 만나고 세상을 만나야겠다. 소유하지 않고 소유당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 충분한 사랑을 해야겠다. 마치 어린 왕자가 자신의 장미를 돌보듯이. 물론 함께 있되 약간의 거리를 둘 것이다. 하늘 바람이 나와 장미 사이에서 춤을 출 수 있도록. 칼릴 지브란의 순수한 영혼과 사랑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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