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서문
버크.베카리아.니체 외 27인 지음, 장정일 엮음 / 열림원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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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읽기]
일의 읽기에서 놀이의 읽기로
정말이지 많은 변화를 경험한 한 해였다. 그 중에서 가장 기쁘게 생각하는 것을 꼽아보라면 고민끝에 '읽기의 변화'를 선택하겠다. 작년 이맘 때 나의 읽기 방식을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어떠한 계기로 책을 손에 잡는다 - 냄새를 맡는다(나는 새 책의 종이냄새를 좋아한다) - 목차를 대강 훑어본다(서문은 가뿐히 건너뛴다) - 본문의 첫 페이지부터 정직하게 읽어나간다 - 끝페이지를 읽으면 덮는다>
반면에 요즘의 독서 순서는 이렇다.
<어떠한 계기로 책을 손에 잡는다 - 냄새를 맡는다 - 목차를 훑어본다. 글의 전개를 마음속으로 그려본다. 호기심과 질문들을 떠올린다 - 서문을 읽는다. 호기심과 질문들을 떠올린다 - 서문을 바탕으로 목차를 다시 훑어본다 - 목차를 기준삼아 관심가는 곳을 빠르게 훑어본다 - 본문을 읽는다(종종 목차를 펼쳐보며 긴 흐름 속 현재 위치를 짚어본다/인상적인 부분에 밑줄을 긋는다) - 간단하게 마인드맵을 그린다>
독서 방식의 변화에 따라 가장 크게 다가온 것은 '재미'다. 이전의 독서가 '일'에 가까웠다면 지금의 독서는 '놀이'에 가깝다. 또 몰입도와 이해도도 한껏 높아졌다. 이에 배우고 느끼는 바도 늘어났으며, 자연스레 실생활에서 활용되는 폭도 넓어졌다. 

목차는 설계도, 서문은 암호
12 목차는 저자가 자신의 주장을 어떻게 구성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설계도다. 자기 머릿속에 넣어둔 목차와 본문을 대조해가며 읽을 때 독자는 저자가 된 듯한 기분마저 느낄 수 있다.
 제목이 압축 파일이라면 서문은 그것을 푸는 암호다. 서문은 책이 쓰여진 동기와 방법론을 설명해주며, 저자가 다루고 있는 질문의 윤곽과 주제를 명료하게 해준다.
그리고 이 책의 독서를 통해 또 하나의 변화를 경험하였다. '서문의 읽기'에 무게중심을 더하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목차를 거점으로 삼았다. 그로부터 가지를 뻗어 세부내용을 읽어 나갔다. 그런데 이 책의 독서를 통해 '서문'역시 '목차'못지 않게, 어쩌면 그보다 더 저자의 세계를 오롯이 응축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짧은 '서문'이 긴 '본문'보다 더 큰 세계를 담고 있을 수 있다는 반전의 지혜를 얻을 수 있었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한 또렷한 방향성을 제시해주는 '친절하고 고마운 암호'인 '서문'을 소중하게 맞이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결과적으로 '서문'과 '목차'와 '본문'을 나란히 중요하게 생각하며 책을 읽어나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실제로 이 책을 완독한 뒤, 최근 짬짬이 재독하고 있는 '뿔을 가지고 살 권리'를 꺼내 서문을 읽어보았다. 서문의 첫 문단부터 제목이라는 압축파일을 풀어내고 있었다. 뿔이란 태생적 자질을 의미하며 '자신이 자신다울 수 있는 것'의 중심에 뿔이 자리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보통'을 넘어 '자신'이 됨으로써 '의미'와 '건강'을 획득할 수 있음을 역설했다. 5페이지 짜리 서문에 담긴 세계가, 200페이지의 본문에 담긴 세계보다 결코 작지 않았다. 서문은 저자의 고민과 화두를 오롯이 담고 말을 건넸다. '들어봐, 지금부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말이야...'

나의 꽃: 친근함 / 글쓰기 / 영감
이 책 '위대한 서문'은  서문들의 모음집이다. 스피노자, 조너선 스위프트, 몽테스키외, 루소, 니체, 다윈, 보들레르, 도스토옙스키, 프로이트 등 위대한 저자들의 위대한 서문들을 한 곳에 모았다. 각 서문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저자와 책에 관한 간략한 해설을 첨부함으로써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덕분에 본문을 읽기에 앞서서 낯설음을 줄이고 호기심을 높임으로써 한결 편안하게 위대한 서문들을 읽어나갈 수 있었다.

이 책의 '서문'이라는 '본문'을 읽어나가며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해본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의 정령이 발견한 꽃'이다. (아래 '가까이 읽기'에서 해당구문을 인용하겠다)

첫째, 위대한 저자들의 원전을 향한 낯설음의 해소다. 프로이트, 니체, 스피노자, 다윈 모두 내가 좋아하는 학자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저서를 직접 읽어본 경험은 거의 없다. 대부분 해석을 곁들인 주해서나 짤막한 인용문구로 배움의 기회를 얻고는 했다. 원전에 손을 뻗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낯설음', '어려울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 때문이었다. 또 한편의 이유로는 '방대한 양' 도 있었다. 그런데 막상 서문을 만나보니 생각보다 난해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연구의 이유'와 '개인적 사연'과 '연구의 한계'와 '한계에 대한 해명' 같은 이야기들은 매우 인간적인 냄새를 풍겼다. 원전을 읽는것에 대한 부담감을 현저하게 낮출 수 있었다. 서문이라는 '큰 세계'를 미리 만나봄으로써 분량은 방대할지라도 '같거나 작은 세계'를 나란히 담고 있는 본문을 한결 부담없이 읽어나갈 수 있겠다는 안도감도 생겼다.

둘째, 글쓰기에 대한 배움의 기회가 되었다. 책에 소개된 서문들을 읽어나가며, 담긴 내용도 내용이지만 구조적으로 정말 '잘 쓴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제와 부연과 방향성이 일목요연하고 명확했다. '좋은 글'이라는 것이 무엇이라고 정의내릴 수는 없지만 여기 담긴 글들은 정말이지 '좋은 글'이라고 느꼈다. 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한 멋진 사례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셋째, 다양한 '영감'들을 품어볼 수 있었다. 각각의 서문은 각자의 세계를 담고 있다. 위대한 사상가가 세상과 마주치며 피워낸 '질문', '호기심'. '화두'의 모음이다. 같은 경험을 하더라도 배움과 느낌의 범위는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더 넓은 영감을 피워낼 수 있는 사람일수록 삶을 풍성하게 경험하며, 자신의 세계를 의미와 행복으로 채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나의 세계에서 어떤 영감을 피워내고 있는지' 짚어보며, 순간의 경계에서 더 멋지고 아름다운 영감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목차, 본문, 그리고 서문
이전의 읽기가 '목차'와 '본문'중심이었다면 이제는 '서문'이 그 옆에 나란히 자리하게 되었다. 제목이라는 압축파일을 서문으로 풀어내고 목차라는 설계도와 함께 본문의 세계를 탐험하는 흥미로운 여행, 앞으로의 독서 여행은 한결 편안하고 재미있어질 것만 같은 기대감이 든다.
 
[가까이 읽기]
도덕의 계보학,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1844~1900)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인 니체의 저서다. 책을 받자마자 가장 먼저 펼쳤고 역시나 빠져들어 한달음에 읽어 내렸다. 그동안은 짜라투스트라를 제외하고는 해설서 위주로 니체를 만나왔기에 원저의 서문을 읽게 된 것은 신선한 경험이었다. 낯설음이라는 내면의 진입장벽을 허물고 니체의 원저와 하루빨리 만나봐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285 우리는 사실 우리 자신에게 필연적으로 낯선 존재로 있고,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며, 우리 자신을 혼동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 존재이다'라는 명제는 우리에게 영원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 자신에게 우리는 '인식하는 자'가 아닌 것이다.
내면세계를 향한 니체의 탐구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세상을 감각하고 인식하지만, 자신을 감각하고 인식하게 되는 일은 '의지'를 필요로 한다. 어렵고 생경하지만 가치있는 일, '성찰'과 '알아차림'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본다.

287 우리는 어떤 일에든 개별적으로 존재할 권리가 없다. 우리는 개별적으로 잘못을 저질러도 개별적으로 진리를 파악해도 안 된다. 오히려 나무에서 필연적으로 열매가 열리듯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생각과 가치, 우리의 긍정과 부정, 가정과 의문이 자라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서로 유사하고 관계가 있으며, 하나의 의지, 하나의 건강, 하나의 지구, 하나의 태양을 증거하고 있다.
니체는 '관계세계'를 중요시한다. 세계와 세계, 사람과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내면세계 역시 다양한 관계로 구성되어있다고 말한다. 하나의 이지와 건강과 지구와 태양을 조각해가는 주체로서, 나는 책임과 의식을 다하고 있는지 묻는다. 한편으로 그 놀이의 유희를 즐겁게 누리고 있는지 묻는다.

289 마침내 나는 나 자신의 나라, 나 자신의 땅을 갖게 되었고, 말없이 성장하며 번성하는 전 세계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흡사 비밀스러운 정원 같은 것을 갖게 되었다.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갖게 된다는 차라투스트라의 구절이 생각나는 대목이었다. 'You Should'라고 말하는 낙타의 세계를 부수고 니체가 만들어낸 자신의 나라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가 새로 써내려간 '도덕의 계보'는 어떤 질서를 이루고 있을까? 그는 그 체계와 질서에 확신을 갖고 있었을까? 

296 말하자면 이 명랑함, 나의 말로 하자면 즐거운 학문은 보람 있는 일이다. 물론 모든 사람의 관심사는 아니더라도 오랫동안 용감하고 근면하게 남몰래 진지하게 살아온 사람에게는 보람 있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전진하라! 우리의 낡은 도덕도 희극에 속하니라!"라고 진심으로 말하게 되는 날에 우리는 '영혼의 운명'에 관한 디오니소스적인 드라마를 쓰기 위한 새로운 갈등과 가능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명랑하고 즐거운 학문이라니.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그 방대한 탐구와 저작이 가능했을까. 그가 신랄하게 부정하는 낡은 도덕에 마저도 희극의 미소를 보낼 수 있는 디오니소스적 긍정. 니체가 주는 '의미'와 '의지'의 힘을 다시금 확인한다.

297 이 저서가 누군가에게 이해되기 어렵고 귀에 거슬린다고 해서 나는 그것이 반드시 내 책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먼저 내 저서를 읽으면서 약간의 노고를 아끼지 않았기를 바라는 나의 전제를 감안한다면 누구의 책임인지 아주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이 불편한가? 나는 할 만큼 했으니 내 책임은 아니다. 그렇다면 누구 책임이겠는가? 그것도 아주 분명하단다. 이런 니체의 밉지않은 거만함, 순화한 표현으로 '당당함'은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다. 그동안 읽어온 해설서의 인용문에서는 이러한 성향이 간접적으로 느껴졌지만, 서문에서 이렇게 직접적으로 만나게되니 한결 반갑고 재미있게 느껴졌다.

꿈의 해석, 지그문트 슐로머 프로이트(1856~1939)
325 결국 나는 나 자신의 꿈과 내게 정신분석 치료를 받는 환자들의 꿈 가운데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신경증적 특성들이 뒤섞여 꿈속의 사건들이 예기치 않게 복잡해지기 때문에 사용하기 곤란했고, 나의 꿈을 이야기하면 내 정신적 삶의 내밀한 부분을 원하는 것 이상으로 타인에게 보여 주어야만 했다. 그것은 시인이 아니라 자연과학자인 저자에게는 으레 요구되는 정도를 넘어선 것이었다.
알려진바와 같이 프로이트는 꿈이 정신세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한 사람의 꿈을 연구함으로써 그의 무의식 속 내면세계를 탐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꿈은 한 사람의 보이지 않는 치부를 실체화 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서적 문제를 겪는 개인의 보이지 않는 문제를 포착하고, 억압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론이 옳다면, 우리의 꿈은 함부로 꺼내어 이야기할만큼 사소한 것이 아니다. 꿈 속의 상징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이에게, 개인의 은밀한 내면세계가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인 프로이트 역시 예외는 아니다. 연구의 근거로 활용할 수 있는 표본의 숫자가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꿈'만큼 유용한 자료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꺼내어 놓는다면 자신의 은밀한 내면세계가 드러나게 된다. 이러한 선택의 고민을 담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시인이 아니라 과학자다'라고. 이러한 자신의 갈등을 이해해달라고. 위대한 학자가 경험한 인간적인 고민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역사적인 저작이 태어나는 물밑에서 보이지 않는 번민들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한편으로 나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A를 선택하면 나의 저작의 신뢰도를 높이고 풍부한 부연을 곁들일 수 있다. 하지만 나의 내밀한 정신세계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 B를 선택하면 나의 내밀한 세계를 지킬 수 있지만 내 저작의 완성도를 끌어올릴 기회를 놓치게 된다. 과감하게 특정한 균형점을 선택할 수 있을까? 정말이지 어려운 선택이 될 것 같다.

인상과 풍경,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1898~1936)
338 항상 우리의 영혼을 세상 사물에 따라 부으면서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어른거리는 영혼의 그림자를 보고, 또 마법과도 같은 우리의 감성에 형식을 부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게 된다.

339 커튼이 올라가고 있다. 이 책의 영혼은 이제 곧 심판을 받을 것이다. 독자들의 눈은 사고에 비칠 영혼의 꽃을 찾는 두 명의 정령이 되리라. 이 책은 하나의 정원이니, 이 정원에 꽃을 심을 줄 아는 자는 복되도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을 위해 장미를 꺾을 수 있는 자는 축복받을지어다...! 감성의 향이 은은히 퍼지는 향유를 받으면 환상의 등불이 켜지리라.
커튼이 올라가고 있다.

스페인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1898~1936)의 '인상과 풍경' 서문 중 일부이다. 나는 이 서문을 밑줄로 난도질 하다시피 했다. 그 만큼 마음에 울림을 주는 구절이 많았다. 눈을 감고 상상해본다. 책을 펼치며 커튼이 올라가고 두 눈의 정령이 불을 밝힌다. 넓게 펼쳐진 정원에서 소중한 씨앗을 발견하고 정성껏 심는다. 금새 피어난 아름다운 장미를 조심스레 꺾는다. 영감의 꽃으로 고양된 영혼은 환상의 등불을 밝힌다. 이런 감수성을 지닌 작가가 쓴 책은 어떤 세계를 담고 있을까? 나는 그 곳에서 어떤 꽃을 피워내고 끝내 꺾을 수 있을까? 한편으로는 헤르만 헤세가 떠오르기도 하는 글이었다. 꼭 본문과 저자의 책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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