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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치료 그 30년 후의 이야기 - 심리치료는 과연 내담자들의 인생을 변화시키는가?
로버트 U. 아케렛 지음, 이길태 옮김 / 탐나는책 / 2020년 7월
평점 :
고통받는 한 인간이 있습니다. 삶은 고통스럽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만큼은 어렴풋이 짐작하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는 지금 삶의 방향성도, 삶을 주도할 의지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힘을 내어 단 하나의 작지만 위대한 작업을 시작합니다. 비참한 자신을 마주보는 것이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직시하고, 인정하고, 이해하기 위한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물론 쉽지 않은 작업입니다. 깊은 자기혐오와 수치심에 빠져있는 사람이 자신을 마주본다는 것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굉장힌 용기가 필요한 작업이죠.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로버트 U. 아케렛', 심리치료사입니다. 각자의 사연과 상처를 간직한 다섯 내담자는 아케렛 박사와 함께 치유의 여정에 나섭니다. 그리고 긴 대화의 끝에서 상처입은 내면의 어린 아이를 만나게 되죠. 그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었던 강박적 행동의 원인을 파악하고, 그동안 자신의 삶이 왜 그토록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합니다. 과거에 대한 이해와 수용을 바탕으로, 더 나은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야겠다는 의지를 다잡게 되죠.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삶의 여행을 떠날 준비를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과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을까요? 그렇다면 더할나위 없겠죠. 하지만 삶은 동화가 아닌 현실입니다. 사람은 고쳐쓰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통용될만큼,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믿음입니다. 그래서 아카렛 박사가 나섭니다. 무려 30년만에, 과거의 내담자들을 찾아나서는 새로운 여행을 시작한 것입니다. 심리치료가 끝난지 30년, 내담자들은 과거의 상처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또 다시 과거의 강박적 패턴에 장악당하고 삶의 주도권을 잃어버린 채 고통받고 있을까요? 30년 전의 심리치료는 그들의 삶에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요? 책 <심리치료 그 30년 후의 이야기>에 담긴 이야기입니다.
책 <심리치료 그 30년 후의 이야기>는 다섯 내담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자신을 스페인 백작부인이라고 생각한 여자 나오미, 북극곰을 사랑한 남자 찰스, 가학피학성애 공상에 시달리는 남자 세스,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믿는 여자 메리, 작품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한 작가 샤샤, 이렇게 다섯 내담자가 등장합니다. 치료사 아케렛은 그들의 이야기와 함께하며 때로는 온화하게, 때로는 단호하게 대화를 이끌어갑니다. 내밀한 깊은 곳에서 그들을 옭아매고 있는 마음의 쇠사슬을 발견하고 그것을 풀어내기 위해 분투합니다. 그렇게 그들은 조금씩 조금씩 자유와 기쁨을 향해 다가서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상담의 끝에서 그들은 미지의 영역을 향해 모험을 떠납니다. 익숙한 삶을 떠나 새로운 일상을 시작하는 것이죠. 아카렛 박사와 내담자들의 만남은 30년 뒤에 이어집니다. 30년 전의 상담이 어떤 영향을 미쳤고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가 되었는지 진솔하게 털어놓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내담자는 3부에서 다뤄지는 '가학피학성애 공상에 시달리는 남자 세스'의 이야기였습니다. 세스는 심각한 고민이 있습니다. 결혼한 지 3개월만에 '발기불능'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에 아내는 성기능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으면 세스를 떠나겠다고 협박하고 있었습니다. 25살의 나이에 영화계에서 알아주는 젊은 제작장였던 세스에게 선뜻 어울리지 않는 고민이었죠. 하지만 사실은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오래된 비밀입니다. 세스는 종종 가학과 피학에 관련된 성적 공상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여성을 괴롭히는 가학적 공상, 그리고 자신이 오르가즘에 이르렀을 때 기계에 의해 죽게되는 피학적 공상의 두 가지입니다. 이러니 발기불능이 오는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발기가 되면 세스는 죽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세스의 고민을 듣던 아케렛은 이렇게 말합니다. "대단한 어머니를 두었을 것 같군요." 치료사의 직관입니다. 실제로 세스의 어머니는 굉장했습니다. 아들을 정서적·신체적으로 완전히 장악하고 통제했습니다. 세스의 의붓아버지가 세스를 추행하는 것도 교육을 명목으로 방조했죠. 어린 세스의 마음속에는 이런 메세지가 선명하게 각인되었습니다. "너는 아주 특별한 아이야. 하지만 너는 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게 무력함과 수치심에 매몰된 세스는, 발기부전을 전능으로 치환하며 보상받기 위해 가학성애에 빠져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세스와 아카렛은 힘겹지만 꼭 필요한 작업에 뛰어듭니다. 세스의 마음 속 '어머니'를 직면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보낸 편지를 반복해서 읽어나가며 어머니의 광기 속에서 함께 헤엄칩니다. 그렇게 자신의 몸속에 있는 독을 서서히 배출하며 생기를 되찾아갑니다.
책을 읽어가는 내내 '심리학 서적'이라기보다는 한 인간의 위대한 성장과 해방을 다룬 '소설'을 읽는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고통받는 한 인간이 자신을 직면하고 이해하고 수용하고 해방되어가는 모습은, 그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한 인간으로서 축복의 박수를 보내고 싶어짐과 동시에, 읽는이에게도 마찬가지의 짜릿한 해방감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다섯 내담자들이 가진 고통의 근원을 들여다보는 여정을 함께하며, 저 역시 제 마음 속 깊은 구석의 유사한 상처와 고통을 인식하고 수용하고 해방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30년 전 세스를 해방시켰던 아케렛이, 30년 후에 만난 세스로부터 영감을 얻고 치유되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습니다. 한 인간이 또 다른 인간에게 선한 영향력을 건네며 치유와 회복과 해방의 희망을 열어젖히는 광경은, 종교가 없는 저에게도 신성하고 황홀한 감정으로 벅차오르게 만들었습니다.
심리학을 공부하는 분들이라면 무조건 권합니다. 책에는 치료사로서 느꼈던 아카렛의 고민과 걱정과 책임감과 부담감도 진솔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감되는 구석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마음의 아픔을 경험하고 있기에 심리상담을 받고 있거나 알아보고 있는 분들께도 강력 추천하고 싶습니다. 위대한 다섯 영웅의 치유, 회복, 성장의 여정이 여러분들께도 귀한 영감과 희망을 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충분히 그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