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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억을 보라 - 비통한 시대에 살아남은 자, 엘리 위젤과 함께한 수업
엘리 위젤.아리엘 버거 지음, 우진하 옮김 / 쌤앤파커스 / 2020년 4월
평점 :
절판
온 세상이 회색빛으로 보였던 시절이 있습니다. 삶은 무의미했고, 세상은 부조리했고, 타인은 위선과 기만으로 가득했으며, 나 자신은 무능하고 무력하고 쓸모없는 존재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타인에 기대지 못하며, 자신을 혐오하는 사람이 머물만한 공간은 없었습니다. 밖에서 바라보기엔 분주하게 무언가를 찾아다니는듯 보였겠지만, 냉정하게 돌이켜보면 그것은 회피였습니다. 자신으로부터의 도피였습니다. 긴 방황을 지나 '배움'이라는 교량을 건너며 마침내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으로부터 도망친 사람은 결코 낙원에 이를 수 없음을 말입니다. 나의 불완전함과 모순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불완전함과 모순으로부터 한발짝 나아갈 수 있음을 말입니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기억'하는것입니다.
책 <나의 기억을 보라>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 '엘리 위젤'과 함께한 '기억'을 담은 책입니다. 15세 때 처음 엘리 위젤을 만나 20대와 30대까지 학생과 조교로서 곁에서 일상을 함께한 '아리엘 버거'가 기록한 스승의 삶입니다. 그렇다고 '전기'같은것은 아닙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기억'입니다. 학교와 일상에서 위젤교수와 함께 대화하고 토론하며 배우고 성장해나간 일상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엘리 위젤이 수업과 대화에서 강조했던 삶의 핵심가치들이 구체적이면서도 자연스럽게 녹아있습니다. 사상을 담고 있기에 의미있고 일상의 형식을 띄고 있기에 재미있습니다. 책을 읽어나가는 내내 재미와 의미가 뿜어내는 기분좋은 고양감과 함께할 수 있었습니다. 눈에 힘을 주고 입가에 미소를 띄고 정신없이 책장을 넘겼습니다.
그렇다면 '엘리 위젤'은 누구일까요? 도대체 그가 누구길래 우리가 그의 생각과 기록을 만나는 것이 의미있을까요? 그는 유대인입니다. 왼팔에는 문신이 있죠. 수감자번호 A-7713. 그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입니다. 1944년 5월 가족과 함께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15세였습니다. 그곳에서 어머니와 세 여동생이 살해당했고 아버지마저 해방을 앞두고 사망했습니다. 종전 후 프랑스의 고아원으로 보내진 그는 소르본 대학교에 입학하여 문학, 철학, 심리학을 공부했고 1976년부터 보스턴 대학교 인문학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세계 각지의 폭력과 차별에 맞서 인권운동에 앞장섰기 때문입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8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됩니다. 지옥의 수용소에서 가족을 잃었고 평생을 인권운동에 헌신한 엘리 위젤은, 우리에게 어떤 메세지를 던졌을까요? 야만의 시대를 지나온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그는 무엇을 제시했을까요? 바로 '기억'입니다. 다름아닌 '기억'입니다.
50 그는 그렇게 우리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을 기억해달라고 호소했고, 그 덕분에 우리는 과거를 확인하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위젤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며 이렇게 언급했다. "무엇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기억입니다."
148 "키에르케고르는 신앙이란 잃었다가 다시 찾아야 하는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여기서 '잃다'라는 말을 '상처'로 바꾸고 싶습니다. 살면서 한 번쯤은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경건파의 한 스승은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상처 입은 마음만큼 온전한 마음은 없다.' 나는 상처 입은 신앙만큼 온전한 신앙은 없다고 믿습니다."
기억이라니요. 아우슈비츠의 생존자가 기억을 말하다니요. 생각만해도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잊거나 회피하고 싶은 것이 일반적일 것입니다. 복수와 응징을 바랄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기억을 말합니다. 기억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오히려 망각이야말로 우리를 노예의 길로 이끌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 망각을 통해 노예가 되는걸까요? 누구나 살면서 마음같지 않은 상황을 맞이하기 마련입니다. 실패하고 좌절할 때면 무력감과 자책감을 느낍니다. 최악의 경우 자기혐오에 빠질수도 있습니다. 분노는 자신만을 향할까요? 타인을 향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 분노가 한 개인을 넘어 사람과 관계를 향한 근본적인 회의감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고립된 사람은 무력감에 빠집니다. 스스로를 구할 수 없는것은 물론이거니와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어려워지죠.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입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존재하지만, 함정에 빠진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주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노예'라는 호칭이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억'은 다릅니다. 상황을 이해하게 하고 자신을 돌보도록 만들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억'을 통해 우리가 '배움'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24 "교수님, 홀로코스트 이후에 교수님을 지탱해준 건 무엇인가요? 어떻게 포기하지 않고 버티실 수 있었나요?"
위젤 교수는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답했다. "배움입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나는 탈무드의 한 페이지를 공부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그만 공부가 중단되었지요. 전쟁이 끝난 후 나는 프랑스에 있는 어느 고아원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제일 먼저 사람들에게 부탁한 일이 바로 내가 공부하던 것과 똑같은 탈무도 책을 구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중단되었던 바로 그 페이지, 그 줄, 그 지점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배움이 나를 구원한 것입니다."
24페이지의 인용문은 읽는 순간 저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고, 이 책을 읽어나가는 내내 마음 속 한켠에서 팝업창처럼 띄워져 있었습니다. 배움이 한 소년을 구했습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문 밖을 나가면 '배움'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탈무드의 한 페이지를 읽다 말았기 때문입니다. 다음 구절이 소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저에게 주어진 이 한 문장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요? 부끄럽고 창피해졌습니다. 당연히 존재하는 세상이 아닙니다. 당연히 존재하는 내가 아니죠. 당연히 존재하는 문장이 아니며, 당연히 존재하는 여백이 아닙니다. 그렇게 소중함의 필터로 바라본 세상은 1초 전의 그것과 사뭇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잊어버릴 것입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니까요. 망각을 통해 노예가 되겠죠. 하지만 우리에겐 '기억'이 있습니다. '기억'을 통해 '배움'을 얻을 수 있고 성장할 수 있으며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음의 팝업창 한 켠에 계속해서 엘리 위젤의 문장을 띄워놓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삶이라는 책의 어떤 페이지를 읽다 말았는지, 그 다음 페이지는 어떤 의미와 재미를 담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호기심과 설렘의 마음을 잃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85 "윌리엄 포크너는 노벨 문학상 수락 연설에서, 정말 글로 쓸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주제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갈등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누군가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런 모습이 겉으로도 드러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가진 수많은 모습을 설령 모순투성이라도 더 많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받아들이게 되지 않을까요? 그들이 가진 모든 모순과 갈등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기억'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무력감과 자기혐오를 넘어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것이 그 시절의 '희망'이었습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나'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자 '너'도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를 판단하고 비난하던 긴 시간동안, '너'역시 함부로 판단하고 비난해왔음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내가 바라본 나 역시, 나에게 있어 하나의 타인으로 자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긴밀하게 연결되어있습니다. 나 자신에 대한 책임이 있고, 우리 곁의 누군가를 향한 의무가 있습니다. '나'와 '너'와 '우리'의 모순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그 모든 투박함을 '배움'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끝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와 '너'의 긴밀한 연결고리를 타고 서로를 구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멋진 기억'과 '소중한 추억'은 덤일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