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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 : 나를 변화시키는 조용한 기적 ㅣ 배철현 인문에세이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9월
평점 :
말은 힘이 세다. 언어의 힘은 강력하다. 힘겨웠던 시절 내면의 혼란을 흩어내고 마음의 중심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일기'를 쓰기 시작한 덕분이 컸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으로 나아가는 사이에, '휘둘리는 것'에서 '다룰 수 있는 것'으로 건너가는 사이에, '언어'라는 '교량'이 있었다. 쓰고, 생각하고, 나와 대화하는 과정에서 많은것들이 분명하고 명료해졌다. 어떤 이들은 사고의 경계를 설정하고 확장을 제한하는 언어를, 궁극적으로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글쎄, 언어를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우선 언어에 이르러야만 한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며 신념이다.
세상을 또렷하게, 세상을 명료하게
<정적>의 독서는, 그런 나에게 세상을 또렷하고 명료하게 바라보도록 돕는 '언어'의 힘을 다시금 생생하게 느끼도록 해주었다. 4부, 28개의 키워드를 여행하는 과정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눈을 더욱 새롭게, 신선하게 가다듬을 수 있었다. 그렇게 획득은 관찰의 눈으로 다시 세상을 바라보는 과정은 내적 성장의 기회를 주었음은 물론 발견의 기쁨도 함께 선물했다. 책장을 덮으며 "일상이 단순하고 지루했던 것이 아니구나. 내가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구나."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감탄했다. 열린 발견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를, 분주하게 움직이는 일상의 한켠에서도 부지런히 빈번하게 '정적'에 이를 수 있기를 스스로에게 바라보았다. 스타일과 의도를 갖춘 선명한 개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심연'과 '수련'을 넘어 '승화'를 향하여
10 '정적'은 잠잠한 호수와도 같은 마음의 상태다. 잡념으로 인해 흔들리는 마음의 소용돌이를 잠재우고 고요하며 의연한 '나'로 성숙하는 시간이다. 정적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려면, 그 안에 부단한 움직임을 품고 있어야 한다. 정적은 '정중동'이다.
<정적>은 고전문헌학자 배철현님의 에세이다. 사실 에세이라는 단어를 쓸까말까 잠시 고민했는데 이유가 있다. 보통의 에세이와 달리 주제와 흐름과 체계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주제는 바로 '위대한 개인'이다. 위대한 개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비우고, 채우고, 새롭게 갖추고, 새로이 거듭나야 할 요소들을 담은 시리즈다. 이 책은 『심연』, 『수련』, 『승화』와 함께 네 권으로 이루어지는 '위대한 개인'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다. 자신의 '심연'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미세한 소리를 감지하고, 삶의 군더더기를 버리는 '수련'을 거친 사람은 '정적'을 통해 자기 자신이 변화하는 고요한 울림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앞서의 두 단계가 중요치 않은 것들을 '비우는'느낌이라면, <정적>에 이르러서는 비로소 나아갈 방향을 재정립하고 스스로를 채워나가기 시작하는 일종의 변곡점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러한 세 단계를 거친 후 마지막 '승화'의 단계에서 저자가 선물할 키워드는 무엇일지 기대감을 품으며 책장을 덮었다.
적극적 열밍으로서의 자유
217 자유의 소극적인 의미는 탈출이다. 남들이 만들어놓은 정신적이며 육체적인 굴레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한다. 소극적인 자유는 자유가 지닌 가치를 드러내지 못한다.
218 자유는 탈출이 아니라 열망이자 추구다. 자유는 자신이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제대로 기능한다. 자유는 자신의 개성을 발휘하게 만들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다양하고 조화롭게 만드는 역동적인 힘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키워드는 '3부:포부-내가 나에게 바라는 간절한 부탁'의 6번째 키워드인 '교육'이다. 저자는 교육을 '어제의 세계로부터 탈출하는 훈련'이라는 부제로 정리한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교육은 '인적자원'을 양성하는 성과지향적 교육이 아니다. '위대한 개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성장지향적 교육이다. 저자는 서양에서 고대로부터 존재했던 중요한 가치를 고취하는 교육과정, 라틴어로 '트리비움'이라는 단어를 풀어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독립적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교육인 '아르테스 리베랄리스', 즉 '교양 교육'을 거듭 강조한다. 우리가 흔하게 사용하고 있는 '에듀케이트'라는 단어의 어원을 들여다보면 학생들이 각자 지니고 있는 고유함을 자극해 그것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거룩한 수련으로 풀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각자의 개성을 가진 학생 개개인의 내재된 고유함을 발견하고 실현해내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교육의 역할이라는 것. 정형화된 틀에 맞춰 실용적인 '인적자원'을 '생산'해내는 것이 목적인듯 보이는 우리의 교육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큰 이야기였다. 한편 나 역시 자 자신을 교육해나가는 주체이자 책임자로서, 열망을 추구하고, 역량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개성을 발현하고 ,의지를 실현하며, 적극적 자유를 누리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존엄한 인간으로, 자유로운 개인으로
https://youtu.be/ubZrAmRxy_M
자신의 기원과 조우하는것만큼 신비한 순간이 있을까. 영화 <모아나>에는 매우 신화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주인공 모아나가 비밀 동굴에서 숨겨진 조상들의 배를 발견하는 장면이다. 모아나의 시대에는 항해를 떠나지 않는다. 이불밖은, 아니 방파제 밖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아나의 열망을 알아본 할머니가 슬그머니 모아나를 비밀동굴로 안내한다. 모아나는 어둠속에서 오래된 북을 발견한다. 먼지쌓인 북을 힘차게 두드리자 '용감한 항해자'였던 조상들의 진면목이 눈앞에 생생히 펼쳐진다. 해류를 읽고 별을 보며 방향을 찾던 조상들은 길을 알았다. "We know the way!"라고 자신있게 외치며 항해를 떠났다. 그런 조상들의 역사와 조상들이 가졌던 힘을 알게 된 모아나는 곧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는다. "우린 항해자였어"라고 외치며 오랫동안 내면에 존재했지만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내면의 보물을 되찾는다. 용감하고 단호하게, 항해를 떠난다.
49 그 여정은 깊은 묵상을 수련하는 자에게 수여되는 선물이다. 그는 그 길로부터 이탈시키려는 그 어떤 달콤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의 마음속에는 자신이 가야 할 이정표가 있기 때문이다.
이 마음의 지도가 '의도'다. 의도는 목적지를 향해 걷는 수행자의 내공이다. 평온한 사람은 마음속 깊이 은밀하게 의도한 것들을 말과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53 인생은 자신의 운명을 모르는 자에게는 불평과 불만의 대상이다. 그는 자신이 가야 할 길에 들어서지 않고 남들에게 주어진 길을 따라가기 때문에 신명이 나지 않아 하루하루가 힘들다. 그러나 자신의 임무를 아는 사람은 인생 여정의 지도를 가졌기에 하루하루 가야 할 구간을 안다. (...) 현명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재산 중 시간을 가장 값진 것으로 여긴다. 하루라는 시간을 장악하기 위한 사색, 그리고 사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삶의 나침반인 의도는 하루를 가치 있게 만든다.
저자는 <인간의 위대한 여정>을 통해 빅뱅에서 호모 사피엔스까지 인류의 여정을 되돌아본 바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잊어왔던, 혹은 소흘히했던 위대한 가치를 재발견한다. 바로 '이타심'이다. 투쟁과 가득한 세상을 살아왔고 경쟁으로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흔히 생존의 비결이라고 생각하는 '이기심'이 아닌, '이타심'이 인간을 살아남게 했으며 '이타적 유전자'야말로 인간 생존과 번영의 숨겨진 비밀이라고 강조한다. 역사와 유물의 외적관찰을 통해 '인간'을 발견하던 저자가 이번에는 '개인'을 향한 내적성찰과 발견의 기록을 들고 왔다. 성경, 신화, 고전문학 등 인류의 오래된 기록들 속에 녹아있는 삶의 지혜들을 엮어냈다. 우리는 인간이며 동시에 고유한 개인이다. 인간으로서의 보편적 존엄을 지키며 개인으로서의 고유한 자유를 누리는 것, 더할나위없이 빛나는 균형의 실현일 것이다. 문제는 나침반이다. 바다를 누비는 항해자가 별과 해류를 읽고 방향을 잡듯, 선택의 기로에서 지혜를 구할 삶의 나침반이 필요하다. 누가 만들어줄 수 없고 만들어줘서도 안된다. 스스로 탐구하고 발견해야 한다. 자신만의 나침반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반갑고 고마운 단서가 있다. 인간의 삶이다. 인간의 기록이다. 역사와 고전이다. 자신만의 나침반을 갖고 "We know the way!" 라고 외치며 용감하게 항해를 나섰던 위대한 인간, 영웅들의 기록이 있다. 그들이 전해줄 영감과 지혜가 마중물이 되어 깊은 내면의 영혼과 감응함으로써 위대한 개인은 고양되고 성장하며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기쁘고 값진 독서였다. 『심연』과 『수련』도 얼른 사서 읽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