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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하게 산다는 것 - 모멸의 시대를 건너는 인간다운 삶의 원칙
게랄드 휘터 지음, 박여명 옮김, 울리 하우저 / 인플루엔셜(주) / 2019년 5월
평점 :
[짧은 서평]
글이 아무래도 길어질 것 같아 먼저 짧은 소개글로 정리합니다. 최근 읽었던 책 중 손에 꼽을만큼 좋은 책입니다. 절대적 가치를 상실한 시대입니다. 여기저기의 집단과 단체에서 저마다의 신념과 가치를 주장하지만, 열린마음에 기반한 대화와 절충이 아닌 독단과 편협함에 기댄 대립과 독선으로 변질되기도 합니다. 종교가 있다면 훌륭한 나침반이 되겠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종교는 '희망' 밖에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독일의 뇌과학자 게랄트 휘터가 너무나 당연하지만 너무도 어이없이 우리가 놓치고 살아왔던 하나의 숭고한 가치를 서랍 깊숙한 곳에서 꺼내옵니다. 바로 '존엄'입니다. 얼마나 당연하냐하면 심지어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습니다. '헌법 제10조-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는 대목을 통해서죠. 그런데 우리는 존엄을 기억하고 있나요? 스스로를 존엄하게 대하고 있나요? 곁에 있는 사람을 존엄하게 대하고 있나요? '우리'의 존엄 속에서 '유대감'을 발견하고 있나요? 가치와 방향성을 상실한 시대, 모멸의 시대를 건너기 위해 저자가 제안하는 삶의 나침반이 바로 '존엄'입니다. 독특한 점은 앞서 말했듯 저자가 철학자가 아닌 뇌과학자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저자의 주장에는 뇌과학적 근거가 함께합니다. 뇌과학이 부연하는 '가능성'이 제시됩니다. 이기적유전자를 극복할 수 있는 '뇌가소성'이 그것입니다. 그렇다고 과학 이야기만 담긴것은 아닙니다. 칸트의 정언명령이나 키케로의 의무론 등 철학적 이야깃거리도 담겨있으며 누구보다 존엄한 삶을 살았던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의 경험도 함께합니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명언을 발견했을 때는 너무나 반가워서 입가에 미소가 번졌습니다. 저자는 이처럼 철학과 과학을 넘나들며 흥미롭게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책은 하나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아가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 가치, "존엄을 어떻게 우리 삶에 되살릴 것인가"라는 의문에 다다르며, 존엄을 삶에 뿌리내리기 위한 실천전 방법을 제시합니다. 알면 뭐하냐고요? 실천하기 어렵지 않을까요? 글쎄요. 마지막으로 존엄에 대한 확신에 찬 저자의 말을 소개합니다. "자신의 존엄성을 인식하게 된 인간은 결코 현혹되지 않는다." "당신이 어느 날 갑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깨달았다면, 그 순간 이후로 당신은 결코 이전에 살아왔던 방식대로 살지 못한다." 삶을 사랑하는 당신께, 자신을 사랑하는 당신께, 삶과 자신을 사랑하기를 희망하는 당신께, 존엄한 당신께 권합니다.
[긴 서평]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얼마 전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읽던 중 한동안 읽기를 멈추고 숨을 고르게 만들었던 구절이다. 1980년 광주의 참혹한 현장은 우리에게 인간의 존재 의미에 대해, 인간으로서 지켜야만 하는 가치를 잃지않기 위해 무엇을 지향해야 할지에 관한 질문을 남겼다. 그런데 오늘, 나는 어느 독일 뇌과학자의 책을 읽으며 한동안 잊고있던 위의 구절을 다시금 떠올려보게 되었다. 책 <존엄하게 산다는 것>의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구절을 통해서다. 책 제목을 통해 손쉽게 유추할 수 있듯이 저자가 내놓은 해답은 바로 '존엄'이다. 여기서 존엄은 법적권리로서의 의미에 한정되지 않는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나침반, '삶의 양식'으로서의 존엄이다. 존중을 잃어버린 시대, 모멸의 시대, 단절의 시대, 신체적 탈진의 시대, 회의주의의 시대, 불신과 혐오의 시대, 경쟁과 상대적 우월함이 중시되는 시대. 그 안에서 무력해진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일깨우고, 공동체의 유대감을 복원하며, 스스로 존엄한 존재가 되어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불변의 가치이자 삶의 절대적 지향점. 그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존엄이다. 나의 행위로 이해 고통을 느낄 것임이 자명할 타인을 눈 앞에 두고 그의 존엄을 떠올렸다면, 그러한 가해행위로 인해 손상될 자신의 존엄을 기억했더라면, 우리의 아픈 역사도 조금은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13 그 사실을 '인지하는 것'과 그로 인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데 행동의 변화가 일어날리 만무하다.
반면 단순히 아는 것, 인지하는 것을 넘어 정말로 '이해'하기 시작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해한 지식이나 깨달은 사실은 두뇌의 감정적인 영역을 활성화시켜 우리를 깨우고 움직인다. 당신이 어느 날 갑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깨달았다면, 그 순간 이후로 당신은 결코 이전에 살아왔던 방식대로 살지 못한다.
고지식하고 뻔한 이야기라고 고개를 젓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존엄을 몰라서 지켜내지 못하겠냐고, 현실적은 상황들이 그렇지 못하게 만들고있지 않냐고 말이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이야말로 잘 모르는 이야기다. 스스로 존엄하게 살고있지 않다면 그것은 존엄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엄함을 자각한 이는 결코 존엄하지 않게 살아갈 수 없다. 불가역적인 깨달음이라는 의미다. 뇌의 감정적인 영역을 활성화시키며 마음 속 깊이 자리잡은 존엄은 삶의 또렷한 방향성을 일깨우는 소중한 나침반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렇게 살아갈 삶은 뇌의 에너지 소모를 줄여주며 몸의 에너지는 충전된 듯한 느낌을 갖게 해준다. 매 순간 살아있음을 느끼는 삶으로 나아가게 해준다. 서로의 존엄함을 존중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 역시 유대감과 생동감으로 가득하다. 존엄은 방향성을 상실한 현대인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어 줄 숨겨진 내면의 보석이다.
책 <존엄하게 산다는 것>의 저자는 뜻밖에도 철학자가 아닌 뇌과학자다. 저자는 뇌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인간 내면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존엄의 씨앗을 발견하며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세계를 재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핵심은 바로 '뇌가소성'이다. 인간의 뇌는 경험과 인식에 따라 평생에 걸쳐 변화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 인간은 유전체에 담겨진 동물적 본능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결정론과 달리 뇌가소성은, 인간 존재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지금까지 반사적으로 이끌려온 신념과 패턴을 스스로 깨부수고, 깨어있는 통찰과 경험을 바탕으로 발견한 새로운 가치체계와 신념체계로 구성된 내면의 질서를 스스로 창조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떠오르는 철학자가 있는 분들이 있다면 참 반갑겠다.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다. 신이 죽은 시대, 스스로의 삶을 사랑하며 삶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고 몸으로 호소했던 철학자다. 책에는 "어린 아이는 순진무구하며,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 최초의 운동, 거룩한 긍정이다."라는 니체의 유명한 격언이 발췌되어 있다. 이 외에 니체의 사상을 깊이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저자 역시 니체를 좋아하고 영향을 받은것 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뇌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니체의 사상을 연결할 수 있다는 것, 정말이지 재미있고 흥미로운 생각 경험이었다.
123 흥미로운 것은, 이와 같은 사고방식과 태도 역시 우리 뇌에 뿌리를 내린 상위 행동 패턴에 다라 조정되고 형성된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또한 유년기에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이를 '자아상'이라고 표현한다. 넓은 의미로 자아상이란 한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결정하는 개념으로, 이와 동시에 한 사람이 어떤 존재가 되기를 원하는지, 어떠한 삶의 방향을 따르고 있는지, 어떤 가치를 토대로 결정을 내리는지를 나타내는 개념이기도 하다.
125 반면 자신이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싶은지 기준을 만들어내지 못한 사람은 내적 질서를 세울 방향성을 갖는 데에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 결국 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많은 것이 뇌와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무질서를 낳을 수밖에 없으며, 필연적으로 에너지 소비량이 증가하는 결과를 낳는다.
개인적으로 가장 고개를 끄덕거렸던 대목이다. 나는 좋게 말하면 타인을 배려하는 편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스스로 줏대가 없는 편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고 모색하고 실현하기보다는, 같이 있는 사람이 '좋아할만 한 것'을 맞춰주기 위해서 주의를 기울였다. 이러한 태도로 누적된 삶 속에서 나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실현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고민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작년에 김정호교수님의 MPPT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스스로를 기쁘게 하는 행동'의 리스트를 작성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남들은 미소띈 표정으로 신나게 이런 저런 것들을 적어내리는 사이에 나는 머리를 쥐어짜며 마치 수학문제를 풀듯 하나씩 목록을 늘려갔던 기억이 난다. 이처럼 스스로 '기준'을 세우지 못한 때문인지 늘 나의 마음 한 켠에는 정신적인 피로감과 회의감의 자리잡고 있어싿. 하지만 이보다 더욱 분명하게 자각되었던 것이 바로 '몸의 피로감'이다. 최근 스스로의 가치체계와 신념체계를 비롯한 내면의 질서를 바로세우기 위한 일련의 노력을 이어온 이후 가장 분명하게 자각되는 것 또한 '몸의 피로감'이 줄었다는 사실이다. 상식적으로도 그렇다. 기준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만족할 수 있을까? 기준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만족하지 못하고 늘 후회에 머무는 사람의 몸이 어떻게 충만한 에너지를 유지할 수 있을까? 건강함과 생명력으로 가득할 나의 몸을 위해서라도 내면의 질서를 세워나가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겠다고, 그 모든 과정에서 '존엄의 나침반'을 손에 쥐고 있어야겠다고 다짐했다.
153 이미 알고 있듯이 우리 아이들이 자라는 세상은 결코 정상적이지만은 않다. 아이들이 마주하는 것은 오히려 사람들이 목적과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낸 세상이다.
이러한 세상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 결코 주요한 일이 아니다. 타인을 짓밟아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행위에 의해 많은 이의 삶과 공존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인을 마치 도구나 기계, 가축을 여기듯 자신의 목적과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면서도 거리낌이 없다. 이것이 성인들만 겪는 경험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나마 성인들은 자신을 지키고 저항할 능력이라도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되는 아이들이다.
153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하고, 타인의 목적과 목표, 기대와 평가, 지시와 지도, 더 나아가 전략과 명령의 대상이 되는 경험. 그것은 한 개인이 갖고 있는 주체성과 존엄성에 위협을 가한다. 이는 매우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그 자체로 목적이어야 할 인간이 하나의 수단으로 취급받을 때, 그 것은 애정과 소속감뿐 아니라 주체성과 자유를 원하는 인간의 기본 욕구를 무너뜨린다. 놀랍게도 이러한 환경에 처했을 때 활성화되는 뇌의 영역은 우리 몸에 문제가 생겼을 때 활성화되는 곳과 같은 영역이다.
가장 의미있었던 대목은 '6장-타인의 존엄을 지켜야 하는 까닭'에서 '교육'과 '존엄'을 연결지은 대목이었다. 아이들은 태이날때부터 이미 알고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자신이 어떤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이다. 그리고 이것에 위배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울음을 통해 분명하게 감정을 전달한다. 미세한 감정의 형태를 띈 이 감각은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너무 많은 것에 무방비로 노출되지 않도록 돕는다. 그리고 저자는 이것이 '존엄'과 관련된 감각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존엄의 감각은 선험적인 요소도 있지만 태어난 후의 경험도 영향을 미친다. 하나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아주 친밀한 소속감이고, 다른 하나는 이 소속감을 기반으로 한 인간으로서 성장하고 발전하는 경험, 그리고 자신의 창의력에 대한 경험이다. 나아가 아이는 다양한 경험과 특별한 만남을 통해 인생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주체로 성장한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이 순조롭게 흘러가지 않는 경우이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을 조건화하고 대상화하며 주체성과 존엄성에 손상을 가하는 일이 벌어지기 쉽다. 이렇게 상처받은 아이가 선택하게 되는 안좋은 해결책으로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상대가 했던 그대로 타인을 바라보고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애정과 소속감을 향한 기본 욕구를 억누를수밖에 없다. 이는 관계의 존엄성을 해치며 나아가 자신의 존엄성마저도 해치게 된다. 두 번째 방법은 자신이 나쁜 사람이며, 사랑받을 자격조차 없이 부족하고 능력이 없다는 말을 하며, 스스로를 타인의 평가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타인에게 부정적 평가를 받기 전에 스스로 그렇게 인정해버리는 것이 덜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자기 존엄성에 대한 감정과 사고를 스스로 억눌러야만 한다. 결국 아이는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없는 어른으로 자라나게 된다.
조건없는 애정과 사랑, 아이가 자신을 사랑하는 건강한 마음을 가진 어른으로 자라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키워드가 떠오른다. 바로 '자존감'이다. 작년 한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던 심리학 키워드다. 비교와 경쟁속에서 소진되어버리기 십상인 세상, 조건없는 자기사랑의 기둥인 자존감을 세울 수 있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자신의 모습이 이토록 한심하고 별로인데 어떻게 조건없이 사랑할 수 있겠냐는 반문이었다. '자기사랑'이라는 것이 너무나 생경한 감정이라 몸으로 받아들이기가 어색하고 낯설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런데 '존엄'은 '자존감'과 비슷한 의미이면서도 다른 느낌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자존감이 '느낌'이라면 '존엄'은 '질서'처럼 말이다. "조건없는 사랑에는 조건이 없지만, 나를 조건없이 사랑해야 할 이유를 묻는다면 내가 '존엄'하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할수도 있지 않을까? 같은듯 다른 두 개의 단어를 연결지으며 나 자신을 사랑하며 존중해야 할 당위를 좀 더 단단히 세울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아 뜻깊은 읽기였다.
130 결국 새로운 경험은 우리의 전두엽에 형성되어 있는 자아상 형태의 경험에 추가되고 연결된다.
130 아이들은 두 살 즈음에 이와 같은 자아상을 갖게 된다. 자아상이 형성된 아이는 더이상 "이건 마리예요"라는 말을 하지 않고 "이건 나예요"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된다. 물론 초반에는 '나'라는 관념이나 이를 통해 형성되는 주체성이 매우 불안정하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되는 과정에 쌓는 모든 경험은 자신의 자아상을 견고하게 하고, 추가하고 확장하며, 또한 수정한다. 이를 통해 마리라는 아이가 체험하고 경험한 것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다.
그렇다. 형제들이여,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신성한 긍정이 필요하다. 정신은 이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의욕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하게 된다.
-프리드리히 니체, 정동호 역,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p. 41
인간은 '보편적인 존재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른바 인간적 특성들은 다른 모든 인간과 공유하지만, 항상 독립된 개인이며, 그 밖의 모든 존재와 다른 유일무이한 개체다. 지문이 다른것처럼 성격과 기질, 재능과 성향의 결합도 제각각이다. 자기만의 개성을 드러내는 경우에만 인간으로서 자신의 잠재력이 확인된다. 살아 있어야 한다는 책무는 본래의 자신이 된다는 뜻이며, 결국 잠재된 능력을 발휘하는 개체로 성장한다는 뜻이다.
-에리히 프롬, 강주헌 역, 『자기를 위한 인간』, p.44
존엄한 인간은 수단으로 살지 않는다. 오로지 그 자신이 목적이 되어 스스로 삶을 창조한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이끌어줄 확고한 내면의 나침반을 갖고 있기에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방향을 응시한다. 존엄은 자신과 삶을 지켜줄 소중한 나침반이다. 참으로 소중한 나침반이다. 그러나 나침반만큼이나 소중한 것이 또 하나있다. 바로 '여행'이다. 이 소중한 나침반을 손에 쥐고 고이고이 모셔두기만 한다면 그 진가는 제대로 발휘될 수 없을 것이다. 존엄의 나침반을 손에 쥐고 떠나는 자유로운 삶이라는 여행, 어쩌면 그것이 존엄의 발견보다 더 중요한 도약이 아닐까? 존엄한 자신으로서 존엄한 삶을 펼쳐나가는 삶의 여행, 존엄한 삶의 여정에서 존엄한 자신을 조각해나가가는 자기조각의 여행.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라는 순환의 여행을 이어나갈 모든 존엄한 이들을 응원한다.